본 전시는 동시대를 관통하는 대표적인 논제를 ‘디스토피아(Dystopia)'로 상정합니다. 유토피아의 반대 급부로 등장한 디스토피아는, 올더스 헉슬리나 조지 오웰, 윌리엄 깁슨과 같은 저명한 문학가들의 소설을 필두로 우리에게 마치 아포칼립스(Apocalypse)와 같은, 가능한 미래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 중 하나를 예언하는 듯한 형상을 보여주며 무한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ㅤ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희망이 없고 -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을 기반으로 합니다. 개인과 사회, 인류의 발전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믿는 공포와 절망의 상상은 현대인의 삶에 정서적으로 깊게 드리워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 표상은 억압된 집단, 통제된 사회, 비관주의적 묘사로 드러난다. 기술의 발전에 대한 희열과 의구심, 근미래에 대한 열병, 자유에 대한 갈망과 상실, 파괴적 욕구와 맞물린 대재앙의 서사. 디스토피아는 인간 근원에 묵시론적으로 존재하던 분열적 욕망을 담고 있는 키워드인 것처럼 보입니다.
ㅤ
그렇기에 디스토피아의 신화는 맹목적 믿음으로 현현합니다. 세상의 종말을 담보로 했던 디스토피아의 형상은 현재로 넘어온 바로 지금 ‘이미 와 있는 것’과 같은 현실적 감각을 획득합니다. 대중문화, 매스컴에 의해 빠르게 포착되는 흐름은 그것이 그리는 시대상을 ‘화려한 종말’ 혹은 ‘맹신적 최후’의 모습으로 꾸며내고는 합니다. 최근의 동향은 여러 키워드를 다루고 있으며 그 핵심적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
ㅤ
SF, 디스토피아, 객체, 비-인간, 다양성, 퀴어, 몸, 행복, 쾌락, 현실, 가상, 연결, 생태, 자연, 포퓰리즘, 바이러스, 시공간, 디지털, 신기술, 이미지 등.
ㅤ
이러한 동향은 미디엄(medium)으로서의 미디어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 우리가 이를 소비하는 방식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음을 역설합니다. 사회적 이슈와 문제는 미디어를 통해 표출되고 있으며, 그것을 생산하는 주체들은 종종 미디어를 다시 도구로 소환합니다. 쪼개진 미디어의 잔상은 보다 깊숙하게 일상으로 침투하였고, 모든 이데올로기와 서사는 분절되었습니다. 이제 시대를 포괄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하나의 주제 아래 혼재된 이념은 묶여질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합니다.
ㅤ
《호텔, 디스토피아》는 이러한 동향 속, 흡착되지 못한 채 미끄러지는 것, 사변적으로는 존재하나 명료히 지시되지 못한 동시대의 파편과 조각을 ‘디스토피아’라는 키워드를 통해 읽어내고자 합니다.
이에 따라 본 전시는 5가지 키워드를 그 논제로서 내포합니다.
ㅤ
SF적 상상
축조된 세계관
가능한 삶
불가능한 죽음
새로운 친족의 형성
ㅤ
‘SeMA 벙커’는 임시적으로 점거되어 《호텔, 디스토피아》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호텔’은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양가적인 기능을 지닌 장소이자 비장소의 성격을 가집니다. 5가지의 키워드로 풀어낼 작품들은 그들이 배치되는 곳에서 서로 공적으로 마주하고 또 사적으로 분리되어 내밀한 영역을 발현시킴으로써 교차 지점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관람포인트
기획자 소개
문현정
기획자 문현정은 동시대 예술이 보여주는 실험적인 시도와 이에 파생되는 담론에 주목하여 사회문화적 현상을 포착하고 공유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고민한다. 그 중에서도 동시대 기술과 매체에 주목하여, 인간과 기술 사이의 간극을 예술이 어떻게 매개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한다. 이에 포스트 휴머니즘, 바이오 아트 등 동시대 기술을 기반으로 한 담론들을 연구하는 글을 쓰고 있다. 예술학을 전공했으며, 유아트랩서울, 바라캇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나비 미술관에서 근무했다. 미디어 문화예술 채널 앨리스온의 에디터로 활동하는 중이다.
참여작가 소개
고요손
고요손은 설치미술가이자 조각가로 활동하며 '누가 어떻게 감상하는가에 따라 변화하는 조각'을 만든다. 직접 손으로 깎아낸 비정형 형태의 조각을 비롯하여, 음식과 같은 사라지는 재료로 소재에 변주를 주며 선입견에서 벗어난 색다른 구조의 오브제를 제작한다. 또한 시와 퍼포먼스를 활용하는 등 다양한 형태를 선보이며, 조각을 고정된 대상이 아닌 관람자로 하여금 시간 기반으로 경험하도록 만드는 실험을 이어나가고 있다. ≪조각충동≫(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2022), ≪Milky Way≫(코리아나미술관, 서울, 2021), ≪Michel≫(얼터사이드, 서울, 2021) 등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장진승
장진승은 인간 존재에 내재하는 편견과 차별,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상호 이해의 가능성에 관심을 두고 작업한다. 이를 위해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데이터 시각화, 시청각 아카이브 시스템, 영상,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근미래에 도래할 인간의 인식 및 인지 구조를 실험한다. 작가는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을 졸업하고, 이후 현대자동차그룹이 운영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플랫폼 ZER01NE의 크리에이터로 활동하였으며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운영하는 고양레지던시에 입주해 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리얼리티 시뮬레이션 Realite Simulee≫(온수공간, 2021)이 있으며, ≪디지털 공명≫(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 G.MAP, 광주, 2022), ≪MODS≫(합정지구, 서울, 2021), ≪퍼블릭아트 뉴 히어로≫(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청주, 2021), ≪사적인 노래 I≫(두산 갤러리 서울, 서울, 2020)등의 그룹 전 및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조상현
조상현은 디자인 스튜디오 하이텐코(HITENCHO)를 운영하는 디자이너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재료와 기계장치, 기술을 활용하여 제작을 위한 과정을 설계하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을 가구와 오브제의 형태로 제작한다. 서울시립대학교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디자인 아카데미(Design Academy Eindhoven)에서 컨셉추얼 디자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시립대학교 등에 출강하며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사물사물≫(KCDF갤러리, 서울, 2021), Seating Seoul≫(문화역서울284, 서울, 2020), ≪Collectible≫ (Fracas Gallery, 브뤼셀, 2020), ≪Polyrhythmic≫(탈영역우정국, 2019), ≪12.12≫(Spectrum, 바르셀로나, 2019), ≪Don't Smash the Door!≫(Fracas Gallery, 2019) 등의 기획전에 참여했으며, 다수의 국내외 공예·디자인 페어에 전시되었다.
황선정
황선정은 인간과 자연, 기술의 관계에 주목하여 비인간과 인간, 살아있는 식물, 유기 세포와의 연결을 찾아나가는 실험을 이어나가며 작업한다. 뉴미디어, 설치, 인공지능(AI), 제너러티브코딩, 음악, 오디오-비주얼(A/V) 등 기술 미디어를 활용하여 작업하고, 다학제 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연구자, 뮤지션, 시인, 작가 등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와 교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시대의 휴머니티와 탈-인간 중심적 관점을 고민하며 균사체 네트워크 시스템, 유기체 운동연구 리서치 등 바이오와 미디어 매체의 결합을 시도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팀 oOps.50656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2022 파라다이스 아트랩≫(파라다이스시티, 인천, 2022),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RESIDENCY≫(ACC, 광주, 2021) 등의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케이켄
케이켄(Keiken)은 탄야 크루즈(Tanya Cruz), 하나 오모리(Hana Omori), 이사벨 라모스(Isabel Ramos)로 이루어진 아티스트 그룹이다. 런던과 베를린을 오가며 활동하는 이들은 멕시코와 일본, 유럽, 유대인적 배경을 공유하며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한다. '경험'을 뜻하는 일본어에 어원을 둔 케이켄은, 메타버스(Metaverse)를 구축하여 새로운 구조와 방법을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으로 가능한 미래를 상상하고 있다. 영화, 게임, 설치, 확장 현실(XR), 블록체인 등을 활용하여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고, 몰입형 가상공간을 만들어 현실의 인식 체계와 법칙에 대한 확장을 도모한다. 제1회 샤넬 넥스트 프라이즈(Chanel Next Prize)를 수상했으며, 서머셋 하우스(Somerset House, 영국, 런던)에 입주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제2회 타일랜드 비엔날레≫(태국, 코랏, 2021), 전자예술의 집(House of Electronic Arts HEK, 스위스, 바젤, 2021), ≪17회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이탈리아, 베니스, 2021), ≪프랑크푸르트 쿤스트페어라인≫(독일, 프랑크푸르트, 2020), ≪트랜스미디알레≫(독일, Haus der Kulturen der Welt HKW, 2020) 등 다수의 국제전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