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합 88―07〉(1988)은 마대 천 캔버스 뒤에서 스며 나온 물감을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획을 그어 작가의 행위의 흔적을 남긴 작업이다. 이러한 행위에 의해 화면 전체에 반복되는 가로, 세로의 획의 흔적은 물감의 물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추상적인 화면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회화성을 드러낸다.
하종현(1935― )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한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다. 1999년 서울시문화상, 2007년 프랑스 문화훈장 기사장을 받았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와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을 역임했다.
마대 천과 물감의 만남이라는 하종현의 대표 연작 〈접합〉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물질이 갖는 고유한 성질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대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으로 화단에 등단한 하종현은 캔버스 천을 잘라 엮는 등의 기하학적 추상으로 전환하였다가, 1970년대 초반 전위적 미술단체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신문지, 용수철, 나무 등을 활용한 실험적인 설치미술을 시도하였다. 이 시기 다양한 오브제 작업에서 표출되기 시작한 그의 물성에 대한 관심은 1974년 시작된 캔버스 작업 〈접합〉 연작으로 귀결되었다. 이 연작은 캔버스 표면에 물감을 칠한다는 개념에서 벗어나 걸쭉하게 갠 물감을 성기게 짜인 마대 천 캔버스 뒷면에서 밀어 넣어 성긴 틈 사이를 통해 배어나오게 하는 작가 특유의 방식을 이용한 작업이다. 여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마대 천 캔버스 앞면에 송골송골하게 맺힌 물감 알갱이들이다. 작가는 이를 흘러내리게 하거나 특별히 고안한 나이프나 주걱으로 흔적을 가하는 행위를 통해 물감의 다양한 표정을 드러낸다. 흰색, 갈색 등 무채색으로 제작되는 이러한 〈접합〉 연작은 행위를 중심에 둔 물성의 실험이다. 접합의 의미 자체가 물질과 신체의 만남이며, 물감 긁기, 밀어내기 등의 다양한 신체적 행위를 만나 그 물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능한 한 물질 그 자체인 상태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말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행위는 재현을 거부하고 물질의 그 상태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행위이다. 그리고 물감과 캔버스라는 물성 그 자체를 지향하는 이와 같은 행위는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