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순은 여성미술을 개척하고 사회 변화를 지향하는 행동주의 미술의 초석을 다진 작가다. 1970년대 말에 대두된 실천문학과
리얼리즘 미학에 영향받아 ‘인간 삶의 해방’을 위한 예술관을 정립해가던 김인순은 1986년 제2회 시월모임 전시 《반에서 하나로》(그림마당 민, 서울)에서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현실을 조명한 작품으로 주목받는다. 이 전시에서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선보였으나, 기층 여성의 힘겨운 현실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인식한다. 이후 여성이 실제 삶 속에서 겪는 현실을 그려가자는 데 뜻을 같이한 동료 여성작가들과 1986년 12월 민족미술협의회 내에 여성미술분과(1988년 여성미술연구회로 개칭)를 결성한다. 대표로서 이 단체를 이끈 김인순은 여성학과 여성의 현실 문제를 연구하면서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의 삶과 노동 문제에 집중했다. 특히 공장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등 기층 여성의 삶을 가시화하며 여성이 경험하는 사회 문제를 공론화하고자 했고, 이러한 그의 작품은 여성미술연구회 연례전 《여성과 현실》(1987-1994)에 매년 발표되었다. 여성 노동권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여성미술분과 내에 현장 지원활동을 위한
그림패 둥지를 결성했다. 그림패 둥지는 여성이 주도하는 민주화운동 및 노동운동을 위한
걸개그림과 시각자료를 공동 제작해 현장에 보급했다. 노동시위 현장을 찾아가 여성노동자들을 만난 김인순은 직접 목격한 현장 분위기를 작품에 생생하게 담아냈다. 개인 작품에서도 열악한 여성 노동환경의 심각성과 노동자 권리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린힐 화재에서 스물두 명의 딸들이 죽다>(1988)는 1988년 3월 25일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그린힐섬유공장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 20여 명이 기숙사 화재로 사망한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화재 발생 당시 기숙사 입구가 철제 셔터로 막혀 있고 비상구가 밖에서 잠겨 노동자들이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김인순은 비인간적 환경에서 참극을 당한 어린 봉제노동자들의 가슴 아픈 현실을 붉은 화염을 통해 생생히 재현했다. 서로 껴안고 절규하는 여성들, 잠긴 문을 밀며 애쓰는 한 무리의 여성들, “보고 싶은 어머니께” 편지를 남기려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어린 여성노동자 모습은 화재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이들은 결국 재봉틀과 원단, 실 등이 불에 타면서 발생한 유독가스로 질식당했다. 벽에는 사고 발생일인 3월 25일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 쳐진 달력이 걸려 있다. 오른쪽 화염 속에는 근심 어린 표정의 어머니가 묘사되어,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었을 어린 여성들의 희생에 안타까움을 더한다. 김인순은 오른쪽 아래 “빗장 걸린 문을 부수고자 온몸을 부딪치다 서로 껴안고 죽어간 그린힐 자매들이여! 그 맺힌 한 품지 말고 영혼으로 승화되어 노동자를 지키는 하늘이 되어다오”라는 문구를 적어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노동자들이 보호받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아냈다. 이 작품은 1988년 제2회 《여성과 현실》(그림마당 민, 서울) 전시와 각종 대학 순회전시, 파업장 순회전시, 노동자 대동제에 출품되었다.
김인순은 1941년 서울에서 출생해 1962년 이화여자대학교 생활미술과를 졸업했다. 1982년 작업을 재개해 1984년 첫 개인전을 열며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1985년 시월모임을 결성했다. 이후 여성미술연구회 대표, 그림패 둥지 대표, 노동미술위원회 위원장,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민족미술인협회 공동회장을 역임하면서 민중미술 계열의 미술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문화위원,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이사, 여성문화예술기획 이사를 역임하며 여성단체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84년 첫 개인전 《김인순전》(관훈미술관, 서울)을 시작으로 1995년 《여성·인간·예술정신》(복합문화공간 21세기, 서울), 2005년 《느린 걸음으로》(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17년 《김인순 초대전》(지앤갤러리, 울산) 등 7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1986년 《40대 22인전》(그림마당 민, 서울), 제2회 시월모임 《반에서 하나로》(그림마당 민, 서울), 1987-1994년 《여성과 현실》 연례전(그림마당 민, 서울), 1989년 《89통일염원미술전》(그림마당 민, 서울), 1991년 《한국의 여성미술: 그 변속의 양상전》(한원갤러리, 서울), 1992년 《이동미술관: 우리들의 만남》(그림마당 민, 서울, 현대자동차 사업장, 울산 등 순회), 1993년 《코리아 통일미술전 コリア統一美術展》(도쿄 센트럴미술관, 오사카 현대미술센터, 일본), 1994년 《민중미술 15년: 1980-1994》(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97년 《97광주통일미술제》(국립5·18민주묘지, 광주), 1999년 제1회 《99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예술의전당, 서울),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광주비엔날레전시관, 광주), 2008년 《언니가 돌아왔다》(경기도미술관, 안산), 2019년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등 12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3년 예술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1997년부터 경기도 양평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