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품과 미술연구 / SeMA 소장품
파출소에서 일어난 강간, 1989, 김인순
  • 제작연도 1989
  • 재료/기법 캔버스에 유채
  • 작품규격 130×167.5cm
  • 액자규격 147.5×185cm
  • 관리번호 2000-0131
  • 전시상태 비전시
작품설명
김인순은 여성미술을 개척하고 사회 변화를 지향하는 행동주의 미술의 초석을 다진 작가다. 1970년대 말에 대두된 실천문학과 리얼리즘 미학에 영향받아 ‘인간 삶의 해방’을 위한 예술관을 정립해가던 김인순은 1986년 제2회 시월모임 전시 《반에서 하나로》(그림마당 민, 서울)에서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현실을 조명한 작품으로 주목받는다. 이 전시에서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선보였으나, 기층 여성의 힘겨운 현실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인식한다. 이후 여성이 실제 삶 속에서 겪는 현실을 그려가자는 데 뜻을 같이한 동료 여성작가들과 1986년 12월 민족미술협의회 내에 여성미술분과(1988년 여성미술연구회로 개칭)를 결성한다. 여성미술분과는 1987년 9월에 발족한 전국 21개 여성단체 연합조직인 ‘한국여성단체연합’에 단체 회원으로 가입해, 여성학자 및 여성문화운동가들과 협력하면서 여성이 마주한 사회 현실을 탐구하는 다양한 강연과 정기 토론회를 가졌다. 이를 바탕으로 ‘여성과 노동’ ‘여성과 성’ ‘여성과 역사’ 등 다양한 여성주의적 쟁점을 개발하고 사회적, 계급적 타자로서 여성의 다양한 삶을 그려냈다. 이들은 1987년부터 특정 주제로 《여성과 현실》(1987-1994) 연례전을 개최해 예술 활동 발표의 장으로 삼고 사회적 공론화를 꾀했다.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 공권력의 성폭력과 성 상품화 및 성 착취 등과 관련된 여성 인권 논의를 깊이 있게 전개해 나갔다. 이런 주제의 배경에는 1980년대 후반 고흥경찰관 성폭력사건과 부천경찰서 성폭력사건 등 공권력에 의한 성범죄사건이 연이어 밝혀짐에 따라,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를 가시화해온 여성단체의 움직임이 있다. 여성단체와의 교류를 통해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했던 김인순은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함께 분노했고, 피해자 입장에 동조해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는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사회적 공론화에 힘을 보탰다.
 
<파출소에서 일어난 강간>(1989)은 1988년 12월 5일 대구시 북구 대현1동 파출소에서 경찰관 2명이 귀가 중인 여성 강정순을 성폭행했던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이 사건은 실제로 김인순이 여성운동가로 변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푸른색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찬 채 눈물 흘리는 피해자 모습을 중심으로 사건 관련 장면들을 화면에 밀도 있게 배치하여 내러티브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피해자 오른쪽에는 성폭력 장면이, 그 위로는 경찰과 결탁해 범죄 사실을 은폐하려던 검사와 판사, 피해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이들의 비열한 모습은 성폭력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와 전남편으로부터 무고죄 및 간통죄로 고소당해 구속된 현실을 반영하며, ‘정의사회’ ‘친절’ ‘봉사’ 등 공권력이 수행해야 할 윤리를 보여주는 문구와 대조된다. 화면 오른쪽에는 가해집단이, 왼쪽에는 피해자를 도왔던 조력자들 모습이 보인다. 경찰 측이 제시한 증거를 반박하기 위해 200페이지의 방대한 변론요지서를 써낸 변호인은 가해집단을 가리키며 피해자를 대변해 법정 투쟁을 하고 있다. 그 옆에는 피해자 권리 회복을 도운 여성단체 회원들이 화면 오른쪽을 가득 채운다. 여성들이 든 팻말에 적힌 ‘대구여성회’는 사건 관련 인물들의 증언을 직접 모아 녹취록 수십 개를 제출하는 등 헌신적으로 협력했으며, ‘한국여성단체연합’은 탄원서 제출과 가두시위, 공판 방청 등 여러 방면으로 지원했다. 김인순은 사건을 둘러싼 인물과 정황을 상세하게 파악하기 위해 피해자와 주변인을 직접 인터뷰했다. 이를 바탕으로 화면에 사건 발발과 재판 과정, 여성운동가들의 연대 등을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하여, 반복되는 성폭행사건을 예술을 통해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자 했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로서 겪었던 수치심과 심리적 압박감을 딛고 공권력에 의한 비민주적인 성폭력의 해결 주체로 선 강정순의 용기를 지지하며 힘을 보탰다. 이 작품은 1989년 제3회 《여성과 현실-민족의 젖줄을 거머쥐고 이 땅을 지키는 여성이여!》(그림마당 민, 서울)에 출품되었으며, 이후 여성단체 및 전국 대학으로 순회전시했다.

김인순은 1941년 서울에서 출생해 1962년 이화여자대학교 생활미술과를 졸업했다. 1982년 작업을 재개해 1984년 첫 개인전을 열며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1985년 시월모임을 결성했다. 이후 여성미술연구회 대표, 그림패 둥지 대표, 노동미술위원회 위원장,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민족미술인협회 공동회장을 역임하면서 민중미술 계열의 미술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문화위원,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이사, 여성문화예술기획 이사를 역임하며 여성단체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84년 첫 개인전 《김인순전》(관훈미술관, 서울)을 시작으로 1995년 《여성·인간·예술정신》(복합문화공간 21세기, 서울), 2005년 《느린 걸음으로》(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17년 《김인순 초대전》(지앤갤러리, 울산) 등 7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1986년 《40대 22인전》(그림마당 민, 서울), 제2회 시월모임 《반에서 하나로》(그림마당 민, 서울), 1987-1994년 《여성과 현실》 연례전(그림마당 민, 서울), 1989년 《89통일염원미술전》(그림마당 민, 서울), 1991년 《한국의 여성미술: 그 변속의 양상전》(한원갤러리, 서울), 1992년 《이동미술관: 우리들의 만남》(그림마당 민, 서울, 현대자동차 사업장, 울산 등 순회), 1993년 《코리아 통일미술전 コリア統一美術展》(도쿄 센트럴미술관, 오사카 현대미술센터, 일본), 1994년 《민중미술 15년: 1980-1994》(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97년 《97광주통일미술제》(국립5·18민주묘지, 광주), 1999년 제1회 《99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예술의전당, 서울),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광주비엔날레전시관, 광주), 2008년 《언니가 돌아왔다》(경기도미술관, 안산), 2019년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등 12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3년 예술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1997년부터 경기도 양평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