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관내
2013.04.10~2013.04.21
무료
복합매체
난지입주작가
김병관, 서동욱, 차미혜, 최효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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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초대 : 빈 몸에 고이는, 깊은 곳으로 흐르는, 아득한 곳에 이르는 우리는 하나의 기호이네, 의미도 없는, 그 시간은 길다... 진리는 스치기 위해서 오는 것(횔덜린-기억의 여신Mnemosyne 중에서) 알레테이아, 사물의 비밀과 고요의 사건을 바라보다 ● 물방울의 고요한 낙하, 빛의 은밀한 걸음걸이, 바람과 조우하는 풀잎의 흔들림, 폐허 혹은 공허 속에 놓인 당신의, 누군가의 혹은 사물의 빈 몸... 이렇듯 작고 고요한 일상, 그것이 주는 환영에 홀린 적이 있는가. 그러한 작은 것들의 머뭇거림은 때때로 우리의 바쁜 걸음을 늦추고 무딘 눈을 자극한다. 사물이 지닌 고요의 움직임, 시간이 겹을 씌우는 풍요로운 권태는 소외된 몸과 잊혀진 감각들을 위한 부드러운 소환장은 아닐까. 그 홀림의 순간 대상과 당신 사이에 하나의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고 아직 사유되지 않았던 최초의 기억들이 베일을 벗고 찾아온다. 그리스 신화에서 거인족(Titans)의 하나로 기억의 추상적 개념을 의인화한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귀환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므네모시네(Mnemosyne)의 물은 망각의 강인 레테(lethe)의 물과는 반대로 가리워진 모든 것을 상기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이데거(M. Heidegger)의 표현대로 고대 그리스어로 진리를 뜻하는 알레테이아(Aletheia)는 망각된 것을 소환하는 이른바 비-은폐(A-letheia)를 뜻하는 것이 아니던가. 여기에서 기억은 살아온 시간에 대한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아직 만나지 못한 시공에 대한 사유의 집중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아울러 하늘과 땅, 신적인 것과 사라질 것들이 사방세계(four Fold)에서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것을 거울-놀이(spigel-spiel)로 명명했는데, 이 역시 망각된 존재성을 회복하게 하는 바라봄, 마주봄을 뜻한다. 이런 놀이 속에서 촉발되는 것은 존재의 언어와 그것에 순수한 답을 하는 시적 언어의 향연이며 존재는 은폐된 세계들이 베일을 벗는 순간과 조우한다.
기억의 여신은 잘 알려진대로 영감을 주는 아홉 뮤즈들의 어머니이니 예술가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역시 기억의 후예, 뮤즈들의 작은 아이들인 것일까. 이쯤에서 장-뤽 낭시(J-L. Nancy)가 그의 책 『뮤즈들 : Les Muses』에서 밝힌 아득하고도 황홀한 선언을 떠올려 볼만하다. 그는 예술을 하나의 흔적, 자취(vestige)라고 말하며 그것은 "보여지는 것들의 증식만 있는, 어떤 것에로도 환원되지 않는 가시적인 것, 감성적인 것의 다양한 섬광만이 있는(···)어쩔 수 없는 모호성의 것(···)"이며 그것은 결국 "무한한 유한"이기도 하다. 모든 예술이 분명 기억의 축적을 열어 보여주는 흔적학(ichnology)의 예시일 수 있다면 그것은 므네모시네의 선물임이 분명해 보인다.
빈 달팽이의 집, 므네모시네들의 아이들을 만나다 ● 므네모시네를 자주 떠올린 것은 어쩌면 이곳에 들어 온 지난 늦가을부터였을 것이다. 그 옛날 이 나라의 대도시에서 버려진 모든 것들을 묵묵히 받아내던 보잘 것 없는 외딴 섬, 그 곳의 이름이 하필이면 난(蘭), 지(芝), 그 향기로운 식물을 지칭하는 것이라니! 세월이 흘러 그 폐허는 아늑한 삶터와 산뜻한 일터와 실제로 향기로운 식물이 자라는 쉼터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한켠에 예술가를 위한 꿈터가 생겼고 과거 오염물들이 흘러 들어와 정화되기를 기다렸던 원형의 침전조들은 두 개의 전시실로 재생되었다. 허물지 않고 그대로 ''''''''켜''''''''와 ''''''''결''''''''을 간직한 채 기억을 반추하게 하는 이 공간은 어쩌면 예술가에게는 ''''''''어머니들''''''''과의 재회를 꿈꾸는 막연한 대기소이자 승강장인지도 모른다.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채 곤히 동면을 취하던 난지의 동그란 전시실은 소박해서 아름다웠고 어느 날은 제 집을 두고 홀연히 사라진 달팽이의 빈집처럼 깊고 고요한 나선형의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빈 달팽이의 집, 그것은 언제든 그녀의 아이들이 찾아와 그 안에 스민 시간의 흔적들을 저마다의 회상으로 두드려주기를 바라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밀실과 미로는 아닐까. 이런 생각에 깊이 잠기다 눈들이 나른한 봄빛에 녹아내리기 시작할 즈음, 홀연히 벗들을 만났고 그들이 만든 이미지를 일별(一瞥)하는 매혹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빈 달팽이집을 두드리며 서로를 초대하기로 했으며 각자 기억의 여신이 머무는 사적 공간을 만들 생각에 들떠 있었다.
친구들은 다정하고 섬세했으며 문득 보이는 재치 속에 고요를 이유 없이(이유 있게) 사랑하는 듯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김병관의 환영적 이미지와 강박에 매료되고 끝내 다다를 수 없는 주이상스(Jouissance)의 감옥에서 치명적인 중독을 같이 느꼈을까. 가끔은 서동욱의 이미지가 지닌 서늘한 관능과 모호한 침묵에 가볍게 떨면서 알 수 없는 그것들의 시원을 매만지는 기쁨이 있었다. 비워진 자리에서 사물에 스민 고요의 사건을 포착한 차미혜의 깊고 아련한 시선에 다친 새처럼 여러 날 깃들어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필자 역시 빗장을 풀어내린 텅 빈 시공간의 틈새에서 기억을 찾아가는 몸들의 유희를 상상해보곤 했다.
가끔은 작품을 보면서 각자 홀로 있는 시간, 작가들의 외로운 침잠기를 가늠해 보기도 하였다. 외눈박이 친구(카메라)와 벗하며 나비의 날개짓이나 바람의 말들을 바라보던 길고 막연한 기다림, 예민한 촉수처럼 수많은 붓질들 속에 접어둔 겹겹의 떨림과 시간의 주름들, 혹은 전자신호만이 존재하는 디지털 공간에서 닿을 수 없는 실재를 만들며 생경한 공허 속을 배회했을 그들의 깃털같이 많은 날들을 짐작해 본다. 열지도 닫지도 않은 각자의 ''''''''기다림'''''''' 속에서 일상의 언어는 언저리를 배회하고 의미망을 스르르 빠져나갔을까. 그들은, 아니 우리는 그 사이에 깊은 숨을 쉬며 문득 가시적인 것 너머에 한없이 차이를 만드는 비-은폐(A-letheia)의 순간을 얼핏 만났을지도 모른다. ● 이제 달팽이의 빈집들을 채우고 므네모시네의 밀실과 미로에서 낯선 벗들을 초대하게 되었다. 각자의 작품들이 머리를 맞대면서 필자의 소박한 아이디어로 에릭 사티(E. Satie)의 비밀스러운 피아노곡이 설치미술로 만들어졌다. 이것이 동료들과 함께하는 공동의 퍼포먼스로 나오게 된 것도 언젠가는 추억할만한 일이 될 것이다. 글머리에 올린 횔덜린의 시처럼 "의미도 없는 하나의 기호"인 ''''''''기억''''''''은 결국 진리를 보게 될 섬광 같은 순간을 위해 긴 시간을 들여 줄 당신을 기다린다. ''''''''그녀''''''''의 초대에 응할 것인가. 텅 빈 공간 속의 겹겹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가벼운 홀림, 고요한 떨림, 그윽한 울림. 그러다 빈 몸에 고이는, 깊은 곳으로 흐르는, 아득한 곳에 이르는. ■ 최효민
부대행사
개막행사 2013. 4. 10(수) 오후5시 / 작가와의대화 4. 20(토) 오후3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미술가들을 위한 레지던시 지원 공간입니다. 난지한강공원, 노을공원, 하늘공원 사이에 있는 침출수 처리장을 개조하였으며, 서울 중심에 위치해 접근성이 뛰어납니다. 25개의 작업실, 연구실, 원형 전시실과 야외 작업장에서는 국내외의 역량 있는 작가와 연구자를 양성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상시 운영합니다. (전경사진: ⓒ Kim YongKwan)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변화하는 시각예술 환경에서 창·제작 공간으로서 협업과 과정 중심의 프로그램을 통해 경쟁력 있는 작가 및 연구자를 육성하고자 입주를 지원합니다. 또한, 입주 작가와 기획자를 대상으로 협약을 통해 해외 기관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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