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관내
2012.05.11~2012.05.18
무료
난지입주작가
발두어 부르비츠(Baldure Burwitz), 바스켄 말디키안(Vasken Mardik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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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전시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국제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현재 입주해 있는 국외단기입주작가의 전시입니다. 현재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2개의 스튜디오를 국외작가들을 위해 운영하고 있으며 매해 입주신청과 심사를 거쳐 입주작가를 선발합니다. 입주기간이 끝나는 시기에 입주기간 중의 성과를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성과보고전을 개최하며 이번 전시는 현재 입주중인 발두어 부르비츠(Baldure Burwitz)의 전과 바스켄 말디키안(Vasken Mardikian)의 전입니다.
발두어부르비츠
철학자 퍼스(C. S. Pierce)가 의미 깊은 이야기를 남겼다. “나는 진정한 켄터키의 사나이로서 위스키에 대한 미적 판단에 대해 골몰하곤 했다. 정말이지 어떤 위스키는 다른 위스키보다 더 훌륭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위스키는 모두 미적으로 좋다는 것이다.” 정말 위스키의 맛은 그 어떤 것이라도 모두 좋다. 그러나 위스키의 맛보다는 위스키가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지 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가령, 내면적 기분의 돋움, 그 상승의 기류가 선사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감의 형성, 이런 것들이 위스키에 대한 더욱 성숙한 질문일 것이다.
발두어 부르비츠의 사고 역시 퍼스와 비슷한 면이 있다. 작가는 예술작품은 미적으로 다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미적으로 훌륭한 것은 세상에 너무 많다. 아기의 눈빛이나 자동차의 곡선, 자연의 모든 요소들은 경탄의 대상이며, 예술작품은 이들에 비한다면 오히려 초라하기 그지없는 볼품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묻고자 하는 것은 미적 기능 외에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역할에 관한 것이다. 예술은 작품이라는 외부적인 형식과 작가라는 내부적인 제스처가 착종(錯綜)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게 하려는 끊임없는 요청이다. 세계는 바꾸려고 한다고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바뀌는 것이 더욱 긴박한 문제이다. 예술은 메타노이아(metanoia), 즉 개심(改心)의 촉매제인 사실에서만 일말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의 시각과 마음을 바꾸지 못할 때 아름다운 형식이라는 이름의 예술은 존재의 장식에 불과하다.
발두어 작가는 그의 이러한 믿음을 관철시키기 위해 십 수 년간 마음 고생도 많이 했고 사건도 많이 일으켰다. 일례로 작가는 예술적 공간을 만들고 사람들을 초대한 다음 그 공간의 출입구를 폐쇄한 후 공간의 사방을 불도저로 압축한 일이 있다. 문을 개방한 후 작가는 앞니를 잃었다고 한다. 작가의 수업시간에 실기실로 학생들을 모은 후 문을 폐쇄한 연후에 수 만 마리의 파리떼를 풀어놓았다. 그 후 작가는 교수직을 잃었다고 한다. 그는 때때로 건물을 중장비로 손상시키면서 문명의 짐스러운 무거움을 벗어 던지려고 한다. 어떨 때는 움직이는 로봇 치킨을 만들어 사람들을 희화시키기도 한다. 여하튼 작가는 저 유명한 미국의 정치학자 찰스 메리엄(Charles E. Merliam)이 말한 두 가지 상징조작, 미란다와 크레덴다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미란다(miranda)는 무언가 ‘동일시 현상’이다. 정서적인 면에 호소하여 사회를 장악하는 방법이다. 한국민의 애국가, 미국인에 대해서 독립기념일, 독일 국민에 있어서 독일의 위대한 작가 괴테가 그것이다. 크레덴다(credenda)는 ‘신조’라는 뜻이다. 합리적이고 타당하다는 점을 내세워 사람들의 이성을 움직이는 기호를 ‘합리화의 상징’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이지적인 면에 호소하는 상징이다. 헌법, 이데올로기, 정치학, 미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작가는 이러한 상징조작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매우 특별한 존재들이 예술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상징조작으로부터 벗어나면 삶이 도대체 어떻게 변하는 것인가? 주체적 홀로서기가 가능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이다. 외로운 존재다. 작가에 의하면 자기를 바꾸는 것은 스스로의 깨우침뿐이며 작가는 이 깨우침을 도와줘야만 한다는 것이다.
발두어 작가의 첫 번째 한국 전시의 테마는 ‘What a mess’이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라는 뜻이다. 작가가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받은 인상이 그렇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부정적인 수식어만은 아닐 것이다. ‘mess’라는 표현은 코스모스의 세계가 아니라 카오스의 세계다. 코스모스란 이성의 준칙에 길들여진 세계다. 로고스가 활약하며 예측가능성의 안정된 세계다. 개화된 밝음의 문명이다. 반면 카오스는 이성과 대비되는 어두움의 혼돈이다. 작가는 아시아에 대해서 코스모스보다는 카오스의 어둠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그는 어둠 속에서 가능성을 바라본다. 안정된 이성중심주의의 서구문명은 도구적 합리주의이며, 이는 결국 제국주의의 상징조작과 에콜로지의 파괴만을 남겼다. 그리고 작가는 새로운 제3의 패러다임의 창신(創新)을 안정된 서구의 안주하는 사고로부터는 찾을 수 없다고 진단한다. 오히려 아직 성장 중이고 안정화되지 않은, 나타(懶惰)를 모르는 미성숙에서 그 가능성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과 중국 등 사회전반의 미성숙에서 큰 가능성을 발견하는 한편 한국이나 중국의 현대미술의 미성숙에 있어서는 고칠 것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핀’에 대한 추억이 있다. 그 중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가 담벼락에 페인트칠하는 과정이다. 너무나 큰 담벼락을 하룻날에 끝내기란 불가능하다. 때마침 친구들이 집 근처를 지나간다. 친구들이 뭐하냐고 물어오길래, 허클베리핀은 페인트칠을 하고 있고 아주 재미있다고 말한다. 친구들은 그것이 뭐가 재미있겠냐고 생각하지만 콧노래 흥얼거리는 허클베리핀의 붓질에 조금씩 감화되고 모두 신나게 도와 한나절에 페인트칠을 끝내버린다는 이야기다.
위의 이야기는 바로 메타노이아의 상징적 장면이다. 그런데 작가는 한국의 미술가들이 특정 그림의 스타일을 개발하고 브랜드화(branding)해가는 노고의 과정에서 산업화되어 가는 전지구촌의 치열함과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그 치열함의 목표는 레드핫칠리페퍼스 밴드의 노래 ‘캘리포니케이션(Californication)’이 웅변해주고 있다. 모든 국가가 캘리포니아의 문명화를 목표로 치열하게 뛰어갈 때 그 결과는 에콜로지의 붕괴, 즉 자멸뿐이듯이, 아시아의 미술문화도 허클베리핀처럼 메타노이아를 거치자는 제스처를 제안한다. 작품의 특정 스타일의 브랜드 라벨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치열한 경쟁은 곧 엘리트층의 수장고를 채워주는 물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작가는 디즈니랜드의 이미지를 한국의 유명 작가들(10명)에게 나누어주고 그 위에 작가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한국의 유명 작가들은 기꺼이 이에 동참한다. 허클베리핀의 품앗이가 현실화된 순간이다. 새로운 창신(創新)의 계기를 보여준 셈이다. 또 한가지, 작가는 경주놀이용 카트(cart) 두 대를 전시장에 설치한다. 한국의 작가들에게 이 카트에 태워서 경주를 진행시킨다. 그것이 바로 카(K-ART), 즉 한국미술이라는 것이다. 바닥에 남은 스퀴드 마크의 어지러움을 우리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작가는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복합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복합성은 상징조작 중 크레덴다에 해당한다. 바로 현무 미사일이다. 작가는 현무 미사일을 옥외광고용 발룬으로 만든다. 이 발룬을 리어카에 설치한다. 발사용 기반이 리어카가 되고 미사일은 광고용 풍선이라는 메타포는 우스꽝스럽다. 소위 ‘중국 위협론’이나 ‘악의 축’을 막는 예방의 힘은 군사확충이라는 그럴듯한 크레덴다의 기획은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의 안락의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그들의 논의에 얼씨구 맞장구를 쳐주는 동북아시아의 상징조작 계층에 대해서 작가의 생각은 남다르다. 그가 속해있는 사회는 분열과 통일이라는 경험 측면에서 우리의 그것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가장 낮은 계급과 가장 낮은 차원의 산업수단을 연상시키는 리어카 위에서 작은 미풍으로도 쉽게 흔들릴, 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우리는 어떻게 깨달아야 하겠는가?
이렇듯 발두어 부르비츠는 굉장히 총명하고 예민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미덕만을 예찬하고 싶지 않다. 부족한 면에 대해서도 지적해주고 싶다. 나는 언제나 발두어라는 사람에게 지속성이 있었으면 한다. 굉장히 총명한 작가들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하늘이 준 재능에 비해서 현실의 열정과 작업과 생활을 지속하지 못해서 불운했던 경우를 자주 목격하곤 한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너무 민감해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발두어가 기왕 아시아 땅에 왔으니 ‘중용(中庸, The Doctrine of the Mean)’에 등장하는 아시아의 경구를 하나 말해주고 싶다. “중용이란 참으로 지극하구나! 그러나 그 중용의 덕을 지속시키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구나!”
바스켄말디키안
회화의 세계에는 ‘구상(Figure)’과 ‘추상(Abstract)’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인식의 관점에서 보면, 구상은 재현에 가깝고, 추상은 개념에 가깝다. 재현은 인식의 중요한 요체가 되고, 이를 갖고서 개념이 창조된다. 따라서 개념은 명료하고 재현은 이전 단계로서 그보다 명료하지 못하다. 이로 인해 재현은 더욱 명확해지기를 원하며, 항상 개념을 향해 움직인다. 데카르트가 색을 부정하고 동판화만을 인정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색을 통한 이미지는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명료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명암조차 선으로 표현하는 동판화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는 개념을 창조하는 철학의 입장에서 회화를 바라봤으며, 그림은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여겼다. 회화는 개념의 명증을 위한 목적을 가졌고, 그때까지 이러한 생각이 보편적이었다.
철학의 근대와 달리 회화에 있어서 근대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근대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자기규정’에 있다. 다시 말해, 나를 규정하는 근거를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다. 회화가 근대를 맞이했다는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야 개념의 신하에서 해방되었다는 말과 같다. 이로 인해 근대회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추상회화가 등장하게 된다. 개념의 수단인 재현을 거부하고 개념자체가 되겠다는 예술가의 의지가 발휘된 결과이다. 하지만 개념은 철학의 창조물이지 예술의 영역은 아니다. 따라서 창조되는 순간, 개념에 포섭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여전히 개념을 흠모한 재현의 의존적인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여전히 인식의 관점에서 회화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회화를 ‘현재(現在)’라는 관점에서 보면, 개념의 이전인 재현은 개념보다 실제에 가깝게 된다. 사실이라고 달리 말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재현은 ‘재(再)’에 이미 ‘복사’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여전히 인식론적인 입장에서만 해석된다. 따라서 회화의 고유한 자기규정을 위해서는 ‘재’를 빼고, ‘현(現)’만을 담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 즉 ‘있음’이란 항상 어제와 하제사이에서 유동적으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현재는 감각되는 중의 사실을 담을 때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산되는 이미지는 인식론적 측면에서는 혼미할 수 있으나,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고유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현대의 회화는 이러한 접근을 기반으로 근대 추상회화의 자가당착적 모순을 극복하고 자기회복을 향한 의지에 힘입어 탄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바스켄의 전은 현대회화의 특징을 잘 담고 있다. 그가 현재하는 회화를 구사하기 위해 사용한 전략은 간단하다. 회화에 드러나는 물질 자체에 구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질자체를 구상화(figuration)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현대회화가 취한 중요한 태도를 따라 이젤을 떠났다. 그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의 건물 벽면을 소재로 한 벽연작을 보자. 화면의 형상은 이성으로 구분 지을 명확한 윤곽이 없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추상화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벽면 자체를 표현한 것으로 본다면 구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일종의 트릭을 좀 더 견고히 하기 위해 벽면을 직접적인 방식인 탁본(frottage)으로 떠내면서 디지털 프린트처럼 보이게 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을 처음 직면하게 되면 디지털 프린트한 추상화로 보게 되지만, 물질적인 접근이 이루어지면서 손으로 그려진 구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전의 착오를 거짓이라고 할 것인가, 구상화라고 인식하게 된 이후 이전의 착오가 사라지는가이다. 바스켄의 관심은 여기에 있다. 착오와 실재, 추상과 구상, 회화와 사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그에게 그 지점은 ‘in between’즉 ‘사이’에 있다. 이것이 그가 이번 전시의 제목을 이라고 정한 이유이다. 이제 그 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바스켄은 사이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위장’을 사용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드러남을 은폐에 연관 지어 기술하였듯, 그는 매체의 어떤 ‘드러남’을 위장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의 화면은 은폐막과 같은 분위기로 가득 차 있고 막을 통해 기어이 해골이 드러난다. 그는 앞에 나열한 이질적인 두 양상의 구체적인 형상으로서 의식적으로 해골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고전에서 주로 등장하는 소재로서 죽음을 상징하거나, 삶의 덧없음을 의미하지만, 그는 여기에 삶과 이어져있는 존재라는 다른 하나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서 해골의 이미지를 요청한 것이다. 이는 일종의 ‘영원회귀(Eternal Circle)’라는 니체적 동양사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의도적 요청일 수 있겠으나 그의 화면에 들어온 이상 그렇지 않게 변환된다. 형상의 나타남과 흐트러짐이 반복된다. 그의 해골은 살아있다. 따라서 살아있는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그의 사이에서는 죽음은 가상이 아니고 거짓은 더더욱 아니다. 해골은 그가 마련한 죽음과 삶의 틈에서 담배를 물고, 약간의 미소를 띤 채 드러남과 숨겨짐을 옮겨 다니며 유희를 즐긴다. 마치 버려진 땅과 생명의 동산을 넘나드는 원혼들의 산책처럼 말이다. 우리는 현대회화의 표면위에서 노니는 해골의 유희를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삶과 죽음의 순환적 연관성을 고민하게 된다.
부대행사
개막식 2012.5.11(금) 오후5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미술가들을 위한 레지던시 지원 공간입니다. 난지한강공원, 노을공원, 하늘공원 사이에 있는 침출수 처리장을 개조하였으며, 서울 중심에 위치해 접근성이 뛰어납니다. 25개의 작업실, 연구실, 원형 전시실과 야외 작업장에서는 국내외의 역량 있는 작가와 연구자를 양성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상시 운영합니다. (전경사진: ⓒ Kim YongKwan)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변화하는 시각예술 환경에서 창·제작 공간으로서 협업과 과정 중심의 프로그램을 통해 경쟁력 있는 작가 및 연구자를 육성하고자 입주를 지원합니다. 또한, 입주 작가와 기획자를 대상으로 협약을 통해 해외 기관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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