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
박수지
서울을 기반으로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전시기획사 에이전시 뤄뤼(AGENCY RARY)를 운한다. 학부는 경제학을, 석사는 미학을 전공했다. 부산의 독립문화공간 아지트 큐레이터를 시작으로, 미술문화비평지 『비아트』편집팀장, 《제주비엔날레 2017》큐레토리얼팀, 통의동보안여관 큐레이터로 일했다. 《줌 백 카메라》(2019), 《어리석다 할 것인가 사내답다 할 것인가》(2018), 《김정헌×주재환 : 유쾌한 뭉툭》(2018), 《민중미술 2015 : 우정의 외면》(2015) 등을 기획했다. 현대미술의 정치적, 미학적 알레고리로서 우정, 사랑, 종교의 실천력에 관심이 많으며 이에 대한 전시와 비평을 연계시키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참여작가]
김희욱
김희욱은 삶의 여러 가지 경험에서 포착한 요소들을 이용하여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그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작거나 잊혀진 사건들을 재조명한다. 김희욱이 집중해온 소재들은 감정, 미신, 상실 등 소위 말해 이제는 ‘비과학적이고 효과적이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생각과 감정들이다. 김희욱은 사건들을 포착하기보단 수집하고 그것들의 표면에 부유하는 이미지와 의미들을 재조합하여 설치 혹은 상으로 보여준다.
임영주
임영주는 상, 회화, 책 등의 방식으로 미신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언어, 미디어, 과학현실의 여러 징후들과 연결시킨다. 《물뼈와 미끈액》(두산갤러리, 2018),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산수문화, 2017),《돌과 요정》(더 북 소사이어티, 2016), 《오늘은편서풍이불고개이겠다》(스페이스 오뉴월, 2016)등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비록 떨어져 있어도》(2018 부산비엔날레, 2018), 《날씨의 맛》(남서울시립미술관, 2018), 《추상》(합정지구, 2017), 《2017 두산아트랩》(두산갤러리, 2017), 《착화점》(인사미술공간, 2017), 《do it 2017, Seoul》(일민미술관, 2017)등의 전시에 참여하다.
차지량
차지량은 미디어를 활용한 참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시스템과 개인에 초점을 맞춘 주제별 현장을 개설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Midnight Parade〉(2010), 〈일시적 기업〉(2011), 〈New Home〉(2012), 〈한국 난민〉(2014) 시리즈, 〈BGM〉(2018), 〈Gm: Gn〉(2019)을 전시와 다원예술, 상 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발표했다.
chajiryang.wixsite.com/home
홍진훤
홍진훤 인간이 의도치 않게 만들어버린 빗나간 풍경들을 응시하고 카메라로 수집하는 일을 주로 한다. 《임시 풍경》(2013), 《붉은, 초록》(2014), 《마지막 밤(들)》(2015), 《쓰기금지모드》(2016), 《랜덤 포레스트》(2018)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여러 단체전에 참여했다. ‘지금여기’, ‘docs’ 등의 공간을 동료들과 함께 운하며 이런저런 전시와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기획 했다. 때로는 프로그래밍을 하며 플랫폼을 개발하고 가끔은 글을 쓰고 또 가끔은 요리를 한다.
jinhwon.com
줌 백 카메라
SeMA 벙커
2019.9.6. - 2019.9.25
박수지
독립 큐레이터 · AGENCY RARY
당신은 믿기도 전에 믿고 있다. 왜냐하면 익숙함이야말로 나의 신앙이며 유행이야말로 나의 기준이고 예속이야말로 나의 지침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부도덕하고 의심은 사치스러우며 반성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속도의 빠르기에 비례해 시간은 사라진다. 최대한 시간을 없애버리기 위해 당신은 제시된 속도보다 늘 더 빠르게 모든 것을 스쳐 간다. 시간이 모든 것을 괴롭게 만들기 때문에 이를 가장 빠르게 통과할 방법은 시간 안에 있는 나를 지워버리는 일이다.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 이 방법이 가장 쉽다. 그래도 더 빨리 이 상태에 도달하고 싶은 이들은 믿음의 촉매를 들이킨다. 초점 없이 모든 것을 보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이들의 안구는 불안정하게 움직인다. 촉매가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약효가 심화될수록 내용은 소멸한다. 모순적이게도 내용이 소멸할수록 진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진정성에 대한 요구, 정확히 거기까지가 믿음의 촉매가 약속한 세계의 끝이다. 어쨌든 요구는 기각된다. 애초에 기각을 전제로 발생한 요구이기 때문에 진실에 대해서라면 사실상 아무런 의지가 없다고 봐야 한다. 어떤 간증들, 욕망의 표면을 건드리는 이 간증에 의탁하는 믿음은 또 다른 누군가를 언제든 합류시킬 준비가 되어있다. 구루는 더 이상 이름을 가진 하나의 인간이 아니다.
포스트-코기토 시대에 ‘의심하는 나’는 사라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라진다. 사람들이 거리에 모이고, 함께 외치고, 서로를 향해 더 강렬한 공감을 선사하고, 비통함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칭찬 받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사라진다. 어쩌면 그때 더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이제 모두 서로가 되었다. 중립은 ‘준비된 순응, 정치적인 중립성, 회색지대로의 전락, 기존 조건에 잘 순치된 무관심’ 을 의미하지 않는다. (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시그워스 편저, 『정동이론』, 최성희·김지영·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의심하는 나’는 몸을 가졌기 때문에 감각하고 정동된다. 그런 ‘나’가 사라졌다면 이것은 무감한 상태, 무관심에 안착한 상태, 즉 죽음의 상태와 동일하다. ‘무엇’ 에 동요되는지보다 ‘어떻게’ 동요되는지가 중요하다. 동요된 상태는 불가해한 이분법과 만연한 모순을 피해 끊임없이 탈주하고 변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어쩌면 확답 없는 낙관만이 정동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약속이다. 그러나 낙관이 가능해지는 일은 대단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거름망 없는 눈과 귀가 될 수 있는 입과 코가 될 수 있는 손이 필요하다. 즉, 지극히 개인적인 몸이 필요하다. 그러나 바로 이 초개인적인 정동과 정념의 바탕이야말로 실제를 버티게 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회의 문화 감수성이 전환기를 맞이한 이후에는 어김없이 구루의 등장이 함께했다. 동서양을 막론한 일련의 구루들은 그 사회가 어떠한 가치관을 갖고있든 진리, 사랑, 평화 등 보다 근본적인 사고체계에 변화를 제시해왔다. 구루가 제시하는 공동체와 그 공동체가 형성되고 작동되는 방식은 한 사회의 특정 시기의 욕망을 반영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사람들이 무엇에 움직이는지를 보여주기보다 어떻게 동요되는지,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구루와 함께 태동해 구루로 인해 무너지는 모더니티는 그 자체로 동시대 리얼리즘의 메타포가 된다. 이전에는 구루의 존재가 큰 스승으로 여겨질만한 한 명의 인간을 중심으로 이해되었다. 우리가 구루에 대해 불편해 하는 이유는 구루가 제시하는 시스템이 천편일률의 욕망 구조를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구루는 마치 빅브라더처럼 그 실체를 발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구루는 그 출처를 알 수 없이 자가 증식하고 있는 모양새를 갖고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자가증식 하는 구루는 개인이 중시되고 그 자유가 보장되는 것과 동시에 정치적 올바름과 트렌드라는 강력한 투명 장벽 안에서만 작동되기 때문에 철저한 타자 의존적 노출증으로 표출된다.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이 장래희망인 세대의 콘텐츠는 욕망구조를 다양화시키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듯 성찰 없는 세계를 겉잡을 수 없는 속도로 관통한다.
Z는 이따금 가만히 지켜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누군가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무언가가 어째서 이토록 허망한 폐허만을 남겼는지 늘 의아했다. Z의 카메라는 기록된 사건이 훑고 지나간 자리, 혹은 역사에 남을 사건 때문에 누군가가 밟아보지 못한 장소, 아무런 사건도 없이 괴이하게 존재하는 비상식적 영역을 경유해왔다. Z의 카메라가 지켜보는 시간이 쌓여감에 따라 Z에게 보이기 위해 안달 나 있는 것들에 대한 의구심도 커졌다. 보는 시점, 거리, 시간, 대상 그 모두를 먼저 제시함으로써 교묘히 차단하는 기술에 익숙해지는 일은 쉬워보였다. 그만큼 더 확실해지는 것도 있었다. “실시간으로 목격한 사건에 대해서는 결코 타자가 될 수 없다.” 분명 이 ‘실시간으로 보기’는 보는 사람을 목격자를 넘어선 가담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목격자이자 가담자가 되었다고 해서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것도, 더 우위를 차지하는 자리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Z는 바다가 가까운 도시의 한 호텔에서 무심히 TV의 채널을 넘겨보고 있었다. 그중 한 채널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하루 종일 광장을 찍고 있는 CCTV가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채널이었기 때문이다. 광장의 가로등에 앉아있는 비둘기 같은 시선일수도 있겠지만 광장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호텔 방 안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힘의 감각을 가져다주었다. “높이가 쟁취되면 권력이 쟁취되는가?” 지난날 고공에서 수 십일을 버티던 사람들의 현장에 있었던 일을 Z는 잊을 수 없다. 쟁취될 수 없는 권력을, 시선을 되찾기 위한 높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기분이 한없이 낮아졌다. 어쩌면 세계가 구동되는 알고리즘만큼 Z를 답답하게 하는 것도 없었다. 반대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 할 수 없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매일같이 방향을 잃을 때마다 확고하게 나를 비춰주는 스크린들이 있기 때문에 Z는 안심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이를테면 Z가 보고 싶어 하지 않더라도 ‘우울증을 극복하는 6가지’라는 식의 콘텐츠를 리포스트 하는 사람들 덕분에 Z의 타임라인은 종종 그런 헤드라인의 포스팅으로 가득 차 있기 일쑤였다. 근래에 발견한 유튜버도 Z의 타임라인에 등장한 리포스트 중 하나였다. ‘인생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세 가지 아이템’이라니. 벌써부터 악성 댓글들이 먼저 떠올랐지만 그래도 세 가지만 갖추면 된다고 하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유튜버는 꽤나 확신에 찬 어조였다. 마치 이 진정한 삶의 비밀을 나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이기적이라는 듯이, 모두에게 이 진리를 전도해 원죄를 사함 받고 싶기라도 하다는 듯이, 강력하고 분명한 말투로 그 세 가지를 반복해서 언급했다. Z가 다소간 초점을 잃고 지켜보던 유튜브 화면 옆에는 어느새 나무 패턴 벽지 광고가 떠 있었다. Z는 이내 화면을 꺼버렸다. 대신 검색창에 ‘달의 뒷면’, ‘NASA 라이브’ 같은 검색어를 입력했다. 지구는 고요해보였다. 실시간의 화면이었지만 대기에 덮힌 지구는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짐작 할 수 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눈을 깜박거릴 필요도, 애써 눈을 감을 필요도 없었다.
Z는 사실 이 순간을 제일 좋아했다. 아직 이 세계에서 컴퓨터 스크린 불빛에 얼굴을 밝히고 있는 자신이 지금의 세계에서 분리되어 다른 시간으로 이동할 때, 그 사이의 아주 짧고도 묘한 시간을 좋아했다. 이도저도 아닌 상태일 때만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떠나려는 자만이 모든 것을 보’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Z는 대상 없이 적요히 흐느꼈다. 불현듯 최근 Z의 우편함에 꽂히기 시작한 편지를 떠올렸다. 혼잣말에 가까운 부탁과 애정어린 말을 건네는 것으로 보아 편지의 수신인은 아무래도 편지의 발신인과 꽤나 긴밀한 사이임이 틀림 없었다. 연락이 닿지 않는 수신인을 향해 편지는 시도 때도 없이 날아왔다. Z가 머무는 도시는 낯모를 발신자에게 무심히 답장을 보낼 만큼 친근한 장소는 아니었다. Z는 그곳에서 혼자였다. 원래 혼자 있는 것을 꺼려하는 성질의 인간은 아니었지만 도시는 분명 혼자라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곳이었다. 어느 순간 Z의 정념 어딘가에 편지의 수신인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사실 거의 사로잡힌 수준에 가까웠다.
“나는 종종 편지를 쓴다 (보낸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종종 담겨 있는 것들을 꺼내고 싶어진다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종종 고여 있는 기분을 느낀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종종 눈을 감는다 (유서를 작성하지만, 죽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그곳에서 누군가는 멈추고, 누군가는 계속하고, 무언가를 얻거나, 전부를 잃는다. 그것조차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사람들은 종종 다른 곳을 기다린다.”
* ZOOM BACK CAMERA
이번 전시의 타이틀 ‘줌 백 카메라’는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1973년 작 〈홀리 마운틴 Holy Mountain〉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영화는 세계의 역사가 작동하는 방식, 그 안의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와 진리를 추구하는 척하는 양태, 인간의 욕망과 사회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결과적으로는 모두를 현실로 이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이름도 대사도 없는 수많은 군중은 늘 휩쓸리는 일에 저항하지 못하거나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예속시킨다. 자의 없는 동요, 혹은 자의로 착각된 동요를 통해 삶을 구축해온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연금술사이자 구루인 존재가 영화의 말미에 언급하는 ‘Zoom back camera!’는 프레임 안의 화각을 넓히며 뒤로 물러나는 행위를 뜻한다. 프레임은 구루와 추종자들을 지나 그들을 촬영하고 있던 카메라와 붐 마이크, 주변의 스텝들까지 비춘다. 이것은 단지 영화이며 현실을 보기를, 이것은 단지 전시이며 현실을 감각하기를 권유한다. 예측하지 못했던 상태를 마주하며 물음표를 생각하는 순간 지극히 개인적인 동요의 정서가 시작된다.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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