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학사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3차 휴학 중
개인전
2013 화려한 시대, 우리들의 페르소나, 갤러리 그림손, 서울
내재화된 폭력의 공간에 개입하는 예술의 역할
조 선 령 (독립 큐레이터, 미술이론)
강래오의 작품에 등장하는 방들은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개인의 방인 동시에 외적 폭력이 지배하는 고문실이나 취조실처럼 보인다. 차가운 사선 무늬가 들어간 바닥, 무표정한 사무가구처럼 보이는 철조 책상, 낮은 천정과 어두운 조명등은, 꽃무늬 벽지, 욕조, 소파 등 가정의 소품들이 주는 안락함을 침범한다. 인물들은 폭력과 억압의 희생자인 듯 보이는 동시에 묘하게 가해자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삼각형의 두건은 KKK단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눈구멍이 없다.이 점 때문에 마치 사형집행 직전에 희생자에게 뒤집어씌우는 두건처럼도 보인다.반가부좌를 틀고 욕조에 앉아 있는 인물은 명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고문실에 감금된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안과 밖의 구별을 붕괴시키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공간은 당구장이나 감옥, 실험실 등 특정한 목적이 있는 구체적인 장소를 연상시키지만 한편으로는 기묘하게 비일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공간은 자세히 보면 원근법에 맞지 않는 비뚤어지고 비합리적인 공간이다. 기묘한 낯설음과 친밀함의 이러한 교차는 작품의 색조와 재료에서도 비롯된다. 화면을 지배하는 특유의 가라앉은 청회색은 호분,흙, 분채 등 동양화나 자연적인 재료에서 온 것들이다. 부드럽고 빛나는 표면은 장면에 감도는 불길하고 폭력적인 분위기와 상충되는 듯하지만, 이러한 폭력성이 사적이고 안온한 공간을 침투해 들어간다는 느낌을 잘 표현한다.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색조와 반짝이는 표면, 그리고 꼼꼼히 묘사된 옷자락이나 인체 표현 등은 거리 두기의 냉담함과 근접 개입의 불편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사포로 문질러서 물감을 균열시키고 벗겨낸, 피부 표면의 처리나 꼼꼼한 드로잉에 의한 마무리는 인물이나 공간의 폭력성과 모순되는 듯하면서 그것과 역설적인 관계를 맺는다.
공간 여기저기에는 사물들이 흩어져 있다. 화분 속에서 솟아난 손들, 벽에 박혀 있는 나무들, 상자들, 바닥에 늘어져 있는 돼지나 개, 유모차를 타고 있는 팬더 같은 동물들. 이러한 사물과 동물들은 어떤 특정한 의미를 상징하는 기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무의미함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불길해 보인다. 내용이 비워지고 상호연관성을 상실한 이 사물들은 그 사물적인 특성만으로 존재한다. 하이에나, 토르소, 벌거벗은 인간들, 방독면, 부처상, 풍선 등이 가늠할 수 없는 공간들에 흩어져서 일종의 물화된 풍경을 이룬다.
작가가 묘사하는 공간이 취조실이나 고문실 같은 분위기라는 점에서, 작품들은 얼핏 독재정권 하에서 저질러진 전근대적 형태의 폭력을 언급하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종류가 다르다. 피해자는 동시에 가해자로, 방관자는 연루자로, 개인을 보호하는 공간은 개인을 공격하는 공간으로 돌변한다. 강래오가 묘사하고 있는 폭력은 말하자면 폭력의 탈근대적 형태로서, 여기서 폭력은 일종의 병리적 징후로 나타난다. 작가는 폭력의 정당화와 내면화가 일상화된 동시대 상황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폭력은 사회 밖에서 오는 위험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초래해 내면화한 자기 파괴로 드러난다는 데 그 의미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가 너무 쉽게 허용한 폭력은 때론 물리적 실체성을 띠지도 않으며, 어떤 한계를 지니지도 않고, 특정한 목적도 없이 출몰한다. 폭력을 통제하려 한 사회가 더 철저히 폭력적이게 돼 버린 이 역설
이 지금 우리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이다”(작가노트 중에서).
이러한 종류의 병리적 형태의 폭력은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노동의 조건 그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은 근대적 상황에서는 은폐되어 있었으나, 탈근대적 상황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공장의 비인격적 환경은 휴식의 인격적 환경을 침범한다. 우리는 사무실에서만큼이나 유원지에서도 강요된 오락을 수행한다. 바야흐로 ‘사적인 것’은 소멸하고 있다. 또한 ‘공적인 것’의 정당성 역시 침해되고 있다. 강래오의 작품은 이러한 동시대적 환경에 대한 고발이며 비판이다. 실험맨 복장을 한 인간들이 양복 입은 남자의 잠을 방해하려고 한다(혹은 영원히 잠들게 하려고 한다). 당구장에 모인 두건 쓴 남자들은 게임을 하는 동시에 자신들에게 부여된 역할을 억지로 수행하는 중이다.
작가는 또한 이러한 폭력이 인간에 대한 폭력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자연환경에 가해지는 폭력으로 번지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종류의 폭력은 이 세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하다. 예를 들어 원전 마피아와 일본정부의 공모가 만들어낸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결국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 전체의 생존 문제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암울함을 선사했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상황이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 폭력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과거 체르노빌 사건 때 사회주의 소련은 모든 주민들을 강제로 소개시킴으로서 피해를 최소하고자 했으나, 자유 민주주의 국가 일본은 모든 것을 개인적인 선택으로 돌렸다. 바로 이러한 선택의 자유가 더욱 큰 재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자유와 폭력의 공존이라는 이 역설은 원전사고라
는 특수한 경우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쉽게 목격된다. 학교, 지하철, 극장 등 가장 진부한 일상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무차별적인 테러는 개인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정지시키지 않고서는 예방이 불가능하다. 테러는 일상과 폭력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탈근대적인 폭력의 전형이다.
이러한 탈근대적 폭력의 성격을 우리는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에 나오는 ‘희생의 위기(sacrificial crisis)’라는 개념을 통해 이론화 해볼 수 있다. 지라르는 폭력의 문제를 통해 문화의 기원을 추적하려고 하는데, 그가 보기에 모든 문화의 기원은 폭력이다. 폭력의 희생자를 성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공동체 외부로 축출함으로써 문화가 유지된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희생자를 공동체에서 몰아내고 성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과정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선을 구축하는 작용을 한다. 토템숭배와 같은 원시부족의 풍습에서 발견되는 희생제의(sacrificial ritual)는 희생물에게 공동체 전체의 구성원을 대리하는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공동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만약 이러한 제의가 없다면, 상호적 복수의 형태로 폭력이 범람하여 사회는 위기에 처할 것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현대의 사법제도는 고대의 희생제의를 이어받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바로 그 당사자를 처벌한다는 점에서, 복수의 정면충돌을 피하는 고대의 희생제의보다 오히려 현대의 사법제도가 더욱 철저하게 복수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문제는 희생제의의 기능이 실패할 때 발생한다. 연쇄적 복수를 억제하는 법적, 물리적 권위가 기능을 상실할 때 희생의 위기가 발생한다. 순수한 폭력(희생제의, 사법제도)과 불순한 폭력(상호적 복수)를 구별하는 경계선이 무너지며 상호적 복수로서의 내적 폭력이 공동체를 위협한다. 합리적인 제도와 이성적인 집행은 붕괴되고 원초적인 상호 폭력이 전면에 노출된다. 지라르에 따르면, “희생의 구별, 순수함과 불순함 사이의 구별은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말살되지 않고서는 말살될 수 없다. 동일한 폭력적 상호성의 과정이 전체를 삼켜버린다. 따라서 희생의 위기는 구별의 위기로 정의할 수 있다... 희생의 위기에 숨겨진 폭력성은 궁극적으로 구별의 파괴로 이어지며, 이 파괴는 다시 새로운 폭력에 기름을 붓는다. 요컨대, 희생제도에 악영향을 주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토대 그 자체에, 사회적 조화와 균형이 의존하고 있는 원리에 위협을 가한다.” (Rene Girard, “Violence and the Sacred”) 공동체의 위기는 지라르가 ‘괴물스러운 쌍둥이(monstrous double)’라고 부르는 것들의 범람으로 발현된다. 괴물스러운 쌍둥이들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며, 공적 역할의 수행자이자 사적 복수의 수행자들이다. 희생의 위기가 초래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별만이 아니라 표면과 깊이의 구별 역시 붕괴한다. “체계의 기능이 밖으로 드러나면, 체제는 그것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불투명성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한다. 내부 작동원리가 명확히 보인다는 것은 체계에 위기가 왔다는 신호이다.” (Rene Girard, “Violence and the Sacred”)
지라르가 현대사회에 대해 많은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 시대를 희생의 위기가 발생한 시대로 정의할 수 있다. 공간과 인물, 사물들의 기묘한 배치에 의해, 외부와 내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폭력과 일상의 기묘한 혼합을 보여주는 강래오의 작품은 이러한 위기를 적절하게 이미지화하고 있다. 또한 강래오의 작업은 동시대의 일반적인 상황만이 아니라 특수한 한국적인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고문실이나 취조실 같은,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특정한 공간의 이미지와 사물들 속에서 반향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폭력은 중앙정보부의 고문실이 아니라 백주대낮 길거리에서 발견된다. 쿠데타에 의해 집권한 것이 아니라 선거에 의해 집권한 정부가 행사하는 노골적인 폭력성은, 법에 위반되는 폭력이 아니라 법 그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드러내준다.
우리는 최근 1-2년 사이에 한국사회를 형성하는 문화적 분위기에 눈에 띄는 변화가 왔음을 목격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소위 ‘일베 문화’라는 전대미문의 문화의 부상이다. 타인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성과 윤리적 후안무치로 대변되는 이 문화는, 희생의 위기 혹은 병리적 폭력의 극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병리적 사회에서는 특정한 행동만이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붕괴한다. 유신의 복귀로 요약되는 퇴행적인 정치 형태, 변00, 강00 등의 캐릭터들이 구축한 대중적 인기, 이00 남성연대 사무장의 자살 퍼포먼스,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의 상실을 보여주는 악플 등등.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공격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공격성은 너무나 노골적인 것이어서, 일상 그 자체가 폭력에 의해 침윤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작가 강래오는 그것을 “물화되어가는 인간들에 대해서 그들의 죽어가는 의식을 일깨워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고, 비판을 행하지 않음은 그 문제에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안위와 안녕을 위해 타인의 생명이 위협 받고 있음에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들의 이기심을 이용하려고 하는 세력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며, 부당한 폭력은 근절되지 않고 오히려 정당화하게 만든다. 나는 이번 작업을 통해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반성하며, 다시 이를 문제화시켰다”(작가노트 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여는 작가의 포부치고는 매우 야심차고 전방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업에 대해 진지한 반응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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