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준(1977~)은 영상작가이자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멀티 프로젝션과 옵티컬 사운드를 활용하여 즉흥음악가들과 협연을 통해 다양한 공간에서 시청각 퍼포먼스 작품을 발표했다.
사우스 뱅크 센터(런던), 카페 오토(런던), 로잔 언더그라운드 필름 & 뮤직 페스티벌, 넷마쥬 10(볼로냐), 보자르(브뤼셀), 102(그르노블) 등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상영기반의 작품들은 프랑스 라이트콘에서 작품을 배급하고 있다.
캐나다 리프트, 영국 노훼어, 프랑스 메탐킨 등의 작가입주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쿤스트독 갤러리 ‘사이팅 시네마’(2013년 2월), 팩토리 갤러리 ‘400 Years in 4 Minutes’(2013년 8월)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재현의 새로운 원칙들: 불투명성, 복합성, 재귀성
홍철기
우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당면한 '재현의 위기(crisis of representation)'는 동시에 실재의 위기라는 점에서 단순히 재현과 그 매개를 거부하고 실재에 직접 도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이중의 난제를 제기하고 있다. 정치적 용어로 바꿔 말한다면 대표의 위기란 또한 동시에 민주주의의 위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표 없는 민주주의', 혹은 직접적이고 순수한 민주주의를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고 안정되고 정당한 정치를 회복할 수 없는데, 이는 미학과 인식론의 문제 모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투명하고 무매개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실재란 존재하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재현과 표상 또한 실재의 대체물로서의 완전한 정당성을 확보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이와 같은 현재의 상황은 재현, 표상, 대표에 관한 이론 자체를 재검토하고 이를 재구성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바로 이는 정치와 미학, 그리고 과학의 문제가 결코 하나로 통합되거나 융합된다는 것, 혹은 어느 한쪽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따로 분리되어서 중립적으로 자신의 영역 안에서만 독자적인 방식으로 다뤄질 수는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재현의 새로운 원칙들의 출발점은 재현과 지시대상, 표상과 실재가 결코 어느 한쪽에 의해 대리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데 있다. 혹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비환원성(irreducibility)""이라고 말한 원칙, 즉 환원주의도 환원주의 비판도 아닌 불안정하면서도 중간적인 입장, 혹은 '절충안'을 받아들이는데서 출발해야한다. 절충안은 다른 말로 하면 대칭성(symmetry), 혹은 재귀성(reflexivity)의 원리라고 할 수도 있다. 절충안이란 무엇보다도 재현과 지시대상, 재현하는 것(혹은 주체)와 재현되는 것(혹은 주체) 사이의 간극을 전제로만 성립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실재는 재현의 지시대상이 되는 사물 그 자체로도, 혹은 그 사물을 재현하는 주체와 그 의식(과 그 안에서의 표상, 혹은 재현) 어느 한쪽으로도 환원되지 않으면서 양자 사이의 간극의 형태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대체와 환원의 논리는 재현과 그 지시대상 사이의 동일성과 유사성을 전제로 해서만 승인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재현의 역설과 간극은 모순으로 심화되는데, 재현과 지시대상 사이의 동일성과 유사성, 혹은 모방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이미 재현하고 있는 대상(representation), 혹은 주체의 측에서 주장될 수 있는 동시에 반대로 재현되고 있는 측(the represented)에서도 주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화작품을 예로 든다면 예술작품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이 재현하고 있는 대상과의 동일성을 승인 받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것이 재현되고 있는 대상을 기준으로 모방과 반영의 관점에서 재현하고 있는 대상을 판단할 수도 있다는 두 가지 가능성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순적인 가능성은 전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은데,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재현과 실재 모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이고 미학적이며 인식론적인 총체적인 위기는 사실과 지식을 외면하는 믿음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바로 사실과 지식의 영역에서 벗어난 이와 같은 믿음이 존재한다는 믿음, 혹은 다시 말해서 ""믿음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양자 모두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그 절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는 순수한 재현과 순수한 실재 어느 한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간극을 보존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기존의 재현론에 비추어 봤을 때는 생소한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풍경화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풍경화와 그것이 재현하고 지시하는 대상으로서의 풍경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재확인하고 풍경과 풍경화 어느 한쪽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간극의 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재현의 지위가 탁월한 풍경화 작품('자연의 거울')처럼 논쟁과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면, 그리고 동시에 지시대상, 혹은 실재의 지위가 풍경('주체 외부의 불변하는 자연')과 같이 재현활동 이전에 이미 존재하면서 그 상태와 지위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재현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재현이 풍경화 쪽으로도, 혹은 풍경 자체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며 이런 이유에서 풍경화와 풍경 자체 사이의 간극이야말로 여전히 불안정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실존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간극을 전제로 할 때, 재현이란 곧 재현 대상의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라 재현하는 것과 재현되는 것 사이의 관계의 재현이 된다 - 여기서 재현의 재귀성의 일차적 의미가 확인된다. 재현이란 이미 확연하게 존재하지만 재현이 일어나는 시공간에는 부재하는 어떤 대상의 재현으로만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선 재현의 대상은 재현활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현 없이는 실재도 없다(No reality without representation)!""는 강한 구성주의의 입장이 견지되어야 한다. 실재란 재현을 통해서만 지각되며 재현을 통해서만 실존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강한 구성주의는 재현과 실재 사이의 간극마저 메울 수는 없다. 오히려 구성주의가 강하게 주장될수록 재현과 실재 사이의 간극은 소거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강화되고 역설은 모순으로 심화된다. 실재는 재현을 통해 구성되지만 재현 자체에 의해서는 대체될 수 없다.
이렇게 봤을 때, 재현 행위는 어느 한쪽으로 환원될 수 없는 두 가지 측면, 혹은 두 가지 계기로 이루어진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묘사와 소집, 회합의 측면, 혹은 실재를 구성하고 가시화하는 계기가 존재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렇게 구성되는 실재를 주시자, 청중, 목격자, 관람객에게 보고 들을 수 있는 형태로 제시하거나 다시 제시하는(re-present) 측면, 혹은 계기가 없다면 재현은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재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재현행위란 재현되는 대상, 혹은 실재를 구성하는 동시에 이러한 실재에 대한 재현을 구성하는 활동이 되며, 이때 양자 사이의 간극은 재현의 허구성이 아닌 그 반대의 실재성 - 완전하고 보편적인 실재성이 아닌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실재성- 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재현(representation)에는 언제나 따라서 이와 같은 재현과 구분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를 상대화할 수 있고, 심지어 재현 자체를 논쟁과 논란에 휩싸이게 할 수 있는 재현되고 구성된 실재를 수반해야만 한다.
재현의 재귀적 원칙은 재현의 관계를 더 이상 재현과 그 대상이라는 이원적, 이분법적, 혹은 양자적인 관계로 한정할 수 없도록 만든다. 언제나 재현관계는 재현과 그 대상 사이에, 혹은 외부에 (최소한 하나의) 제3자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 최소한 재현의 관계는 재현행위를 하는 주체와 재현하는 대상, 그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의 3원적 관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재귀성의 관점에 입각해서 봤을 때, 재현관계란 최소한 3자 관계이자 삼원적 관계로 정의될 수 밖에 없으며, 이와 같은 3자 관계에 대한 인정은 결국 재현관계를 3자 이상의 다원적인 관계로의 확장을 불가피하게 수반한다. 재현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관객/청중의자 관계가 불가피한 확장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재현의 주체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관객/청중/목격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재현관계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즉 한 가지의 3자 관계로만 한정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재현과 실재 사이의 재귀적 간극은 재현과 관련된 우리의 지각이 일면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원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재현을 보는 동시에 재현을 통해, 그리고 재현이 대체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마치 일식을 통해 달과 태양을 동시에 보는 것처럼 필연적으로 '이중으로 보게(seeing double)' 된다. 우리는 묘사되고 소집되고 회합을 이룬 구성되고 부분적인 실재와 그러한 실재로부터 논쟁과 힘의 시험대를 견뎌내면서 선택되고 추출된 재현을 동시에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현재 우리가 재현의 주체로서든, 혹은 목격자 내지는 청중으로서든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재현의 3자 관계가 또 다른 3자 관계로 열려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재현관계의 다원성은 사실 재현의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 모두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실재가 하나의 통일된 실체로 존재한다고 전제할 때에도 재현의 관점에 따라 다원적으로 재현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수평적 차원의 다원성). 하지만 동시에 이와 같은 재현과 실재는 각각의 단계에서 오직 부분적으로만 구성되고 매개되기 때문에 재현하는 대상/주체와 재현되는 대상 사이의 거리와 간극, 그리고 다시 청중/관객/목격자와의 거리와 간극 속에서 여러 단계의 다원성을 함축하지 않을 수 없다(수직적 차원의 다원성). 재현의 수평적 차원에 있어서의 다원성에 비해서 수직적 차원의 다원성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관념이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이해와 관점이 가능하다는 것은 다원성의 오직 한 가지 측면에 불과하며, 이와 같은 관점주의만으로는 재현과 실재 모두의 위기에 창의적이고 생산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제 수직적 다원성, 즉 재현하는 대상/주체와 대현되는 대상/주체 사이의 거리가 투명한 매질과 매체로 채워져 있지 않으며 여러 단계의 가공과 구성, 그리고 부분적인 반사와 모방 및 반영 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각각의 단계는 다양한 다수의 매개적-재현적 행위자들, 즉 직접적인 제3자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을 시각화하고 볼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위기의 증상인 투명성과 무매개성, 즉 재현은 명석 판명한 대상의 반영이며 이와 같은 반영은 무매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 혹은 재현의 목표는 실재의 불투명성과 과도한 매개성에 때문에 이와 같은 투명한 반영이자 무매개적 재현이 불가능할 지라도 대상과 실재가 투명하고 무매개적으로 지각된다는 환상, 혹은 허구의 창출이 되어야 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은 순수한 산업적 이해관계의 산물이지 정치와 미학, 과학의 복합적인 이해관계의 결과는 아니다- 은 단순히 관점의 다원성, 혹은 재현의 수평적 다원성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
재현적이고 매개적인 행위자, 즉 직접적인 제3자들의 수직적 다원성이 함축하는 바는 'A가 B의 재현이다'라는 이원적이고 양자적인 관계가 사실은 시공간적으로 다양한 다수의 재현적 행위자들의 개입을 허용하고 요청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입의 지점과 시점에서 재현적 관계의 간극이 증식되며 간극들이 증식되는 만큼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재현의 청중/관객/목격자가 집합적으로 구성되고 소집된다. 우선 간극의 증식의 문제, 혹은 간극이 아닌 간극들. 재현관계의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다원성, 혹은 복잡성 내지 복합성은 더 이상 간극 제거할 수도 없으며 동시에 단 하나의 간극으로 환원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간극의 증식은 무엇보다도 간극이 제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비판적 사고와 함께, 간극이 재현과 실재, 믿음과 지식, 물신과 사실, 동양과 서양 사이에만 존재한다는 비판적 사고 또한 무력화시킨다. 이런 점에서 재현의 재귀적 정의는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이 환원론에 대비하여 산출론이라 부르는 철학적 관점에 근접한다. 환원론자(reductionists)란 ""간극들을 내파시킴으로써 이들을 하나의 단일한 원칙으로 전환시키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반면에 산출론자(productionist)란 ""이전까지 어떤 간극도 존재하지 않던 세계에서 새로운 간극들을 발견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계몽주의와 비판적 사고 및 실천은 이제 환원론과 산출론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믿음의 문제와 사실의 문제, 허구와 실재, 권리와 힘 사이(혹은 ""괴담""과 ""팩트"" 사이)에 오직 하나의 간극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투명성과 무매개성?혹은 기 드보르(Guy Debord)의 말을 빌면 ""스펙터클의 사회""-의
제물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유일한 간극의 정당성을 부분적으로 상대화하면서 다수의 간극들을 전제로 문제를 보다 복잡하고 복합적으로 이해하면서 재현과 그 대상의 관계, 그리고 행위의 결과의 불투명성을 전제로 사고와 실천을 전개할 것인가 하는 비대칭적 양자택일이 비판 앞에 놓여있다. 정치철학의 용어로 바꿔 말한다면,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이 지적했던 근대 민주주의의 조건으로서의 확실성의 표지의 실종과 그 구조로서의 ""권력의 빈 장소"" 란 더 이상 단 하나의 빈 장소가 아니라 다수의 빈 장소이며 우리는 실재의 복잡성에 일치하는 정도로 이와 같은 빈 장소들을 증식시켜야 하는 것이다.
재현의 재귀성의 마지막 요소, 혹은 재현의 순환적 관계와 과정의 마지막 고리는 바로 청중(audience/public)이다. 재현의 간극, 혹은 민주주의 정치의 초점으로서의 권력의 빈 장소의 증식은 재현적이고 매개적인 행위자의 증식인 동시에 이와 같은 재현-매개 행위가 벌어지는 장소의 증식이며 또한 이를 관찰하고 목격하며 판단하는 청중의 증식이기도 하다. 청중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재현행위와 재현관계는 재현적 복잡성과 복합성의 원칙을 완성한다. 청중은 어떤 행위나 사건에 대해 구경하면서 사후적으로 반응하고 승인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특히 정치적으로는 수동성이나 조작가능성과 연관되어서만 이해되었다. 하지만 재현이 언제나 재현하는 대상과 재현하는 행위의 목격자를 전제로 하게 될 때, 청중이란 사실은 파시즘 이론과 그에 대한 비판 이론이 전제하는 것처럼 무비판적이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 반응과 의견을 쉽게 조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청중은 어떤 행동을 주도하기보다는 이미 내려진 결정이나 취해진 행동, 혹은 일어난 사건에 대해 사후적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재현이란 오직 청중의 사후적인 판단과 평가, 그리고 승인에 최종적으로 종속된다. 청중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대상을 모방하고 반영하여 대신하는 어떤 표상, 혹은 대상을 만들어서 제시한다고 해도 이는 재현의 순환 주기를 완성할 수 없다. 청중이 인정하지 않으면 주체와 대상의 관계, 혹은 대상과 대상의 관계는 재현의 관계가 될 수 없다. 게다가 문제는 청중의 이와 같은 반응이 동질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청중은 결코 한 가지, 혹은 두 가지로만 반응하지 않는다. 언제나 청중의 반응은 찬성과 반대로 나뉘며 이는 재현행위에 대한 승인과 결합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청중은 재현, 혹은 대표의 행위가 이루어졌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를 합리적 이유에서든, 혹은 비합리적 감정에 의해서든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청중의 반대-보다 정확히 말하면 청중의 일부의 반대-가 곧 재현행위에 대한 인정이 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심지어 청중의 야유나 무관심이 인정과 승인의 표현방식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이와 같은 청중 내부의 균열과 복합성은 재현적 다원성의 수직적 차원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재현적이고 매개적인 행위자와 매체의 수만큼의 무대가 존재하며 또한 무대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서로 다른 규모와 차원의 청중이 구성되고 회합하게 된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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