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서문-최관호

빛과 물성의 지각현상

● 현대미술에서 설치미술은 다매체 및 일상성의 수용, 발상의 전환, 새로운 미의식의 확장 등 다양한 방식의 해석을 통해 여러 담론을 생산해냄으로써 이제는 과거의 실험예술-모더니즘적 미의식의 한계에 대한 극복, 즉 탈모더니즘의 표방과 함께 탈평면화, 탈조각화를 주도하던-그 이상의 총체적 개념예술로써 국제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장르로 자리매김 해오고 있다. 설치미술은 본능적으로 대상을 미술작품 안으로 적극 끌어들여 별거 중인 예술과 일상을 일체화하고자 한다. 이를 위한 주요 전략의 하나는 오브제에 의한 일상공간의 수용이다. 또한 이로써 전통적 조형원리에 이의를 제기하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어법에 보다 부합하는 다양한 재료에 의한 표현 가능성의 확장을 모색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 설치미술은 또한 주로 오브제의 사용과 설치형태에 의해 규정된다. 더불어 다양한 재료의 연구와 욕구에 따른 폭넓은 매체범위 및 장르를 깊이 반영한다. 또한 조각의 변이가 아님에도 오브제들을 재조합하는 과정에서는 조각적 원리를 따르고 있다. 이 같은 설치미술은 현대미술에 나타나는 표현의 실제성과 허구성에 대한 비판적 변화 등을 통해 입체적 실존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박광옥은 물리적 에너지의 근원인 빛과 그 빛으로 인해 가시화되고 변화되어 우리 눈에 나타나는 다양한 물질의 현상, 그리고 그것들이 시공간과 만나 새로운 공간의 변화를 시도하고 이를 시각화 하려는 설치미술가이다. 그는 물리적 혹은 인공적인 빛이 투명성 강한 물질과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지각 현상을 통해 물질의 본성 그 자체를 제시하고 동시에 그 이면의 사회적 의미와 작가의 비판적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가로서의 행신을 분명히 하고 있는 작가이다.

● 그는 학창시절부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대상에 대한 탐구를 지속적으로 해온 작가이다. 물리적, 과학적 관점에서의 빛에 대한 연구와 물질적 관점에서의 유리, 아크릴, 비닐, 물, 등 특히 투명성이 강한 재료들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이들의 상호 작용과 유기적 현상 및 공간의 새로운 변화를 예술적 사고로 천착해온 작가이다. 따라서 그가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빛과 투명한 물질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는지, 그에게 있어 사물의 본질과 빛의 지각현상은 어떠한 관점으로 해석되고 있는지를 알아가는 것이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이 될 것이다.

● 이번 전시에서 박광옥의 설치작품을 통해 우리가 가장 먼저 시각적으로 대면하는 작품은 투명 플라스틱 재질의 PET 생수병과 그것들의 집적된 설치물, 그리고 그것을 빛의 효과로 투과하여 시각적 충돌을 일으키게 하는 그의 대표작 「가시광선」이라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은 그가 오래전부터 물성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실험해온 유리작업의 연장선상에서 투명성과 가벼움, 빛에 민감한 물질을 PET병으로 대체시키고 그 속에 맹물 혹은 색소를 담아 질서와 변화의 조각적 조형 원리에 의거하여 치밀하게 설치한 작품이다. 생수병 뒤에는 다채널 시그널신호기에 프로그램화되어 시간차로 인해 시그널 전구가 순차적으로 빛을 발산한다. 여기서 그는 빛의 흐름을 통해 반응하는 사물 현상에 주목한다. 빛이 투과되거나 반사되고, 혹은 굴절되어 한곳에 머무르거나 확산되는 등 다양한 빛의 현상을 관찰한다. 마치 서로 상충되는 두 물질이 만나 스파크를 일으키듯 강한 빛을 발산하며 투명한 생수병에 담긴 물의 잔상이 강한 여운을 남기며 새로운 이미지로써 다가온다. 고요속의 외침과 같은 인간의 양면성과 현실 속에 감춰진 비현실적 속내를 들추어 보이려는 작가적 의도로 읽힌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사회적 비판의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내러티브적 형식을 취하고 동시에 표면적으로는 일상의 물성에 대한 수용과 재현을 시도하는 것이다.

대상에 의한 빛과 투명한 물성의 실험은 그의 작품 「스펙트럼」에서도 연결된다. 물성의 질료적 성격과 빛이 반응하는 현상은 다르지만 두 대상간의 관계는 그의 기본 작업 개념과 같은 맥락 안에 놓여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가시광선」작품은 빛과 물성의 관계에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빛이 주제이고 생수병 설치물은 부제가 된다. 즉, 투명한 물성과 만나 반응하는 빛의 현상에 좀더 구체적 의미를 부여했다면, 「스펙트럼」작품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빛에 의해 반응하는 물성에 주목하게 된다. 이 작품은 빛의 분석법인 스펙트럼의 원리를 차용하여 투명 생수병에 일곱가지 빛의 색요소인 '빨주노초파남보'의 식용색소를 담아 군을 이루도록 설치하고 가시광선 작품에서와 같이 설치물 뒤로 LED 전구를 나열하여 백색의 빛이 좌우로 흐름을 타듯 움직이며 일곱가지 색소가 담긴 생수병에 시각적 변화를 일으킨다. 즉, 빛에 의해 물성이 반응하며 변화되어가는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이것은 작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의 행위 혹은 환경의 변화에 의해 자아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무의식중에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말해 자아의 정체성과 주변의 관계성을 이 작품을 통해 규명하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은 색소를 담은 생수병을 물성 그 자체의 본질로 제시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변의 인위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자체로써의 본질을 유지하려는 작가적 정신을 상징하는 메타포이다.

이렇듯 박광옥은 물성에 대한 성질과 변화된 현상을 미술의 조형언어로 재해석하고 재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동안 사물의 투명성과 가벼움 등의 질료에 관심을 갖고 대응하는 형상에 의미를 부여해 왔다면, 최근 그는 시멘트를 사용하여 다른 작품과 대조적으로 무거움과 거칠고 단단함 등에 사물의 형상을 부여하고, 이를 재현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의 작품 「심해」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줄곧 작업의 소재로 사용한 가볍고 투명한 PET 생수병에 물이 아닌 시멘트를 부어넣어 건조 후 거푸집의 역할을 했던 외부의 플라스틱 생수병을 제거하여 본래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형식을 취한다. 시멘트라는 재료와 무거움은 작가 박광호에게 새로운 것이 아닌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시멘트는 조각과 출신인 그가 학창시절부터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소재였기에 물성에 대한 특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심해는 말 그대로 깊은 바다를 뜻하며 시멘트 생수병은 가시광선이 미치지 못하는 수중 속 깊숙한 곳에서 화석 같은 존재의 의미를 상징한다. 이번 전시에서 「심해」작품을 물성이 다른 작품과 함께 선보이고자 했던 것은 같은 형상의 다른 물질을 같은 공간에 전시함으로써 이들의 유기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작가와 작품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 것이다. 또한 형식적으로는 빛과 투명성에 대한 임펙트로 심해는 정반대의 강한 물성이고 무거운 이야기를 담아냄으로써 역으로 가시광선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박광옥은 그의 설치작업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재료가 갖는 물질적 특성을 이해하고 그것의 해체와 결합, 변형과 재현을 통해 물질과 비물질에 대한 주관적 해석과 의지적 표현을 견지한다. 또한 내면적으로는 자아와 타자, 주체와 객체, 일상과 일탈의 총체적인 소통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끝으로 우리가 현시점에서 그의 작업을 눈여겨 봐야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과거 미술사적 맥락에 비추어 봤을 때 물신주의(物神主義)에 빠져 있던 예술가들이 일상의 온갖 낯선 물질들을 그저 미술의 세계에 도입하는 것으로써 미술을 부정하고 파괴하려던 전위적 형태의 실험예술과, 정보와 네트워크 사회의 현시점에서 비가시적인 매체와 비물질의 언어 즉, 수학적 기호와 코드에 의해 사이버 공간이 설치되고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예술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동시대 현대미술의 현실 속에서, 과연 박광옥이 보여주는 이번 전시의 설치작품이 위에서 언급한 전자의 진화된 행위인지, 아니면 후자를 부정하는 전위적 태도인지, 아니면 또 다른 미의식을 향한 개척인지, 지금은 그의 작업을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의 작업행보를 꾸준히 지켜봐야 하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 최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