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은은 기술결정론자가 아니다. 지금껏 그가 자신의 작업에서 견지한 태도는 상황 연출가, 아니 감독에 가까웠다. 그는 다채로운 미디어 장치를 마치 무대처럼 연출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시각적으로 볼 수 없는 요소들을 그가 고안한 일련의 장치들을 통해 시각적으로 번안하는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 왔다. 일련의 장치들은 심리적 분위기를 연출하며 새로운 의미의 연쇄들을 생산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새로 선보이는 작품들은 기계적 재현의 의미를 넘어 심리적 기제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의사체험 장치의 고안자
● 그가 만들어낸 세계는 의사체험 혹은 의사현실에 가깝다. 그것은 재현의 문제 보다는 실제세계를 축소시킨(물리적으로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모델링의 개념에 가깝다. 또한 「Circle Drawing」, 「Unwrapped」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보이지는 않으나 우리를 둘러싼 감각들을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시각적 흔적으로 변환시키는 작업들을 지속해왔다. 기계장치는 그에게 '의사-세계'를 연출하는 도구이다. 미니어처와 기계장치를 통해 디지털로 변환된 세계(의사-현실)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직접적 재현이라기보다는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의 재현이다. 이를테면 시간이 흘러가는 방식, 바람이 부는 방식을 장치로 구현하여 재현의 재현, 복제의 복제를 거듭, 디지털로 변환된 이미지를 구축해나간다. 「Easel Painting」역시 그리는 행위 과정 자체를 기계화된 이젤과 영상 장치를 통해 '유사-화가' 혹은 '의사-예술행위'로 구현한다. 그럼으로써 원본에 대한 욕망과 그로인한 예술의 신비화(생산)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다. 그런데, 그가 만든 이러한 의사세계는 계산된 법칙으로 만들어진 기계장치들로 이루어졌지만 오히려 유동성과 우연성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수학적 법칙에 지배받는 기계가 움직임에 따라 생성된 이미지들은 서로 복제를 반복해 축적된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이미지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불확실한 세계의 축소판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의사-체험'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시각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비확정적인 현실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체계에 대한 물음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4차원의 세계
● 이번 전시에서 그는 심리적으로 확장된 시각을 제안한다. 스크린, 거울, 특수렌즈 등 현실의 상을 맺히게 하지만, 기능과 의미가 다른 매체들을 이용, 실재세계(경계) 너머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스크린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스크린의 납작한 표면 속(너머) 4차원의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이미지는 압축된 형태로 실재세계의 경계선이 되는 벽에 가로막히기도 하고, 물이나 거울, 모니터 등 실재와 비실재를 경계 짓는 선을 넘나들며 실재세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넘나듦은 말 그대로 '출몰'의 이미지들이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스크린 속 영상이라는 우물에 빠진 대상을 작가는 실재세계로 불러내는 것이다. 출몰하는 이미지들은 응시의 문제를 내포하며 관람자를 향해 드러나기도 하고, 스크린 속 깊은 웅덩이로 숨어들기를 반복한다. 이 같은 작업은 작가의 '스크린 너머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 '현실에 대한 불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유동성과 불확정성의 맥락에서 대상은 경계를 넘나들 뿐 아니라 여러 개로 분절되거나, 압축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출몰하는 이미지 속에서 관람자는 이내 스크린, 거울 등의 존재를 인식하며 몰입의 순간은 사라진다. 지젝이 말했듯, 잉여쾌락의 시대에서 재빠르게 교환되는 대상은 모방과 재현에 대한 욕망에서 기인한다. 작가는 이 같이 재빠르게 대체되는 후기산업사회의 욕망, 즉 공간을 소유하려는 욕망, 이미지를 붙잡아두려는 욕망을 거울을 이용한 미디어 작업으로 시각화한다. 대상이 되고 싶은 욕망에 대상을 모방하면 다시 다른 대상으로 대체된 새로운 욕망이 생겨난다. 이러한 연쇄적이고 끊을 수 없는 사슬과 같은 욕망을 시각화하며 작가는 텅빈 공간들을 심리적 요소들로 채워나간다.
투사와 반영이 중첩된 「이상한 거울」
● 「Wrong Planet」과 「칼새」에서 보이듯, 실재를 왜곡시키고 파편화시키는 분절된 화면은 공간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거울에 비친 대상이미지와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는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보다 한발 앞서, 끊임없이 그리고 유동적으로 변화하여 해체와 조합을 반복하므로 따라잡기 어렵다. 더불어 거울 속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시시각각 변하며 거울을 보는 주체의 지각체계에 혼란과 불안을 증폭시킨다. 결국 대상과 주체, 이미지는 서로 소유할 수도, 따라잡을 수도 없이 서로를 욕망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쾌락이 증대되고, 우리가 대상에 대항하면 할수록 대상의 힘은 우리를 압도하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삐딱하게 보기』, p. 22) 한편, 이같이 끝없이 순환하는 욕망의 사슬이 소멸되면 우리는 오히려 불안을 느낀다. 이에 작가는 욕망을 투사하기 위한 스크린으로 기능하는 '환상 공간'을 생성한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을 드러내고 무대화하는 장면(공간)이다. 이러한 환상적 공간에서 생생하고도 매혹적인 영상을 반복하는 것은 환상적인 공간에서 욕망이 소멸되어 빈 공간, 즉 흔해빠진 일상공간만 남을까 두려워하는 심리적 태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공간의 무한확장은 욕망이 소멸되고 남은 빈 공간에 대한 거부와 심리적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앨리스의 거울처럼 경계 사이를 흐르며 이동하는 이미지는 3차원의 현실을 빛에 의해 투사된 스크린과 모니터 속에 잡아두려는 욕망과 스크린 바깥의 실재계로 나오려는 욕망의 충돌을 야기한다. 김태은의 신작에서 스크린과 거울은 세계를 이성적인 법칙에 따라 인지하는 투명한 창문이 아닌 대상의 부재에 따른 지각의 주체로서의 시선을 암시하는 「이상한 거울」로서 기능한다. 즉, 부재하는 대상을 욕망하며 은밀하게 보는 자로서 관람자를 위치시키다가도 이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동시에 중첩되는 것이다. 이처럼 관람객이면서 동시에 거울 속 인물이기도 한 이상한 거울-스크린은 서로의 욕망과 현실의 반영이 투사되는 과정을 매개시키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즉, 순수한 반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거울과 같은 역할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스스로를 경계선으로 하여 거울 속(너머)에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유리창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체와 대상, 안과 밖이 뒤엉킨 공간에서 서로 겹치거나 충돌하며 다양한 심리적 스펙트럼을 다층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그것은 공간적 깊이와 상상력을 부여하는 심리적 효과로 작용한다.
영상기호로 연출된 심리극
● 이번에 전시되는 신작들은 심리적인 효과들을 한층 극대화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 자신의 영화적 경험을 적용시킨 영상의 논리에서 기인할 것이다. 두 번째 개인전 「독」에서 무한히 확장되는 원근법적 공간으로 환각적인 경험을 극대화하여 보여주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특정 인물을 주축으로 전개되는 시각적 기호와 영상이미지를 통해 환상적인 경험을 확장시켜 나간다. 사회속의 기호라 할 수 있는 일종의 수신호이미지를 통해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일상에 내재된 욕망의 부조리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 효과가 극단적인 공포나 환상적 경험 그 자체를 상기시키기 보다는 파편적인 단상처럼 보여진다. 무용수가 만들어내는 수신호 이미지들의 표상이 탈신비화, 탈자연화된 기호로 구성되어있음을 폭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굴절되고 단절된 신체들을 분해, 조립된 이미지는 공포심 보다는 일정한 사회체계 속의 의미화과정에 대한 장치로 이해된다. 이렇듯 작가가 펼쳐놓은 심리극과 같은 장치는 연상 작용이나 관습적인 연결을 통해 대상과 임의적으로 연결된 약호인 동시에, 대상의 존재 결과로서 나타나는 지표이기도 하다. 분절된 이미지들과 영상 속 신체의 파편들, 그리고 거울 속에서 분절된 채 투사되는 이미지 조각들은 시간과 공간의 비연속적인 경험들을 만들어내는 현실의 분열을 가속화시킨다. 「트라우마」에서 심리적 욕망과 불안, 그리고 실재세계와 이미지간의 충돌은 극대화되어, 깨어진 모니터와 화려한 영상이 극적으로 대비된다. 금간 모니터와 화려한 색감의 영상이 섞여 뒤틀리고 일그러진 심리적 공간의 파손된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관람자는 작가가 만들어낸 장치와 이미지에 몰입하고자 하지만 일련의 기표들과 관람자의 시선주체 사이에 교환되는 연쇄작용들로 인해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계속 유동적으로 생성된다. 스크린-눈을 암시하는 이상한 거울은 욕망과 불안이 충돌하며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바로 그 지점인 것이다. 김태은은 지금 기계장치로 이루어진 세계와 서사가 결합된 영상기호이미지 양자 사이에서 실험을 하고 있다. 심리적인 요소와 장치들을 도입해 기호이자 텍스트로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다. 현실너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이 만들어내는 김태은의 작업은 변화와 확장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비로소 그의 심리극은 시작되었다.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