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도시 풍경 -익숙함과 낯설음의 이중주

장민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철학박사)


풍경화란 대개 아름다운 장소나 기억에 남아 있는 장소를 그린 그림이다. 이것은 외부 세계를 보여주는 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작가가 세계를 주목하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작가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창이라고 할 수 있다. 내면의 창이 되기 위해서는 두 요소가 필요하다. 하나는 사실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을 투사하기 위한 의도적인 왜곡이다. 두 요소가 절묘하게 결합되면 될수록, 관람자는 작가의 감정에 동화되기 쉽다. 관람자는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그 장면에 접근하면서도 작가의 시선으로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함수연은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 설은 도시 풍경을 선사한다. 작가는 능숙한 솜씨로 도시의 한 장면을 사진처럼 포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반 사진과는 다르게 파스텔 톤의 단색 배경 속에서 일상의 인물이나 자동차를 채도 높은 색으로 정교하게 그려 놓고 있다. 그의 도시 풍경은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 속에서 언뜻언뜻 낯설음이 교차되면서 도시에 대한 색다른 느낌을 전달해 주고 있다.

<연속된 풍경-Sequence>이라는 전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함수연은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를 택해 동일 장면을 연속해서 그린다.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주조 색을 정해 놓고, 배경부터 섬세하고 재빠르게 붓질을 해나간다. 파스텔 톤으로 얇게 칠해진 배경 위에 나무나 건물을 배치해 놓고 있어, 일정 거리를 두고 본다면 먹의 농담으로 구성된 산수화처럼 보인다. 세필로 후경을 이루는 나무와 나뭇잎들을 능숙하게 그려놓고 전경에다 주제가 되는 인물이나 자동차를 윤곽이 뚜렷하게 그려 넣는다. 그리고 그 외의 대상들은 과감하게 생략해버린다. 어떻게 보면 외부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한다기보다 산수화처럼 풍경의 배경을 먼저 그리고 주제가 되는 요소들을 적소에 배치하고 있는 형태를 취한다. 세필로 섬세하면서 재빠르게 그린 파스텔 톤 배경과 그 위에 세련된 모습의 자동차들이 절묘하게 배치됨으로써 도시의 화려함 뒤의 쓸쓸함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먹의 농담처럼 물감의 미세한 변화는 산수화에서 느낄 수 있는 차분하고 명상적 태도를 취하게 만들고, 그와 대조되는 세밀하게 그려진 인물이나 자동차는 도시의 경쾌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의 작품에서는 쓸쓸함과 화려함, 혹은 차분함과 경쾌함이 교차됨으로써 작품에 몰입하면 할수록 작품은 우리에게 자신의 전부를 쉽게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함수연은 작가 노트에서 ""혼자서 담담히 응시했던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는 심리적인 잔상들이 그림 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익숙한 장면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넘어 그 순간 자신의 느낌을 화폭에 담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동일한 장면을 약간의 색의 변화를 주어 연속하여 그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장면에서 자신이 느끼는 바를 미묘한 색채와 붓 터치의 변화로 잡아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그리려고 하는 것은 한 곳의 풍경이라기보다 그곳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 자신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곳 일수록 그 곳에서 느끼는 자신의 감수성은 어느 곳보다 강할 것이다. 작가는 그 느낌을 잡기 위해 적절한 표현 방식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작품의 효과를 구현하기 위한 매체와 표현 방식의 문제로 귀결된다. 작가는 연속된 장면의 풍경화를 통해 자신의 느낌의 미묘한 변화에 주목하고 이것을 구현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 방식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가 이번 전시의 작품들이다. 우리는 이번 작품에서 작가의 능숙하고 섬세한 붓질을 감지할 수 있다. 붓질이 능숙해질수록 매체와 작가가 하나가 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제는 그 붓놀림 자체가 작가 감정의 흐름이 되어 버린다. 추상표현주의 작품에서 붓질 자체가 작가의 감정이 되듯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칠해진 작가의 붓 흔적은 그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사고와 감정을 섬세하게 펼칠 수 있는 전제가 되듯이, 매체에 대한 자신감이 자신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 마치 타이핑의 능숙함이 사고의 표현을 자유롭게 해주듯이 함수연의 능숙한 붓놀림이 감정 표현을 자유롭게 해준다. 매체가 손에 익을수록 작가는 감정 표현의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다. 그는 섬세하고 재빠른 붓질을 통해 자신의 지나간 체험을 완성해간다. 그것은 짧고 능숙한 붓질의 경쾌함을 통해 드러난다. 그의 작품에서 주는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도판 이미지보다 실제 작품을 직접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은 크기의 복제 이미지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붓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원작 이미지에서는 즉각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가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붓질에서 그가 나타내려는 도시의 경쾌함과 더불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을 감지할 수 있다.

함수연은 <연속된 풍경> 시리즈 이전에도 자신의 일상을 작품에 담으려고 시도했다. 그가 이전에 그린 정물화나 인물화에도 자신의 사적인 일상을 담고 있었다. 그가 그렸던 하나하나의 작품은 그 나름대로 작가의 사연이 담겨져 있다. 그 작품들이 주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가의 개입이 요구된다. 작품들 그 자체로도 완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작품들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사적인 경험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와 달리 이번 <연속된 풍경> 시리즈에서는 능숙한 붓놀림을 통해 작가의 개입 없이도 작가 자신이 전달하려는 바를 화면 자체에서 완성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함수연의 매체를 다루는 방식이 원숙해질수록 그의 세상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 섬세해질 것이다. 이 점이 <연속된 풍경> 이후에 그가 어떤 이야기를 그려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우리는 함수연의 풀어낼 또 다른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