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신진 작가, 김규리

일상의 그림자를 향한 깊은 위로

김규리의 이번 전시, <변형하는 탈출자들>은 ‘바람직한 일상’의 이면으로 방기되어온 ‘냉대와 소외, 권태와 무기력, 구속과 저항, 절망과 상실’이라는 다소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작가는 이 불편한 주제를 구체적으로 헤집고 비틀며 무엇이 우리 삶을 이루는 원소이어야 하는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되묻고 있다.

김규리는 이러한 메시지를 회화와 애니메이션, 비디오라는 다중 매체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독특한 점은 자신의 표현 의도와 전달 매체의 특징을 자의적으로 매칭하는 방법을 써서 주제가 보다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한 것이다. 즉, 회화는 고체화되어 정지되는 것 같다는 점에서 ‘인간의 구속과 억압’이라는 주제와 연결하고, 이를 멈춰버린 화면처럼 시각화했다. 또한 애니메이션은 액체처럼 흐르는 것 같고, 비디오는 기체처럼 해체되는 것 같다는 점에서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강렬한 의지’라는 주제와 연결하였고 이를 부유하듯 움직이는 동작으로 표현했다.

회화를 통해 구현한 ‘인간의 구속과 억압’이라는 주제에서, 작가는 몇 가지 구체적인 일상의 단상을 포착하여 마치 연극 무대의 한 장면을 연출하듯, 내러티브가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먼저 작가가 우리 일상에서 가장 가까운 소외의 대상으로 꼽은 존재는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이다.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와 <저편으로 떠나다>는, 가족의 안녕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우리시대 가장들이 가족들로부터 소외되는 존재, 돈만 벌어다 주면 되는 존재로 여겨지는 참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해도 반겨주는 것은 아내도 자식도 아닌 키우는 개뿐이고,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늘 가족에게 모두 바치지만 따뜻한 위로 한마디는커녕 냉대와 무관심뿐이니 그저 저편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그런 존재인 것이다. 바로 이즈음에서 김규리는, “가족이란 무엇인가?” 라고 진지하게 묻고 있다.

또한 아무리 생산적이고 능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인간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권태와 무기력, 더 나아가 절망감에 빠질 때가 있다. 모두 각자의 동굴 속에서 지독한 상실감에 젖어 점차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조차 없는 그저 ‘존재’하는 존재인 것이다. <저편을 보다>, <배고픈 돼지>, <식사>, <대화> 등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의지조차 망각한 무생물 같은 존재로서의 인간, 가장 가까운 이들과 소통조차 못하는 사랑 부재, 인격 부재의 관계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로보캅>은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이주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비틀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메마른 인간성, 자기애와 인간애의 부재를 상징하는 ‘가구 인간’을 형상화 해냈다.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지 못한 이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꼼짝없이 순응할 뿐이다. 그러나 가구 인간은 결국 인간이기에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은유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다시 한번 넌지시 묻고 있다.

김규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애니메이션과 비디오를 이용해 판타지와 같은 영화적 연출을 시도함으로써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강렬한 의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애니메이션 은 벽 속에 갇힌 인간, 즉 움직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세계에 구속되어 있 인간이 의식을 되찾듯, 천천히 몸을 움직여 벽을 뚫고 빠져 나와 자유롭게 움직이고, 숨 쉬고, 말하고, 듣고, 느끼는 살아있는 세계, 살아있는 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담고 있다. 흐르는 액체의 움직임처럼 독특한 동작의 표현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는 회화작품 <그들의 식탁>을 토대로 한 것으로, 김정일 독재 정권하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이 겪는 체제적 구속, 인간성 말살의 고통을 그리고 있다. 이 영상물에는 북한체제의 전승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김정일, 국가의 보호로부터 외면당한 채 이미 죽거나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 이러한 통탄해 마지않을 상황을 TV 드라마 보듯 방관하는 남한 주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든 욕망의 상징물인 사과를 공유하지만 욕망의 수위와 대상, 실현의 여부는 저마다 다르다. 김정일은 북한 주민이 받아야할 수혜를 빼앗아 전쟁무기 개발에 투입하면서 욕망을 채워나가고, 북한 주민들은 생명부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사과(욕망)를 향해 손을 내밀어보지만 헛짓이 되고 만다. 남한 주민들은 욕망이 이미 손에 쥐어져 있지만 그것에 대한 기쁨조차 느끼지 못한다. 작가는 여기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라고 또다시 묻는 듯하다.

김규리는 다양한 매체 활용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나약함, 다면성, 부적응, 소통불가 등의 병리적 현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면서 이에 대한 사회적 치유를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또한 인간적 삶, 꿈꾸는 삶에 대해서도 진지한 모색을 제안한다. 어찌되었든 우리 앞의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병리현상과 치유에의 모색 또한 반복될 것이다. 우리는 그 틈에서 끝없이 욕망을 좇고, 꿈을 꾸면서 기뻐도 하고 좌절도 할 것이다. 작가는 이것이 인간다운 삶의 여정임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있는 인간이기에 인간답게 살아가야 함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독설처럼 보이는 그녀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어쩌면 깊은 위로를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가진 작가, 김규리의 앞으로의 행보가 그래서 더욱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