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ck in Nature-구미경의 두 번째 개인전에 부쳐
박이선(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한지는 동양화의 근간이 되는 재료로 쓰여 왔으며 그 특수성 때문에 안료나 먹을 붓에 묻혀 종이에 대었을 때 그 색 그대로 발현되는가 하다가 이내 종이의 겹겹이 속으로 흡수되어버린다. 또 색을 드러내는 대신 그 자리에 희미한 번짐의 흔적을 남긴다. 현재에 이르는 동안 한국화 그리기에 매진한 작가는 한지가 가진 번짐의 미학을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다. 작가 자신이 재료와 분야의 특성에 매료된 채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자연을 그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삭막하고 멋도 없는 건축물에 생긴 균열 안에서 자연의 흔적을 찾아내어 작가의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한 세계는 성립하여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으며(成), 시 공간 속에 머물러 존재하다가(住), 허물어지고 파괴되어 가다(壞), 성립되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 사라져간다(空)’는 불교의 진리가 그녀의 정서와 작품에서 맥연히 느껴진다. 이는 작가 자신이 삶을 통해 세상사의 돌고 도는 이치를 터득하고 율동적인 선과 색으로 재창조하여 새로운 공간을 제시하기 때문일 터이다. 그녀가 그동안 자연의 잔상들을 리듬이 느껴지는 드로잉과 선으로 표현하며 생기는 우연적 요소와 필연적 요소의 결합 그리고 자연의 끝없는 변화와 생성, 소멸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풀어내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우리 주변 자연의 이미지들을 발견하고 선과 명암으로 해석하려는 의도를 보여 주는 작품들에 색면을 입혀서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그녀의 소재 선택을 보면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애정과 남다른 관심이 엿보인다. 본질적 요소인 자연을 바탕으로 하나 도시에서 나고 자라 삶의 터전으로 삼고, 그 안에서 자연의 이미지를 찾고자 노력하며,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자연의 이미지를 찾아냄에 재미를 느끼고 그를 바탕으로 요소요소에서 찾아내어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구미경의 작품에는 어떠한 사회적 현상이나 세상사를 즉각적, 직접적으로 반영한 요소는 없으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자연에 입각한 세상에 대한 생각과 관심들이 그녀의 감수성과 섬세한 성격을 바탕으로 상징적이고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지고 있다.

“차를 타고 터널 속을 통과할 때 눈앞으로 스쳐간 것은 때와 먼지로 얼룩진 터널 벽이 아니라 나에겐 거대한 산수였고 인공의 흔적이 만들어낸 퍼포먼스였다.”-작가노트 중에서
작가는 자신의 눈을 통해 인공물의 갈라지거나 희미해진 흔적 사이에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자연의 실루엣’을 지각하고 작품으로 표현하며 단색으로 일관되는 도시이미지 위에 낭요한 색조로 크랙의 변신을 시도한다.
본래 크랙은 갈라지고 금이 간 상태를 지칭하나 그녀의 크랙은 잊혀진 이미지의 재창조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이미지로 느끼게 한다. 깨어지고 갈라져 소멸하나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시각이 생성되고 또다시 변화한다. 역동적인 움직임 없이 한결같아 보이지만 소리 없이 변화하고 소멸하고 생성되는 자연의 이치와 일치하는 바이다.
특히 일상 속 동경의 대상인 하늘이 그간의 소재였다면 이번 전시에는 위를 향해 있던 시선을 아래로 두어 아스팔트 바닥, 시멘트 건물의 외벽 등 우리 눈높이의 세상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진행하였다. 우리를 둘러싼 공간을 평면회화로 표현하면서 작가는 특히 단색조를 이용한 공간감 표현에 중점을 두어 작업한다. 그리고 그 공간감위에 색채와 선을 이용하여 새로운 공간구성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한지도 그러하고 그녀작품의 재료가 되는 먹, 한지, 아교, 동양화 안료, 아크릴 물감 등의 재료는, 뜻밖의 조합으로 인해 작가의 의도를 표현하며, 때로는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우연한 효과 또한 만들어 낸다.) 그녀의 리드미컬한 선들이 만나는 의도적 구성과 자연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과정, 자연의 구체적 대상을 명확히 묘사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예전작업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전시의 작품들을 보면 그녀의 시각이 점차 넓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녀의 세상에 대한 애정 또한 밝고 명쾌한 색채로 표현함에 따라 방법론의 확장이 점차 전개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려진 부분과 드러난 부분들의 대조 또는 조화를 통해 서로의 관계성을 가지고 화면 속에서 이중적 시각적 교감을 꾀한다. 그녀는 색이나 선으로 배경까지 꽉 채우지 않고 여백을 남긴다. 그 여백은 그리지 않았으나 비어있음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공간들과 크랙을 표현한 선들의 조합을 통해 생겨난 공간들 즉 이 계획된 공간들은 그대로 남겨진 채 꽃의 형상이 되기도 하고 돌의 형상을 띄기도 한다.
그녀가 소재로 삼고 있는 자연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특별한 시각, 작품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과 도전으로 인해 발전해 가는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그녀에게 관심을 두고 지켜보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