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국 ON MASK

조주현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정명국은 최근 몇 년 간 자신의 관심 대상을 ‘프로타주’라는 기법으로 문질러 떠내는 독특한 방식의 작업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그의 관심 대상은 줄곧 산업사회를 대표하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상징물인 ‘자동차’였다. 먹물이나 물감 등으로 어둡게 칠한 바탕 위에 흑연 덩어리 연필 또는 칼라펜슬로 대상(자동차)의 부분을 반복적으로 문질러 떠낸 수 십장의 판화지를 연결시켜 실제 크기의 자동차 표면을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 놓는 이 기법은 정명국이 자신의 이념을 실현시키는 매우 적절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렇게 대상의 표면을 그대로 떠내는 작업은 그 대상이 지닌 흔적을 고스란히 끄집어내어 시공간을 거슬러 담고 있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개인적 스토리 등을 신체적으로 기억해 내는 과정이다. 그가 이러한 기억을 떠내는 과정은 그리 녹녹치 않다. 대상의 형태가 정확하게 드러나면서도 매끈한 표면의 질감이 표현될 수 있도록 몇 주 동안 밤낮없이 매달리는 인고의 노력을 들여야 한다. 일반적인 그리기의 과정과 차별되는 프로타주 기법은 작가가 대상에 직접 접촉해야 하며, 작가의 신체적 움직임에 의해 그 형태가 비로소 드러난다. 이처럼 온몸으로 대상을 느끼며 시각화 해내는 작업으로 작가는 바로 그 대상에 자신의 꿈과 욕망을 투영한다. 정명국은 자신의 작업 소재로 자동차를 택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자동차는 갑옷과 같이 우리를 보호해 주는 존재로, 위엄의 상징으로,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자동차는 가면과 같이 우리를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시켜주었다. 헐크로 변하게도 하고 수퍼맨으로도 변신하게 해 주었으며 선한 천사로도 변하게 해 주었다. 자동차는 악세사리와 같이 너와 우리를 꾸며주고 치장해주고 그 만의 공간에서 외부와 분리된 특별한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중략)”

다시 말해, 자동차는 오늘날 우리사회의 원초적 욕망을 함축하는 일종의 물신(Fetish)인 것이다. 또한 자신을 위장하며, 또 다른 자아를 꺼내들 수 있는 가면(Mask)과 같은 대상이다. 원시부족 사회의 여러 종교의식에서 신령, 악귀, 요괴, 동물 등으로 가장해 그 주력을 몸에 지니고 주술을 행하기 위해 가면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가면이 신과 인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한 힘을 갖고 있어서 사제가 가면을 착용함으로써 신과 인간의 세계를 매개해 주기도 했다. 현대인들에게 자동차는 바로 자본주의 시대의 대표적 아이콘으로서 부와 능력의 산물이자 꿈과 욕망의 대상이 되며, 실체가 아닌 허상으로서 끝없이 갈망하는 보이지 않는 힘, 권력의 상징이다. 오늘날 자동차는 신체의 일부가 되어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원시시대의 ‘주력’과도 같은 힘을 갖게 하는 일종의 가면인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자동차를 통해 두 가지 화두를 꺼내들었다. 하나는 바로 외부적인 요인으로서 ‘차’ 자체에 대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그 내면의 흔적들을 끄집어내는 ‘기억’에 대한 부분으로서 가족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화두를 위해 그는 ‘국내 최초 수제 스포츠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스피라’ 차량을 선택했다. 그가 특별히 ‘스피라’라는 차종을 선택한 이유는 국내의 중소기업인 어울림모터스에서 10여 년에 걸쳐 자체 제작에 성공한 그야말로 꿈과 욕망의 집결체이기 때문이다. 그 뜨거운 열정은 작가의 체온을 더해 그의 화면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그 차량의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그리고 옆모습과 뒷모습이 각각 실제 크기로 제작되어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자동차의 또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 모습은 흡사 동물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일찍이 보지 못했던 외계 생명의 모습 같기도 하다. 이러한 가면 뒤에 숨겨진 꿈, 열정, 그리고 욕망은 결국 작가 정명국이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업을 대하는 태도이며, 등신대로 떠낸 스피라의 표면은 그의 예술혼이 체화된 가면인 것이다.

이번에 그는 ‘가족’이라는 새로운 모티브를 자동차에 연결시켰다. ‘자동차’라는 하드웨어 속에 축적되어 있는 흔적들, 그 중에서도 정명국은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여행하고 함께 이동을 하면서 만들어진 추억과 소중한 추억들이 묻어나는 장소의 흔적을 종이 위에 떠내었다. 그 세월의 흔적을 작가는 자동차의 표면을 긁는 과정에서 하나 둘씩 들추어내는 것이다. 특별히 자신의 차를 프로타주한 작품은 칼라펜슬로 갈색 톤의 따뜻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 10년 넘은 세월이 묻어나는 자신의 자가용을 프로타주한 연필선 하나하나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이 시대의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진한 애착이 드러난다. 그는 또한, 유명인으로서 대중적으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인물을 찾던 중 가수 인순이의 자동차를 프로타주하게 되었다. 이번 프로타주 작업은 그의 가족들이 함께 참여해 공동 작업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그는 작가개인의 물리적 체험으로 이야기를 끄집어 내주는 마스터가 아닌, 자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되살릴 수 있도록 이끄는 가이드로서 역할하며 자신의 예술 영역을 확장시켰다.

그의 작품은 보는 이의 눈높이와 각도, 빛의 양에 따라 이미지가 어둡게 묻혀 사라지기도 하고, 금속성을 띤 반짝이는 표면으로 뚜렷이 드러나 보이기도 하며 옵티컬한 특성을 지닌다. 즉, 대상의 이미지는 한 가지로 고정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화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특수 조명장치를 사용하여 그 빛의 양에 따라 질감이 다르게 보이는 드라마틱한 효과를 연출하였다. 전시장을 둘러보던 관람객은 철판처럼 빛나는 흑연의 매끈한 표면이 순간 연필선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살아나 보이는 마술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 다시 말해, 관람자는 허상 속에 형태를 드러낸 그 대상 이면에 자리한 실체와 진실을 오가며 뜨거운 욕망, 따뜻한 기억 아래에 층층이 쌓인 이야기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가면 아래 감춰진 수많은 표정과 진실을 엿본 관람자의 희열을 가져다주며, 마치 역사 깊은 극장의 비밀스러운 대기실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