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형상이 주는 묵직한 존재감

장민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

회화란 기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특정한 태도의 표명이다. 서구에서 르네상스 이후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정확히 재현하려고 했던 시도를 제외하면 회화는 감정의 표현이든 변혁에 대한 주장이든 세계에 대한 특정 태도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옮겨 놓으려는 시도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계를 관찰자 중심으로 질서 지워 놓으려는 태도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회화가 과거의 회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제와 표현 방식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소통하기 원하는 바를 관람객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매체 특성과 표현방식을 다각도로 연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재헌은 인간 실존의 근원에 대한 탐구라는 전통적인 주제에 몰두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적절한 표현방식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 젊은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칫 음울하고 지루하게 보일 수 있는 주제를 관람객이 흥미를 가지고 집중할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재헌은 삶의 부조리와 고립감을 나타내기 위해 여러 가지 표현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초기 작업에서는 거친 드로잉과 자유로운 붓질로 대상의 존재감과 나약함을 표현하다가 2006년에 이르러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흐리기 기법을 이용하여 존재의 불안감과 공허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칠해 놓은 형상을 마른 붓을 이용하여 지우고 이것을 자신이 원하는 형상이 나올 때까지 반복함으로써 사라질 듯 희미한 형상을 만들어 역설적으로 강한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있다. 희미하게 지워진 형상 속에 묻어나오는 강한 붓질의 흔적이 존재의 허무함과 더불어 그 동안 살아온 삶의 역정을 느끼게 만든다. 초기 작품이 거친 붓질과 자유로운 드로잉으로 삶의 격정과 실존을 강조한 것에 반해 흐리기 기법을 사용한 작품들은 형상과 배경의 윤곽을 지우고 희미한 형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공간 속으로 사라져가는 존재의 유한성과 삶의 허무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번 전시 은 교통사고로 정신적인 장애를 겪고 있는 작가의 아버지가 주제이다. 작가는 아버지의 흐릿한 눈빛에서 알 수 없는 다른 세계로 홀로 여행을 하고 있는 여행자를 상상해낸다.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아버지를 연민의 시선을 넘어 인간 삶의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읽어내려고 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현재의 상황을 제 3자의 시선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2005년에 그려진 초기 초상화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을 단색의 거칠고 두꺼운 붓질, 그리고 마른 붓으로 흐리기를 반복하여 드러내고 있다. 2007년의 초상화에서는 흐리기 기법을 사용하기는 하되 배경을 몇 가지 원색으로 처리하여 형상과 배경을 명확히 분리함으로써 흐릿한 인물의 존재감을 강조하고 있다. 이전의 초상화가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고 상처받은 아버지의 상황을 부각시켰다면 원색 배경에 흐리기 기법으로 그려진 형상은 배경과 분리되면서 현실의 인물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에 머물고 있는 존재자로 보이게 만든다. 마른 붓질로 희미해진 아버지는 원색의 배경과 대비되어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초기 초상화에서는 형상과 배경이 마른 붓질로 모두 뭉개짐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아버지가 바라보는 부조리한 세계를 강조했다면 원색 배경의 초상화에서는 형상을 비현실적 공간에 위치시킴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거리를 둔 채로 존재자 자체에 집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재헌은 여느 표현주의 작가와 마찬가지로 신체와 물감, 붓과 캔버스가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긴장감 속에서 의도되지 않은 붓질의 흔적을 즐기지만 관람객에게 특정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 표현방식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병행한다. 그 한 가지 예로 작가는 관람객에게 강한 긴장감과 함께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강한 색채 대비를 이용하고 있다. 다소 어둡고 무기력하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에 긴장감을 주고 관람객의 집중을 유도하기 위해 마른 붓질로 지워진 형상과 생경한 색상의 배경을 병치시키고 있다. 강한 색채의 배경과 희미한 형상의 대비가 관람객의 시선을 이끌고 그 안에 희미하게 지워진 형상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있다. 희미해진 인물과 비현실적인 색채가 병치되면서 시선을 집중하게 만들고, 그 형상의 고립된 세계로 빠져들게 유도하고 있다. 마른 붓으로 불안한 형상을 만들어내고 생경한 색채로 가상의 공간을 구성함으로써 그 존재는 현실 속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가 된다. 또 다른 예로 작가는 강열한 색채의 대비와 더불어 점선이나 수학 기호를 인물 주위에 그려 넣어 아버지를 자신만의 독자적인 원리에 따라 생각하고 움직이는 인물로 연출하고 있다. 이것은 연민의 감정에서 한 걸음을 물러나와 관찰자 시점에서 인물을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초상화가 강한 붓질로 세상과 화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면, 낯선 원색 배경 속에 위치한 희미한 초상화는 세상과 유리되어 잊혀가는 존재의 고립감을 한 걸음 물러서서 보게 만들고 있다.

이재헌의 기본 관심은 인간의 탐구이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고통과 불안, 소외감을 강하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흐리기 기법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 전시된 아버지의 초상화를 통해 작가가 인간 실존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강렬하고 거친 붓질과 그 위에 희미하게 지워진 붓질,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생경한 색채의 절묘한 결합이 그 자체로 강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이 힘을 기반으로 젊은 작가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주제인 인간 실존의 문제를 묵직하면서도 신선하게 풀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