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촉수, 잊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기억과 감정의 투사로서 생명체 드로잉

장 민 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

백기은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드로잉 작업과 철사 조형물 설치 작업을 동시에 선보이고 있다. 전시장 1층에는 징그러우면서도 화려한, 그러면서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귀여움이 배어 나오는 세련된 터치의 드로잉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철사 고리를 하나하나 연결시켜 만든 생명체 형태의 조형물들이 천장과 벽에 매달려 있다. 1층에 전시된 미지의 생물체 형태의 드로잉 작업이 2층 천장과 벽에 매달려 있는 철사 조형물의 감상을 풍부히 해주고 있고, 그 반대로 2층 설치 작업이 1층 드로잉 작업의 내재적 의미를 강화시켜주는 형식으로 전시 구성이 이루어져 있다.

2층 전시장의 풍경을 먼저 기술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전체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듯 싶다. 창이 없는 폐쇄된 공간에 다양한 크기의 철사 조형물이 천장에 매달려 있거나 벽에 붙어 있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생물체와 유사하지는 않지만, 다리, 빨판 혹은 촉수를 지닌 몸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미지의 생물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생물체들은 철사 고리를 정교하게 엮어 만들어져서 생명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각각의 생명체들은 천장에 매달려 있다기보다 스스로 공간 속을 헤엄쳐 다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그 미지의 조형물들은 그 생김새가 기기묘묘하기 때문에 그 각각은 모두 무대의 주인공처럼 그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 전시 공간에 들어선 관객들은 깊은 바다 속에서 우연히 신세계를 만난 것처럼 황홀한 경험을 하게 된다. 각 조형물들은 각각 하나의 생명체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주장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평화롭게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설치 공간은 우리에게 태고의 심해 속의 신비감을 주면서 모체의 자궁처럼 편안함을 제공해 준다.

철사를 세심하게 엮여 만든 생명체의 모태는 1층의 드로잉 작업이다. 백기은 작가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화려하면서도 낯선 미지의 생명체를 그려낸다. 생경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장난기 많게 보이는 개별 생명체를 작가는 인내심을 가지고 정교한 터치로 그려낸다. 그 생명체는 자기 나름대로 꼼지락 거리며 자기 증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생명체들은 화려함과 촌스러움, 귀여움과 혐오스러움의 경계에 서서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자신의 삶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그 생명체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감관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눈이나 귀 같은 보편적인 기관이 아니다. 이 생명체들은 하나 같이 촉수, 혹, 빨판 등과 같이 세상과 독자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소통 방식을 가지고 있다. 서로 간에 이해를 전제한 소통 방식이 아니라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세상이 반기지 않지만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미미한 생명체처럼 그 생명체는 자기 증식을 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백기은 작가의 드로잉 작업의 출발점은 자신의 기억이다. 그는 지난 과거의 애틋하고 그리운 감정을 드로잉 한다. 그는 무엇을 그릴지 미리 계획을 세우고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발견된 집안의 흔적이나 얼룩에서 옛 기억의 단서를 찾아내어 그 기억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드로잉을 발전시켜 나간다. 마치 하나의 줄기 세포가 분열하여 한 생명체를 이루듯이 기억의 흔적은 상상력의 도움으로 하나의 완결된 기억으로 재조합된다. 어린 시절 추억 속에 남아 있는 바닷가의 하찮은 동물들이나, 자신이 정성 들여 길러왔던 고양이나 토끼에 대한 추억을 반추하고, 그 동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위를 섬세한 필치로 강조하고 확장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완성해 나간다. 우리의 기억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새로운 생명체는 작가의 현재의 감정이 투사되면서 각각 독특한 형태로 변형된다. 생명체는 기억의 흔적으로 잉태되어 현재의 감정과 상상력이 투사됨으로써 각기 다른 형태의 생명체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 하나하나의 미지의 생명체는 그때그때의 기억과 감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과 감정이 생물체 드로잉으로 대체됨으로써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면서 자기 증식을 하게 되고, 작가의 기억과 감정은 생물체의 힘을 빌려 그 자체로 완결된 형식이 된다. 작가는 추억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보다 생물체 이미지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특정 기억을 섬세하게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에게 있어 생명체 드로잉 작업은 자신의 기억의 탐구 과정이면서 현실에 대한 감정의 투사 가능성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백기은에 있어서 드로잉이나 철사 조형물 모두는 그가 경험한 세상에 대한 무의식적인 표현에 다름 아니다. 작가의 경험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억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그림일기이자 고유한 개별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의 작품에 대해 생경함 속에서 낯익은 부분을 발견하고 사랑스럽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와 어느 정도 공유된 세계를 살고 있다는 증표이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낯선 생명체의 모습과 귀여움을 느끼게 만드는 촉수나 혹, 사마귀 등의 절묘한 결합이 우리로 하여금 그 생명체에 몰두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힘을 통해 우리는 백 작가의 내밀한 사적인 세계로 빠져볼 기회를 갖게 된다. 그의 낯설면서 화려한 생명체에서 언뜻 언뜻 나타나는 사랑스러운 모습과 생동감을 통해 세상을 향한 작가의 따듯한 시선을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2층에 세심하게 배열된 미지의 생명체들은 작가가 지금까지 바라보던 세상에 대한 사랑스러운 기억과 관심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경에 몰두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미미하지만 가치 있는 삶의 흔적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