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에 그려진 표피의 의미

박재웅 작가는 표피를 그린다. 그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연히 피부이다. 그는 어느 썩다가 끝내 말라버린 채소나 주름을 잔뜩 머금은 노파의 무뚝뚝한 표정까지 피부의 어떤 질감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표면을 그린다. 이들을 드러내는 피부들은 하나같이 겉을 둘러싼 표피라는 측면에서 유사하게 보인다. 말라가는 채소들의 껍질이든, 고구마줄기이든, 노파의 껍데기든, 무슨 연유에서인지 힘껏 부여잡은 손들의 주름이든 서로 아무 상관없이 버석하게 말라있는 듯 하나 그들은 무척 엄밀하게 닮아있다. 그러나 이 닮음은 단지 껍질이나 피부라는 어떤 분류로 인한 닮음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수분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자신의 내부를 외부로부터 단단히 지켜내고 있는 찌글거리는 표면이라는 점에서의 닮음이다. 이러한 닮음은 감각에 이해서 육감적으로 생산된 것으로, 공간들에 흐르는 어떤 파장이 고스란히 옮겨지면서 패인 흔적들에 의한 닮음이다. 작가는 그러한 표면을 포착하여 그린다. 그래서 이 표면은 그저 겉을 덮고 있는 선물포장이나 안을 감싸고 있는 봉투가 아닌, 내부와 분리되지 않은 채 외부의 어떤 작용을 감당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자코메티는 조각에서 최소한의 수직으로 인간의 실존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렇다면 회화에서 실존을 최소한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회화가 삼차원의 이차원적 표현이라면 화폭의 표면에 스며들어있을 정도로 아주 바싹 닿은 채 형상에 필요한 만큼의 색만을 칠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공간의 빈틈을 메우고 서있는 형상처럼, 아주 평평하게 그래서 마치 아주 두꺼운 세상과 맞닿은 화폭의 이면과의 사이를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조각에서 자코메티가 추구했듯이 골격을 향한 납작한 수축의 힘을 회화에서는 가끔 실존적인 삶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표현하는 화가들을 목격하는데, 박재웅은 그러한 화가중의 한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보면서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가을바람이 볼을 스치듯 그의 화폭을 스치듯 칠해진 붓질을 단순히 붓질의 움직임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화가의 움직임의 차원이 아니라 화폭에 드러난 실존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려진 사물들이 죽어있든 죽어가든 그들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화가로서 그는 채소든 아저씨든 노파든 자신들이 처한 삶의 지탱점에서 견고하게 자신을 지키면서 화폭 속으로 들어가 있는 그 형상을 포착하기 위해 온종일 관찰하고 붓을 든 손을 숱하게 망설였을 것이다. 그렇게 표현된 움직임은 죽어있는 사물의 껍질까지도 진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이는 땅을 향한 수축의 움직임이자 죽어서 편하게 쉬고자 하는 의지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 박재웅 작가의 소재는 크게 인물과 정물로 나뉜다. 베이컨이 프로이드를 그렸고 세잔이 그의 부인을 그렸듯이 인물화가들은 주로 주변인물들을 그린다. 그처럼 박재웅도 주변인물들을 그린다. 인물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경우는 초상화일 경우인데, 그럴 경우에도 시대를 초월한 숱한 초상화가 그러하듯이 벨라스케스의 교황처럼 결국 그 인물의 인물됨을 그리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해, 특정인물이 등장할 경우 그 인물이 되게 하는 것은 그의 이목구비 위치가 정확하게 옮겨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를 그이게 하는 모든 상황들이 화폭에 옮겨짐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화가가 인물을 그리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를 그이게 하는 모든 것을 그 인물을 통해서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살아가는 자와 죽어가는 자의 힘껏 움켜진 손아귀의 힘을 고스란히 드러낸 손의 주름들처럼 박재웅의 인물들은 그의 주변인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개별적이겠지만, 삶의 지탱점에서 화폭을 통해 드러난 피부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물을 통해 지어미와 아비를 본다거나, 이내 죽은자의 맨들거리는 피부를 본다. 인물이 그렇듯 정물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의 순차를 거스르지 않고 소멸되는 정물들은 무슨 웅성거림이 들리는 듯 일렁거린다. 수분이 다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도 마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목 물린 토끼의 검은 눈망울처럼 그 정물들은 너무 당당해 보인다. 정물은 말그대로 정지된 사물이다. 채소는 식물종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동력이 약하다고 해서 가장 낮은 단계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채소역시 정물의 대표적인 소재일 수 있겠지만, 박재웅의 화폭에서는 시간차로 분할되어 있어서 인지 세계의 기운을 드러내는데 큰 몫을 하고 있어 보인다. 보는 이로 하여금 생생할 때부터 완전 죽어서 지하를 갈구할 때까지의 그 간극을 잇게 하는 이유도 있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그렇게 변해가는 지점에서 변하게 하는 원인을 보이게 하기 때문에 그 힘을 연상하게 하여 우리의 표정이 일그러지게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물은 회화에서 동적인 사물의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의 층위를 머금은 채로 정지되어 있거나 깊이를 지닌 평면이라는 점에서 회화에서 유난하지 싶다.

박재웅 작가의 그림을 보면 마치 대기의 푸른 유리병이거나 프뤼프버섯의 검정색, 또는 입가로 흐른 빛바랜 포도주의 맑음처럼 맑다. 시간에 나약한 삶의 무뚝뚝함에 운동성을 동반한 맑음의 생명성을 부여함으로써 기의 흩어짐을 대하는 그의 의연한 태도를 느끼게 된다. 실존을 몸서리치게 표현하고자하는 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 본다.


박순영(프로그램매니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