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기 원 1978년 서울, 현재 한국에서 활동
학 력 사 항 2009 런던예술대학, 첼시컬리지 오브 아트 & 디자인, 미술학부
2006 더 아트 유니버시티 컬리지 본머스, 파운데이션 디플로마 인 아트 & 디자인
개 인 전
2012 홍기원 개인전, Brain Factory, 서울, 한국 2011 From one place to another, 뒤셀도프시 문화원과 Galerie Plan.D, 독일
기 획 전
2013 빙고(氷庫)! 쿠바냉장고로 시작된 일상 & 미술이야 - 흐르는 일상, 세종문화회관, 한국
감각의 위치, 쿤스트 독 갤러리, 서울, 한국
Dematerialization & Materialization, 이영미술관, 수원, 한국
나에게 너를 보낸다: Move and Still,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한국
Interpenetrate, 창동스튜디오,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2012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7기 오픈스튜디오, 한국 저절로 돌아가는 기계, Artspace Hue, 한국 Artroulette, Flameless Gallery, 런던, 영국 2011 Translated, 국립 창동스튜디오 와 한국 국제교류 문화재단, 한국 Light space project, Seascape Gallery, 치앙마이, 태국 Open studio, 고양 창작스튜디오,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Gold Fieber, SNO Gallery, 시드니, 호주 Intro Show, 고양 창작 스튜디오,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2009 Supervisions, 영국문화원과 주 영국한국문화원, 런던, 영국 This is why we meet - 1 & 2 , 와이든 + 케네디, 런던, 영국 BA (Hons) Fine Art Degree Show, Chelsea College of Art & Design 졸업전시, 런던
2008 In the Shadows, The Crypt Gallery, 런던, 영국 Twelve steps down, Shordeitch Town Hall, 런던, 영국 2007 Play Contra, Nolias Gallery, 런던, 영국 레지던시 경력
2012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레지던시 입주작가 (7기) Augarten Contemporary, 레지던시 입주작가, Belvedere 미술관, 비엔나, 오스트리아 2011 뒤셀도프 문화원, 국제교환 레지던시 입주작가, 뒤셀도프, 독일 국립현대미술관, 고양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7기)
기 금
2012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수 상 경 력
2009 Chelsea Graduate Prize (첼시졸업상): 6개월 레지던시, 워크스페이스 그룹, 런던 2006, 2009 Celeste Art Prize
프로젝트
2012 아르코 신진작가 워크숍 2011 진안 고원길, 진안군 & 문화관광부
어쩔 수 없는 움직임
예상과는 달리 그리 크지 않은 공간. 작품보다는 소품(?)들로 보이는 용품들이 가득하다. 벽면을 돌아보니 기계도면 같은 드로잉들이 빼곡하다. 눈에 익숙한 몇몇 오브제와 이들 드로잉이 없었다면, 이곳은 일견 잡동사니들의 보관 창고로 보였을 게다. 헬스클럽 같은 넓은, 활짝 펼쳐진 공간에 운동기구 같은 것들이 즐비할 것이라는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소박한 홍기원의 작업공간이다.
입구에 놓인 작은 작업테이블 위에는 설치, 혹은 작품의 작동구조계획이 담겨 있는 노트pc 맥프로와 작은 드로잉이 제법 수북하다. 작업실 안쪽에는 유럽의 어느 라디오방송이 흘러나오는 아이폰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누군가 자기를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표정의 소품이 몇 점이 자리하고 있다. 작지만 개성 강한 취향이 넘치는 공간이다. 몸뻬(일바지)처럼 보이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이들 사이에서 가능한, 비교적 제한된 동선을 분주하게 오가며 홍기원은 작업에 한창이다.
작업실을 소개하는, 작업 과정을 전하는 그의 모습과 동선을 캠코더의 눈이 되어 따라잡아 보았다. 조명 없이 말이다. 이를테면 쥐불놀이를 상상하면 될 것이다. 그의 움직임은 쥐불놀이하는 어린이들이 밤하늘에 남겨 놓은 궤적처럼 흥미롭다.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인 홍기원의 제스처는 독특하다. 적당히 기른 머리를 좌우로 크게, 자주 쓸어 넘기는 버릇과 일반인에 비해 여운을 크고 깊게 남기는 그의 전체적인 몸동작, 말투는 남다른 개성과 매력을 풍긴다.
홍기원 작업의 특징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만든 이의 제스처와 스타일만큼이나 독특하게 움직인다. 크게, 작게, 복잡하게, 단순하게, 슬프게, 기쁘게, 힘 있게, 느리게 움직인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이른바 키네틱(kinetic)하다. 주지하다시피 키네틱한 작품들은 철저하게 외부의 동력에 의해 작동한다. 그것이 바람이든, 전기든, 수력이든, 태양열이든, 사람의 힘이든 말이다. 누군가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이들 작품은 어떠한 움직임도 가질 수 없다. 불편한 진실이다. 키네틱 아트 대부분이 과학적인 힘과 프로세스를 응용했다면, 홍기원의 그것은 무척이나 원시적으로 보인다. 더 없이 단순하고 초보적인 구동원리로 작동한다. 따라서 정교하고 현란한 움직임이 아닌 보잘 것 없는 몸짓을 연출한다. 좋게 보아 군더더기가 없다.
이러한 홍기원의 작업은 계획된 프로그램, 혹은 계획된 틀 안에서 극히 제한된 움직임을 보인다. 작업실은 물론, 일상의 삶 속에서의 우리네 제한된 동선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그의 작품에서는 규칙적인, 때론 불규칙적인 일정한 리듬, 운율, 움직임이 목격된다. 이상야릇한 소음과 함께 삐거덕거리기도 하고 자주 덜컹거린다. 관람시야를 넓게 고정시키고 꼼꼼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들이 관전의 키포인트다. 정확히 말하면,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움직임의 궤적이다. 장(長)노출의 사진술로 흔히 따라잡을 수 있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궤적이다. 그러나 그 느낌은 왠지 어설프기도 하고 때론 슬프기도 하다. 세련된 느낌보다는 비장하고 처절한 느낌마저도 든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서로 앞을 다투어 최첨단, 초정밀을 넘어 징그러울 정도로 정밀한, 가공할만한 이른바 '레알'(real)을 선보이고 있지 않은가?
홍기원의 작업과 삶이 선사하는 총체적 퍼포먼스는 마치 순수 아마추어 밴드의 공연을 보는 듯하다. 기존의 곡을 디지털로 리마스터링한 전자음악이 아닌, 철저하게 아날로그적인 편집과 신시사이저(synthesizer) 등을 일절 배제한 어쿠스틱 밴드와도 같은 생생한 느낌을 준다. CD보다는 LP의 느낌이다. 짜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고 그저 담백하다고나 할까. 판타지의 끝을 보여주는 4D영화가 아닌 소극장의 연극을 코앞에서 보는 듯하다. 감각적인 오브제와 이미지들을 총동원하여 공간을 의무적으로 꽉 채우는, 잔뜩 널브러져 있으나 공허한 느낌이 앞서는 것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각적 사고를 경험케 한다. 현란하다 못해 허무한, 뒷맛이 개운치 않은 설치작품들이 설치는 세상에서 분명 다른 차원의 움직임을 제시하고 있다. 설렁설렁 이가 빠진 듯하지만, 강한 흡입력으로 뭔가 뿌듯하게, 가슴 속에 뚜렷하게 자리하는 여운을 남긴다.
홍기원의 움직이는 작업에 그의 독특한 사고와 스타일을 중첩해보았다. 홍기원의 작업은 무언가를, 어떤 생각을 구체화하려는 일념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자신의 육체적 수고와 사고의 흐름을 최소한의 물리적 구성요소로 압축, 혹은 환원시켜 놓은 것이었다. 단순하고 재미있게 보이는 그의 작업이 다소 난해하게 생각되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만족할 만한, 똑 떨어지는 결과라기보다는 과정, 즉 작업의 동선, 삶의 동선을 담아낸 것이다. 이를 테면 관객은 작가의 의도된 연출과 오브제들의 움직임에 의해 비슷해 보이지만, 매회 다른 퍼포먼스를 지켜보며 적극, 또는 소극적으로 동참하는 동지, 파트너인 셈일 것이다.
홍기원이 공간을 크게 휘젓듯이, 공간에 묵직하게 개입하며 다소 확장, 과장된 움직임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이유는 무얼까. 이러한 그의 작업은 예기치 못한 대형사고로 인해 한시적으로 경험했던 개인적 신체의 부자유(하반신 마비)에 대한 아픈 기억으로부터 비롯했다. 아마도 많은 이가 이러한 크고 작은 신체구속의 부자연스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홍기원의 그러한 사적 경험은 개인과 개인, 혹은 사회, 국가 사이의 갈등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빈부, 사회보장, 인종차별, 폭력, 이념대립, 전쟁과 같은 '몸'을 둘러싼 공적환경이나 제도 등과 관련한 장소/의제특정적인(site/issue specific) 작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 자의와 타의, 자율과 타율, 몸과 맘, 내부와 외부, 고국과 타국, 들숨과 날숨 등 몸을 둘러싼,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세상을 조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움직임과 오브제들이 빚어내는 소리는 장조(長調), 혹은 단조(短調)일 수도 있고 때론 위령(慰靈)미사를 연출하듯, 또는 레퀴엠(requiem)을 들려주는 듯 보는 이의 경험과 설치된 장소에 따라 다양한 공명을 일으킬 것이다.
그가 수집한 이런저런 물품들은 삐까번쩍하지 않다. 약해보이고 어수룩해 보인다. 이들을 서로 이어 붙이기라고 할라치면 정교하게 맞물리지도 않는다. 부정교합이 대부분이다. 덜커덩, 삐거덕 소리를 낸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협화음은 아니다. 불완전한 움직임도 아니다. 다소 어색하고 불편한 움직임일 뿐이다. 그의 작업은 최첨단의 기술적 허용오차를 따르지 않는다. 수공적인 편차를 가능한 허락하고 용인하는 대단히 인간적인 조립물이다. 이 과정에서 홍기원의 역할은 정해진 대사와 움직임, 이동 동선을 이들에게 전달한 후 멀찍이서 지켜보는 연출 감독과도 같다. 그의 작업은 이른바 무인 연극인 셈이다. 드로잉은 희곡이고 배우는 작품이다. 연극 연출과도 같다. 이른바 '삑사리'가 정겨운 노래를 작사, 작곡하여 공연으로 선보이며, 음반으로 남기려는 원맨 밴드의 리더이자 작곡가, 작사자인 셈이다.
잡동사니를 가득 모아 놓은 창고는 무슨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장소라도 되는 듯 이런저런 사물들이 즐비하다. 구경하는 관객의 눈에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을 내부 골조, 혹은 골격을 주조하듯 결합하는 비밀 조립라인처럼 보인다. 그의 조립라인은 전술한 것처럼 단순하고 투박하다.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분해한 다음, 완전하게 다시 조립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처럼. 그리하여 그것을 버리거나 던져 버리는 아이처럼. 관심과 쓰임새를 상실한 채 어른들로부터, 기성으로부터, 제도로부터, 권력에 의해 용도 폐기된 용품들이 대부분이다. 홍기원은 그것들을 다시 기능하도록, 재치 있게 그러나 역시 한편으로는 볼 품 없게 제시한다. 다시 이야기를 짜 맞춘다. 마치 망가진 무언가를 다시 작동 가능한 위치로 자리매김하려는 듯 말이다. 그러나 홍기원은 이들을 신비한 구조로 재창출하는 연금술사라기보다는 이들을 어루만지고 이들과 속 깊은 얘기를 나누며 이들이 세상구조 속에서 기능할 수 있도록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과 전문의와도 같다. 이를테면 트랜스 조각가인 셈이다.
홍기원의 작업은 자신의 그러한 힘들었던 경험과 자그마한 조립장난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말을 건네면, 행동을 건네면 정해진 몸동작을 보여주는 작은 장난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장난감들은 대부분 관절을 가지고 있어 투박하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자유로이 움직이며 이런저런 몸동작을 선보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홍기원의 만지고 주무르는 행위를 받아주는 장난감. 그의 동력을 받아 전달하는 장난감의 움직임은 당연 사람처럼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단순한 전달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대부분 부자연스러운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신체가 물리적으로 부자유스러웠던 시기에 연출된 작가 자신의 모습도 중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운동기구가 오브제로 많이 등장한다. 재활운동, 체육과 관련된 도구, 체중계 등이 등장한다. 전체적인 모습도 운동기구를 연상시킨다. 전시장은 일종의 놀이 공원이다. 실제 운동기구 속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동작이나 표정은 그리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어 보인다. 가쁜 숨과, 고르지 않은 심장 박동이 들린다. 사운드를 직간접으로 경험케 하는 오브제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소 시끄럽기도 하다. 듣기 불편한 소음이 발생하기도 하고 정신 사나운 움직임도 더한다. 운동 마니아이거나, 사고, 혹은 운동을 할 수 없을 만큼 거동이 불편했던 시기에 물리치료, 이른바 견인이라든가 재활치료에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사람의 골격과도 같은 오브제들에 하나둘 근육과 살, 힘줄을 이어보면 일정한 유기체의 형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형태와 그들이 선사하는 이야기를 접하는 재미도 색다른 관전 포인트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홍기원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대단히 투박하며 시각적인 요소와 함께 청각적인 요소도 강하게 개입하고 있지만, 여전히 건재하다는 메시지, 죽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치 작업들은 아날로그적인 사이보그처럼 보인다. 작품 구성 요소 일부는 신체기관, 소화기관, 호흡기관 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형태나 색감은 그러하기에 충분하다. 홍기원은 이들 오브제를 통한 퍼포먼스, 즉 공간과의 적극적인 관계실험을 선보인다. 색깔은 원색보다, 비록 그것이 멀티칼라이긴 하지만, 주로 파스텔 톤으로 주조되어 있다. 파스텔 톤 색이 많은 이유는 일종의 불편함, 어색함 등을 위장하기 위한 화장술, 분장술로 이해된다.
오브제들은 물리적 선후와 시차를 두고 출몰한다. 연극,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는 무대 공간을 보는 듯하다. 홍기원의 설치는 3차원의 공간에 드로잉을 하듯 움직임의 궤적을 드러낸다. 공간을 가르는 소리. 동력이 전달되는 과정 등을 고스란히 노정한다. 원하던, 원치 않던 움직여야만 하는, 억지 움직임도 일부 경험케 한다. 다소간의 불편을 경험케 하는 홍기원의 작업은 이 편한 세상에서 그러한 불편이 우리 주변에 엄연히 상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업에는 이렇듯 시간성과 공간성이 상존하며 충돌한다. 상호 신뢰회복과 합일점을 찾기 위한 노력일 수도 있다. 그 가능성, 지점을 도출하려는 개인적인 노력이기도 하다. 그것은 육체적인 화합, 재활이 아닌, 심리적 화해와 상처를 치료하려는 정신적 멘딩(mending)을 의도하고 있다.
홍기원은 현란한 유혹기제를 더하지 않았다. 그의 작업은 일체의 군살이 제거된 듯 골조만 앙상하게 남아 움직인다. 골조나 뼈대 위에 살을 더해나가거나 덩어리 속에 감추어진 일정한 형태를 찾아들어가는 것이 조각의 본래성이다. 그러나 홍기원은 일체의 고정관념을 걷어내고 앙상한 골조만을 남겨 두었다. 또한 운동기구나 놀이기구가 가볍고 경쾌하고 시각적 스펙터클을 상상, 혹은 연출하게 한다면 홍기원의 그것은 다소 무겁고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동어반복적인 움직임, 답답하도록 단순한 주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신체의 움직임, 움직임의 커다란 궤적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우리네 움직임, 우리네 삶의 표정과 그것이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거친 호흡을 고르며 하나둘 이어가는 심장의 처절한 박동을 눈과 귀로 경험하게 한다. 식어버린 심장과 느낌이 없는 박동의 존재를 일깨운다.
홍기원의 작업은 세련된 미감과 정교한 움직임과는 거리가 멀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세상. 변화무상한 현대과학문명사회에서 가장 단순한 움직임, 예상 가능한 결과를 목도하게 한다.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느껴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홍기원의 작업은 투박한 움직임과 실제 소음을 감추지 않는다. 계획적인 연출임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단순하기 그지없다. 정교해 보이지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면을 걷어내면 실상 단순하기 짝이 없는 우리네 삶과도 닮았다. 우리네 삶의 동선을 그래프로, 물리적 변위로 나타내거나 환원한다면 아마도 이와 같을 것이다. 복잡다단해 보이는 인간사. 몇몇 형식으로 묶을 수 있는, 누군가 정해 놓은 삶을 살아가는 인생사.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찾고 다양한 조합을 이루며 장관을 연출해내지만, 기실 별 것도 없는 세상 아닌가.
고도화된 과학세상.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정교함이 갑인 세상. 치밀하게 은폐된 감시체계 아래 모르는 척, 아는 척 살아가는 요즘. 홍기원은 몸의 원초적 움직임을 돌아보게 한다. 원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없도록 계획된 가공할만한 연출세상 속에 삶이 존재하고 있음도 돌아보게 한다. 고도로 계획된 계몽사회. 누군가의 도움, 자발적 의지가 아닌 외부의 힘과 동력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움직일 수밖에 없는 답답함, 혹은 의지의 상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작품은 희화화되어 있지만, 슬픈 현실이다. 그의 작업은 정교하게 틀 지워진 사회에서, 비인간적으로 작동하는 가공할 인공의 힘에 의해 인간의지를 상실하고 있는 신경계와도 같다. 그럼에도 그는 투박하게 그러나 정해진, 약속된 움직임을 잊지 않고 보여준다. 어느 하나가 작동을,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커다란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는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음이다.
홍기원 특유의 공감각적인 연출이 선사하는 변위(變位)는 그의 작업이 단순 행위적 동어반복을 넘어 이 세상과 분명하게 관계하는 위상학적인(topological)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브제들이 바라는, 또는 피하고 싶은, 외부 동력에 의해 선사하는 아리스메틱(arithmetic)한 움직임은 홍기원만의 독특한 가능성이자 일정한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신의 리버럴한 스타일과는 달리 작품스타일은 다소 엄격하다. 좀 더 유연한, 확장된 디벨롭도 필요하다. 작품들을, 오브제들을 이제는 어느 정도 풀어주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매력은 매력으로 작용해야지 그것이 일정한 제약으로 읽혀지면 답답할 것이다. 홍기원 특유의 인간적 스타일을 드러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어쩌면 지금의 작업들이 작금의 홍기원을 효과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박천남(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Tcheon-Nahm PARK(Chief Curator, Sungkok Art Museum)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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