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금은 캔버스 회화에서 탈피하여, 흰 목재나 검은 금속 패널 위에 인조진주나 쇠구슬 등을 매체로 텍스트의 내용을 탈각시키고 물질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초기에는 못, 실, 천, 왁스, 실리콘 접착제 등 표면과 바탕의 긴장관계를 높이는 물건들을 오브제로 사용하거나, 털실로 뜨개질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신문기사, 시, 소설, 대중가요, 선언서, 법전 등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를 선택해 작품을 문화, 사회적 현상을 은유하는 상징물로 부각시킨다. 알파벳, 한글, 한자 등 문자를 진주알로 대체하고 단어 사이의 공간은 빈틈으로 남기는 과정 속에서 텍스트가 간직한 서정성, 통속성, 현대성 등의 정서는 진주알의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글자는 진주알로 번역, 전이되기 직전의 소재에 불과하다. 글자는 전달해야 할 내용을 버리고 대신에 한 줄, 한 페이지 쓰인 글자 수의 정확한 셈으로 전치된다. 내용이 사라진 글자, 의미의 차원에서 형태의 차원으로 옮겨진 글자는 시각성(visuality)으로서만 존재한다. 말이 의미를 발생시킬 때 숨어버리는 글자들의 차이, 간격, 공백이 진주 배열의 리듬에 의해 드러난다. 작가의 작업 도구는 아크릴 물감을 백 번 가량 덧칠한 나무 패널, 그 위에 부착된 모눈종이, 직각자, 4mm 인공진주알이 담긴 플라스틱 그릇, 글루건, 핀셋이다. 작가는 읽은 책 중에서 자신에게 결정적인 인상을 남긴 부분을 필사한다. 패널의 크기와 진주가 대체할 글자의 수를 결정하고, 모눈종이와 직각자로 정확하게 여백을 이룰 패널의 외곽을 조정한다.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배치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시각적 조형성이나 심미성이다. 필사와 진주붙이기는 글자의 수와 글자들 사이의 간격을 기준으로 진행된다. 문장의 의미론적 맥락이 사라지고 대신에 형태론적, 시각적 조형성이 나타난다. 고산금의 작품은 읽을 수는 없지만, 작가가 읽은 모든 글자는 이미 보이는 노래, 들리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무수한 활자를 흰 색 진주로 대체한 작품들은 삶의 이야기에 대한 ‘번역’인 동시에 눈의 기능에 대한 ‘반역’을 시도한 작업이기도 하다.
고산금(1966― )은 1988년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1991년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수학하였다. 2007년 ≪Mist of signs four≫(갤러리 선컨템포러리), 2007년 ≪Mist of signs three≫(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2011년 ≪Typography+Trans literation≫(닥터박갤러리), 2012년 ≪오마주 투 유≫(갤러리 선컨템포러리) 등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2009년 ≪숨비소리≫(제주도립미술관), 2010년 ≪The Shape of Time≫(여수국제아트페스티벌), 2010년 ≪백색의 봄≫(서울대학교미술관), 2010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관찰하기≫(사비나미술관) 등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2006―2007년 국립고양미술창작스튜디오 3기, 2008년 노마딕 아트 레지던시(몽골), 2010년 경기창작센터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하였다. 1991년 제13회 중앙미술대전 특선, 2008년 포스코스틸아트어워드 입선했으며, 2007년 월간조선 현대작가 55인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