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속삭임이 울림으로: 한국 구상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다
서울시립미술관은 2024년 한 해의 끝자락에서 《박광진: 자연의 속삭임》을 개최한다. 박광진(1935년생)은 한국 구상 회화사의 발전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홍익대학교 회화과 재학 중 1957년 《제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국보(國寶)〉로 특선을 수상한 이후, 작가는 화단에서 사실적인 화풍과 섬세한 묘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2000년대 이후에는 완숙기에 접어들며 그 단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시 제목 《자연의 속삭임》은 “자연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내게는 들려온다. 그런 감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비롯되었다. 자연의 소리를 화폭에 어떻게 옮길지 고민한다는 말이 작가의 예술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번 전시에서는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과 작가의 대표작 중 117점의 작품을 선별하여 '탐색: 인물, 정물, 풍경', '풍경의 발견', '사계의 빛', '자연의 소리'라는 주제로 나눠 선보인다. 이를 통해 작가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점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 섹션인 ‘탐색: 인물, 정물, 풍경’에서는 한국 구상미술의 새 지평을 여는 데 기여한 이봉상, 손응성, 박수근 등의 영향을 받으며 여러 소재를 대상으로 예술적 방향성을 모색하는 과정을 다룬다. ‘풍경의 발견’에서는 작가가 점차 풍경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포착한 여러 경관을 살펴본다. 그는 1967년부터 1990년대까지 농촌과 도시 주변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세계 각국의 명소를 탐방해 작품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사계의 빛’에서는 작가가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그린 한국의 순수 자연을 섬세한 빛의 묘사를 통해 사실적으로 담아낸 풍경화를 선보인다. 후기 작품이 온전히 자연을 다루되 작가의 주관적 감상을 가미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군은 그의 예술 여정에서 가교 역할을 한다. 특히, 물에 비친 자연경관을 담은 풍경화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자연의 소리’에서는 1990년대 이후 작가가 제주에서 자생하는 억새와 유채를 대상으로 “집약되고 응축된 화면을 보여주고자” 새로운 구상미술의 가능성을 여러 측면에서 모색했던 시기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화폭 전면에 중심 소재인 가을 억새가 세밀한 붓질을 통해 입체적으로 부각되어 제주 가을의 빛과 바람을 감성적으로 담아낸다. 더하여 개체의 소리를 형상화하고, 나아가 자연 현상 고유의 리듬과 박자를 표현하기 위해 화폭에 가느다란 세로선을 도입한다. 그리고 일부 작품에서 중경(中景)이 생략된 채 원경인 나무와 산은 형태를 유지하지만 근경인 유채꽃은 뭉개어 덩어리지듯이 보이는 표현 방식은 작가만의 독특한 조형적 어법이다.
정물, 인물, 풍경 등 구상회화의 여러 장르에서 풍경으로, 갖가지 풍경 중 순수 자연으로, 자연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응집되고 축약된 표현으로 변모를 거듭해 온 박광진의 예술 세계는 ‘자연의 속삭임’에 응해 작가가 화폭에 그려나간 평생에 걸친 대답인 듯하다. 그리고, 그 응답은 현재진행형이다. 90세를 눈앞에 둔 작가의 이러한 행보는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