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2012 헌터 칼리지 종합매체 졸업, 미국
2009 헌터 칼리지 순수미술 졸업, 미국
2003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개인전
2018 《2018 아트선재 프로젝트 #3: 이윤이 - 내담자》, 아트선재 프로젝트 스페이스, 서울
2014 《두 번 반 매어진》, 인사미술공간, 서울
주요 단체전
2017 《러브 스토리》, 아마도 예술공간, 서울
2016 《푸쉬, 풀, 드래그》,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서울
2016 《유명한 무명》, 국제갤러리, 서울 《헤드론 저장소》, 교역소, 서울
2015 《여기라는 신호》, 갤러리 팩토리, 서울
2014 《Upon The Skin》, 49B Studios, 뉴욕
2013 《Optic Nerve 15》, 북마이애미 현대미술관, 플로리다
2013 《Facts and Fictions》, 인비져블 독 아트 센터, 뉴욕
2012 《VOX VIII: Annual Exhibition of Emerging Artists》, 복스 포퓰리 갤러리, 필라델피아
수상
2018 두산연강예술상
기금 및 레지던시
2018 2018 SeMA 신진미술인 전시지원 프로그램
2018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
2015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2014 아르코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
2013 스코히건 회화 & 조각 학교, 미국
2012 소마 썸머 레지던시, 멕시코
출판
2018 『내담자』
2015 『두 번 반 매어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4 『날개 없이 나는 빨간 새를 보았다 다가갔을 때 그것은 총알이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윤이 《내담자》 : 절반의 기능
방혜진 / 비평가
1.
두 동강 난 형상들. 본래의 기능을 배반하는 사물들. 《내담자》 전시장을 구성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이를테면 기둥. 그것은 건축적 용도에 의해, 상부의 하중을 지탱하는 수직재로 정의된다. 지면으로부터 천정을 잇는 수직력은 기둥을 기둥일 수 있게 하는 핵심이다. 《내담자》에서 아트선재센터 로비의 원형 기둥을 모방한 오브제들은 지면과 천정 중 어느 한 쪽에만 맞닿은 상태로, 즉 원기둥의 상단부나 하단부가 싹둑 잘려나간 채, 무용하게 안개를 내뿜거나 덩그러니 허공에 매달려 있다. 천정의 하중 지탱이라는 기능이 결여된 이것을 기둥이라 할 수 있을까. 하나의 온전한 기둥이 아니라면 하다못해 ‘절반의 기둥’이기는 할까.
무언가의 절반이 잘려나가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두 동강이 난 이 거짓 기둥들에 작가가 부여한 이름은 흥미롭게도 <귀의 말>이다. 귀의 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청력기관인 귀가 수용하여 신체 내부로 전달하는 외부의 말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조음기관이 결여된 귀가 내뱉는 내부의 말일 수 있다. 말하자면, 청력이라는 기능에 얽매이지 않을 때 도리어 그것은 말하기 시작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귀의 말>이 ‘귀’와도, ‘말’과도, 형상적 연관성이 없다는 것은 주목할 지점이다. 이윤이는 형상과 기능을 분리하거나 형상에 의문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기능으로 유도한다. 작가가 형상과 기능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음은 오히려 어떤 면에서 귀의 형상을 닮았다고 할 또 다른 오브제의 제목이 <기능하는 사람>인 데서도 확인된다. 이것은 반사판 한 귀퉁이를 반쯤 접어 세운 것으로, 그 어떤 유용하거나 식별가능한 기능도 없이, 그저 뱅글뱅글 회전하고 있다. (그 외에도 반사판은 곳곳에, 어떤 경우 모퉁이 바닥에 놓여 있기도 하다. 이름도, 역할도 없이.)
이윤이 작품에서 어떤 결핍은 단순히 결핍을 채워줄 다른 반쪽으로 나아간다기보다, 그 자체로 결정되지 않은 변환과 증식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이 ‘절반’의 것들은 종종 쌍을 이루고 있고 일종의 거울상처럼 서로를 반영하고 있어서, 가령, 우리는 두 개의 <귀의 말>이 합쳐져 하나의 기둥이 되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들은 하나가 되기를 기다리는 불완전한 파편에 불과하지 않다. 절반과 절반이 결합되어 비로소 온전한 하나로서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은 도처에 명백하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핵심일 것이다. ‘절반’은 단순히 ‘하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둘’을 예비한다. ‘절반’은 ‘하나’보다 이미 ‘둘’에 가까우며, 그렇게 얼마든지 몇 배수로 증식할 것이다. ‘반’의 거울상은 ‘둘’이다.
(따라서, 지난 번 개인전 《두 번 반 매어진》[2014]의 의미심장한 제목은 이번에도, 가령 매듭의 위치를 바꾸면, 유효하다.) (덧붙이자면, 당시 전시작 중 <Meet me at the Eagle>의 한 설치물이었던 두 동강 난 하모니엄은, 단순히 온전한 악기로 복구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전문이라는 위치 및 시점 변환의 새로운 기능으로 거듭난다.)
2.
절반으로 잘려나간 존재가 두 배로, 그 이상으로 확장되는 것은 《내담자》의 영상 작품 <샤인 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은 기이한 인연을 이어가는 두 여성, 본향과 승연의 이야기를 다룬다. 도입부부터 두 사람은 마치 거울상처럼 보여지도록 유도된다. 하나의 벽을 마주한 각각의 방에서 동일한 옷을 입고 동일한 절 수행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은, 배경에서 속삭이는 노랫말처럼, 몸을 바꿔 태어나도 무방해 보인다. 이어지는 장면이 흥미롭다. 처음 만나게 되기 전 꿈에서 승연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봤다고 말하는 인터뷰에서 본향은 묘하게도 꿈 속의 얼굴이 반쯤 가려진 채, 즉 눈은 안 보이고 코와 턱 부분만 보이는 상태였다고 설명한다. 그러자 승연측으로 넘어간 인터뷰 화면은 그림을 그리는 승연의 반쯤 가려진 얼굴, 그러나 이번엔 눈만 드러나고 코와 턱 부분이 가려진 모습을 보여준다.
절반만 공개된 얼굴. 이것은 얼굴의 아래쪽과 위쪽을 단순히 이어붙이기 위한 퍼즐이 아니다. 퍼즐에는 딱 맞아야 할 짝패와 제자리가 정해져 있지만, <샤인 힐>에서 그 후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반쯤 가려진 얼굴들은 두 사람의 필연적 인연만큼이나 어쩌면 대체가능성과 확장가능성을 암시한다. 본향은 꿈 속에서 수행법을 설명하는 중에도 인물의 아랫부분만 그렸던 것에 대해, 나머지는 승연이 채워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본향이 예지했던 ‘절반’의 목격은, 승연이라는 존재가 가진 단일하지 않은 정체성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처음 동등해 뵈던 승연과 본향의 절반씩의 무게축이 일순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엉뚱하게도 승연과 가족의 전생 얘기로 흘러가는 것은 나름의 일관성을 갖는다.
전생 에피소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승연이 인도 어느 왕국의 공주였고 승연의 어머니와 언니와의 사이는 어떻게 뒤바뀌었는지 따위의 세세한 관계도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현재의 나는 기껏해야 ‘절반’쯤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현재의 절반으로부터 그 너머를 만들어나가는 일이라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우리를 우리로 인식하게 하고 우리가 우리 아닌 것이 될 수 있게 한다. 우리의 삶은 이야기의 형태로 존재하며, 따라서 감춰둔 나의 이야기를 외부로 끄집어내는 일, 잠재된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 말하자면, ‘귀의 말’을 주고 받는 일은 삶을 확장시키는 중요한 방식이다. 그렇게, (상담 고객으로서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러 오는) ‘내담자來談者’는 (서로의 내밀한 심장을 열어 보이는) ‘내담자內談者’로 치환된다.
3.
‘내담자’의 전환이 발생하는 ‘샤인힐’은 이상한 무대이다. 그것은 승연의 가족이 운영하는 골프연습장으로, 언젠가 경영권을 둘러싼 가족 간 다툼이 발생할지 모를 장소이다. 하지만 정작 이 곳에서 일하는 모습이 보여지는 것은 승연의 친구 본향이 유일하다. 그가 일하지 않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승연과 함께 있을 때인데, 여기서 이 명백히 계급적 관계는 몽환적이고 달콤한 노래와 함께 ‘연기처럼’(말하자면, 카메라에 우연히 포착된 실제 화재 경보 장면과 무관하지 않은 채) 사라지고, 그렇게 둘이 함께 걸어가는, 때로 손을 잡아당겨 끌어주는 그 가짜 풀밭은 일순, 반짝, ‘빛나는 언덕’이 된다.
이를테면 ‘샤인힐’은 골프연습장과 일터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때, 그 진정한 이름의 의미를 되찾는다. 그리고 본향과 승연이 전생 이야기에 맞춰 짐짓 ‘연극’을 시행하던 진짜 풀밭의 작은 둔턱과 공명하며, ‘절반’의 언덕들이 빛나게 되는 조건을 상기시킨다. 결국, 작가의 전작을 빌어 표현하자면, ‘마야Maya’, 곧 ‘우리가 아는 그것이 아닐’ 때.
‘그것이 아니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으로 추정되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믿음과 부정의 결속, 곧 환영의 체계는 사실 영화 역사를 이뤄온 토대이기도 하다. 영화들은 대개 이 환영의 체제에 기대어 존립해 왔으며, 때때로 그것을 무너뜨리거나 폭로하는 시도들이 존재해왔다. 이윤이는 어떠한가. 그는 종종 이러한 환영을 순전한 환영 자체로서 구축한다. 그의 영상 작품 속 많은 인물들은 어떤 고통스런 상황에 빠져 있으며, 그들은 이 감정을 굳이 ‘(재)무대’화한다. 그렇게 환영임을 고백하는 퍼포먼스가 개입되고, 감정을 부추기는 노래로 이 고백을 강조함으로써, 이 거짓 믿음으로부터 진짜(에 가까운 무엇)이 출현하기를 소망한다. 가령, 전작 <Wetland, Greencard, Trio>(2012)에서 사슴으로 분장한 작가가 깊은 어둠 속 도시의 수플을 헤맬 때 흘러나오는 가스펠 송 ‘As the Deer’는 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실체를 고통스럽게 목도하도록 만든다.
<샤인 힐>은 이러한 작가의 궤도에서 머물면서, 이를 더욱 대담하게 비틀어 강화시킨다. 예컨대, 그러나 또한 요컨대, <샤인 힐>은 영상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영상 작품 <샤인 힐>의 가짜 언덕은 영상이 상영되고 있는 전시장 바닥에도 솟아 있다. 어둠에 묻힌 그 언덕 역시 <샤인 힐>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영상 <샤인 힐>은 그 자체로 자족적이지 않다. 혹은, 그 자체로 자족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실을 망각할 때이다. 영상 <샤인 힐>은 이미 현실 속 무언가의 거울상일 뿐 아니라, 그것의 또 다른 거울상을 영상 바깥 전시 공간에 되돌려놓는다. ‘절반’의 영상. 또 다른 ‘절반’의 설치. 그렇게 둘 이상, 몇 배로 불어나는 언덕들.
어둠의 샤인힐들이 빛난다. 그것들이 빛나는 것은 그것들이 고작해야 ‘절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주 일부는, 전시장 한켠에 덩그러니 놓인 반사판 덕분일 수도 있다. 여하튼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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