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향로 (1986)
개인전
2017 《Liquid Rescale》, 두산갤러리 뉴욕, 뉴욕
2017 《스크린샷》, One and J +1, 서울
2014 《Blasted (Land) scape》, 인사미술공간, 서울
2012 《숏 컷》, 갤러리175, 서울
주요 단체전
2017 《Reality Check》, 소더비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뉴욕
2017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 아뜰리에에르메스, 서울
2016 《직관의 풍경》, 아라리오갤러리서울, 서울
2016 《A Field Guide to Getting Lost》, 타이페이 디지털 아트 센터, 타이페이
2015 《아르코미술관 미디어프로젝트 아카이브 리뷰》, 아르코미술관, 서울
2015 《평면탐구:유닛, 레이어, 노스탤지어》, 일민미술관, 서울
2015 《False Start : Situational Exploratorium》, Taipei Artist Village Barry Room, 타이페이
2015 《토킹 픽쳐 블루스 (커지는 목소리들)》, 킴킴갤러리기획, 송원아트스페이스, 서울
2015 《인트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2015 《포스트 픽쳐스》, gallery175, 서울
2014 《젊은모색 201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4 《상태참조》, 교역소, 서울
2014 《자립 혹은 침투》, 동덕아트갤러리, 서울
2014 《오늘의 살롱》, 커먼센터, 서울
2013 《알아서 조심》, gallery175, 서울
2013 《기울어진 각운들》, 국제갤러리, 서울
2012 《Cabinet Vol.2》, 일현미술관 을지빌딩, 서울
2012 《Bless this space》, 쿤스트독 갤러리, 서울
2011 《Tomorrow》,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10 《열사흩날 밤》, 한국예술종합학교 K-art gallery, 서울
2010 《New Vision》, 갤러리 소소, 파주
2010 《Perspective Strikes Back》, L’appartement22, 라바트
2010 《Hysteria》, 대안공간 루프, 서울
2010 《언어놀이》, 성곡미술관, 서울
2010 《서교육십 2010-상상의 아카이브》, 상상마당, 서울
2009 《시선의 반격》, 두산아트센터, 서울
2009 《Platform in KIMUSA》, 전 국군기무사령부 건물, 서울
2009 《요즘, 어때요?》, 갤러리 그문화, 서울
2009 《홍벨트-작가와의 대회》, 갤러리 킹, 서울
2008 《A∩B》, 텔레비전12, 서울
수상 및 프로그램
2017 두산레지던시 프로그램, 뉴욕
2015 Arko Media Project 아르코 미디어 작품공모 선발
2015 Taipei Artist Village, 고양레지던시 국제 교환 입주 프로그램, 타이페이
2015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입주작가
2014 인사미술공간 전시공모 지원(시각분야 AYAF) 선발
2013 인사미술공간 작가워크숍 프로그램
2011 홍은예술창작센터 마을지도만들기 ‘나의마을, 나에마을’ 프로그램 진행
2011 Ilhyun Travel Grant 수상
전시 기획
2015 《굿-즈》, 세종문화회관, 서울
2013 《알아서 조심 Watch yourself》, 갤러리175, 서울
출판
2017 『COOL #4: BUY』, 「박미나의 오프-화이트(조각)」, 편집 및 디자인 양민영
2017 『Screenshot』, 서울시립미술관 출판
2016 『민메이 어택 : 리-리 캐스트』, 「쇼핑몰-레퍼런스-미술작품의 해상도」, 기획 돈선필, 출판 시청각
2016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그런가요 1호: 삼인조 가이드』, 책임 편집; 길예경
2014 『Blasted (Land) scape』,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출판
Yoon Hyangro (1986)
Solo Exhibitions
2017 Liquid Rescale, Doosan gallery, New York
2017 Screenshot, One and J +1, Seoul
2014 Blasted (Land) Scape, Insa art space, Seoul
2012 Short Cuts, gallery175, Seoul
Selected Group Exhibitions
2017 Reality Check, Sotheby’s Institute of Art, New York
2017 O philoi, Oudeis Phials, Atelier Hermes, Seoul
2016 Intuitive Landscape, Arario gallery Seoul, Seoul
2016 A Field Guide to Getting Lost, Digital Art Center of Taipei, Taipei
2015 Arko Media Project Archive Review, Arko Art Center, Seoul
2015 Crossing Plane:Unit, Layer, Nostalgia, Ilmin Museum, Seoul
2015 False Start : Situational Exploratorium, Taipei Artist Village Barry Room, Taipei
2015 Talking Picture Blues(Voices Rising), Kim Kim Gallery Presents, Songwon Art Space, Seoul
2015 Intro, MMCA Seoul, Seoul
2015 Post Pictures, gallery175, Seoul
2014 Young Korea Artists 2014,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Gwacheon
2014 State-Based Actions,Trading Post, Seoul
2014 Independent or Permeate, Dongduk art gallery, Seoul
2014 Today’s Salon, Common Center, Seoul
2013 Watch Yourself, gallery175, Seoul
2013 The Song of Slant Rhymes, Kukje gallery, Seoul
2012 Untitled_1, Choijungah gallery, Seoul
2012 Cabinet vol.2, Ilhyun museum, Seoul
2011 Korea Tomorrow, Hangaram museum, Seoul
2010 New Vision, gallery Soso, Paju
2010 Perspective Strikes Back, L’appartement22, Rabat, Morocco
2010 Hysteria, Alternative Space Loop, Seoul
2010 Linguistic Morphology;Art in Context, Sungkok Art museum, Seoul
2010 Seogyo Sixty 2010;The Imaginary Archive-The Gaze of 120, gallery Sangsangmadang, Seoul
2009 Perspective Strikes Back, Doosan Art Center, Seoul
2009 Platform In KIMUSA, Kimusa, Seoul
2009 How are you? today, Space of Art, etc., Seoul
2009 Hong belt, gallery King, Seoul
2008 A∩B, television12, Seoul
Awards & Programs
2017 Doosan Residency Program, New York
2015 Arko Media Project, Seoul
2015 International residence exchange program of MMCA Residency Goyang, Taipei
Artist Village, Taipei
2015 Artists Residency Program 2015 at MMCA residency, Seoul
2014 Arko Young Artist Frontier, Seoul
2013 Insa art space, artist workshop program, Seoul
2011 My village project, Seoul Art Space HONGEUN, Seoul
2011 Ilhyun museum Travel Grant, Seoul
Curatorial Proposals
2015 Goods, Sejong Center, Seoul
2013 Watch yourself, gallery175, Seoul
Publications
2017 COOL #4:BUY, “OFF-White (SCULPTURE) of MeeNa Park”, Written by Mean-Young Yang et al.
2017 Screenshot, Publisher Seoul Museum of Art
2016 Minmay Attack : Re-Re Cast, Written by SunPil Don et al.
2016 SeMA Biennale Mediocrity Seoul 2016, Could Be No.1: Trios of guides, Edited by Yekyung Kil
2014 Blasted (Land) scape, Publisher Arts Council Korea
왼손 중지로 전원 버튼을 누르면서 거의 하나의 동작처럼 홈버튼에 오른손 엄지를 갖다 대는 일 / 회화적 풍경들: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보이는 것
윤율리 (아카이브 봄 디렉터)
이 시대의 가난함에 대해 생각한다. 가난한 청년, 가난한 노인, 가난한 국가와 가난한 고양이들. 전례 없던 호황의 시기는 누군가 상상했던 장밋빛 미래를, 혹은 우리 모두의 낙관적인 전망들을 당겨 쓰며 도래했다. 미래는 다문화주의, 탈식민주의, 관세 없는 자유무역의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달콤한 채권이 되어주었던 약속들이 사라져버린 뒤, 이제 세계는 소진된 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런 추론을 제기한 바 있다. 짧았던 영광의 시대는 지난 시각문화의 지배적 양식들과 동일한 궤적을 그리며 낙하한 것이라고. 카메라 옵스큐라와 DSLR, 영사기, 자성(magnetism)으로 제어되는 저장장치, 거대한 스크린들―시각 기계가 일군 문화·예술은 세계를 저마다의 검은 네모 속에 잘라 넣으며 압도적인 메타-세계를 창조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히 증식하는 이미지들에 대해 다른 우열, 다른 가치체계를 조직하는 것이 시각성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세계가 복제를 거듭하는 속도는 점점 가속되었으므로 각종 시각산업이 브라운관을 가득 채우고 흘러넘쳐 도시의 회색 콘크리트 위를 뒤덮었기 때문이다. 시각적 쾌락이라는 열병 속에서 모더니즘 이후는 감각의 시약을 조제하고 유통하는 전지구적 드럭스토어였다. (보는 것의 폭력성에 관한 문제는 다시 동시대 페미니즘의 주제로 환원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호황은 이 대규모 진격전이 승리를 거두며 획득한 전리품이었기에, 과잉의 시각성에 각각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 돌고 도는 거래의 반복에 세금을 매기는 일이 체제의 번영을 보장하는 보증수표가 되어주었다.
그렇다면 뒤따르는 나머지 가설은 다음과 같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를 밝힐 수 없는 양면의 수수께끼처럼 사실 전자화된 자본과 전자화된 예술은 하나의 몸통을 가진 키메라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거론되는 미술/회화의 위기를 검은 네모-세계가 일시적으로 교란했던 혹은 교란시킬 수 있었던 시각적 가치체계의 위기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가치체계’의 문제는 단순한 교환가치에 상응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모더니즘 이후는 무언가 그럴듯한 도덕을 제안하는 데 실패했고, 성공한 예술가들의 리스트는 단지 특정한 세대/로컬의 공통양식 정도로 해석되고 있다.) 즉, 중산층이라는 스펙터클이 끝장나버렸을 때, 다문화주의가 테러리즘으로, 탈식민주의가 혁명성의 정교한 퇴행으로, FTA가 장벽으로 대치되었을 때, 우리는 범람한 시각산업의 무덤에서 이끼처럼 자라난 신종 빈곤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환통로의 하류로 쓸려 내려간 이미지들은 초법적인 경작지(precaria)나 신종 포르노그라피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지라도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의 진술을 참조할 수 있다. - “가난한 이미지는 현대의 스크린에서 추방된 존재이며 생산된 영상·음향의 잔해, 디지털 경제의 해변으로 밀려온 폐품이다. 그것은 잔혹하게 전치, 이양, 변위된 이미지의 증거다. 영상·음향 자본주의하에서 악순환하는 이미지의 유통과 가속을 증명한다. 가난한 이미지는 상품으로 혹은 상품의 꼴로, 공물이나 현상금이 되어 지상을 떠돌아다닌다.”¹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가속이 아니라 완만한 정지에 대해서. 언젠가부터 나는 종이 책을 거의 읽지 않게(못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과잉기억증후군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과잉기억증후군이란 자신에게 일어나는 거의 모든 사소한 사건들을 기억하게 되는 기억장애다. 그렇다고 머리가 좋아지거나 암기력이 상승하는 것은 아니어서 학습 능력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뇌과학이 발전을 거듭하며 발견된 이 기이한 질환은 질 프라이스라는 영국인 여성이 자신의 정신과 주치의에게 트라우마를 상담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뇌과학 학술지 『뉴로케이스』가 2006년 게재한 바에 따르면 질 프라이스는 기본적인 인지 능력에서 대조군과 차이를 보이지 않았으나 기억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일반인들에 비해 다양하고 넓게 관찰되었다고 한다. 보통 기억이 저장되는 곳은 오른쪽 전두엽으로 알려져 있는데 질 프라이스는 전두엽의 우측과 좌측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잉기억증후군의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요컨대, 이 기억장애는 경험의 매 순간을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자서전적 기억’으로 재구성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연속을 비연속 이미지의 나열로, 이를테면 사진을 가득 넣은 플립북을 만드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눈을 사용하는 컨텐츠 읽기에 관심을 잃은 것도 역설적으로 그것을 정지 상태로 소유할 수 있게 된 이후의 일이다. 대신 나는 가상의 인터페이스로 타임라인을 잡아 당기다가 흥미로운 논쟁거리들을 저장하고, 인공지능이 정밀하게 추천한 드라마 리스트의 섬네일을 위시리스트에 담는다. 최근에는 인스타그램에도 보관 기능이 생겨서 습관적으로 ‘좋아요’를 누르는 일과 보관 버튼을 누르는 일과 그 모든 것의 스크롤링이 놀랍게도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물론 저장한 내용을 제때 확인하는 경우는 없다. ‘이번 주에 저장한 항목’이 메일함에 도착할 때, 나는 비로소 그간 타임라인의 유속에서 끌어당겨 멈춰 놓은 것들의 목록을 업데이트한다.) 솔직히 그마저 귀찮거나 성가시다고 느끼는 일이 잦아 화면을 캡처하는 빈도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조각난 재료가 여러 창고에 흩어져 있는 방식은 아무래도 번거로움을 초래한다. 반면 왼손에 아이폰을 올린 채 중지로 전원 버튼을 누르면서 거의 하나의 동작처럼 홈버튼에 오른손 엄지를 갖다대는 일에는 1초 남짓의 시간이 소요될 뿐이다. 그것이 요구하는 낮은 숙련도에 비해 꽤 재치있고 괜찮은 일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화면 바깥의 것이라면 고민 없이 스냅샷을 찍는 쪽을 택한다. 스냅 사진은 예민한 촬영이나 스캐닝이 아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스크린샷과 유사한 값이 되어 사진첩에 누적된다.
나는 여전히 많은 종이-책을 사고, 제본된 종이뭉치를 편집하고 만드는 데서 이상한 희열을 느끼지만, 행위로서의 책 읽기는 눈의 근육을 쓰는 일에서 간단한 손짓을 동반한 광학적 제스처로 대체되었다. 정지된 박제가 쌓인 사진첩은 적당한 사이즈로 최적화된 색인 이미지들이 분별없이 포진하는 바탕화면이다. 글을 쓰거나 생각을 가다듬어야 할 때, 나는 텍스트의 축축함을 잃고 잘 말려진 섬네일을 앞뒤로 또는 위아래로 쓸어 넘기며 가상의 종이더미, 가상의 컨텍스트를 복각한다. 이들은 커다란 창을 통해 부서진 구체시와 같은 세계를 보여준다. 분명, 오늘날 어떤 기준 이상으로 정교해진 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감각과 경험을 전자적으로 분할하며 기억과잉 증후군을 유발하고 있다. 질 프라이스의 뇌는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이 가상화 작업을 수행했지만 나는 반도체 저장장치의 힘을 빌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199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SF들은 으레 인간의 눈을 군사용 광학렌즈나 전자 부품으로 대치시키곤 했다. 그러나 스크린샷과 그 하위로서의 스냅샷을 디지털 리터러시가 정점에 이른 순간의 신종 셀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올드스쿨한 사이보그적 포스트휴먼에 대한 상상도 조금은 다른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까운 미래에 나는 좋은 알고리즘을 가진 메모장이나 워드프로세서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새로운 유희나 통속성의 전조일까?)
“그러므로 현대미술은 (…) 편집 콘솔로서 스스로를 소개한다. (…) 사회적 실재를 편집하느냐, 아니면 다른 말로, 그것의 존재론적이고 불확실한 특징인 부정적 형식으로 확인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² 끝으로, 윤향로라는 회화기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가 스스로 유사회화라 부르는 것은 사실 회화기계-되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폐품―교과서, 만화, 애니메이션, 녹슨 시각적 통속성의 기념비들을 잉크젯 프린트로 출력하는 디지털 페인팅을 선보여 왔고, 지금은 마치 독립된 망점 하나하나를 스프레이의 분사로 재현하는 듯한 회화를 내놓고 있다. 가속하는 재생과 정지하는 죽음 사이에서 무엇이 행운이고 불행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깜빡이고, 흐릿해지고, 트랜스코딩 되는 동시대의 회화적 평면은 다른 가치체계의 윤리를 발굴하기 위한 심오한 프로젝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 양식을 스스로 모사하고 재프로그램하는 것이 오늘의 회화에 남겨진 숙제일 테다. 모든 회화가 그렇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분명 어떤 회화는 그런 싸움을 하고 있다. 처음 커다랗고 투박한 핸드폰을 손에 쥐었을 땐 8비트에서 16비트로, 다시 하이컬러에서 트루컬러로, QCIF(176*144)에서 QVGA(320*240) 해상도로 성큼성큼 전진하는 패널의 발전에 깜짝 놀라곤 했다. PC 통신에서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고화질 패치를 구하기 위해 밤새 쪽지를 주고받던, 돌이켜보면 그런 짧은 시절도 점멸하듯 우리를 스쳐 갔다. 그러나 동시대의 모니터가 된 평면 위에서 눈과 화면, 노즐과 손가락이 교환되는 방식은 오히려 완벽하게 투명해진 해상도의 가벼움을 실감케 한다. 물론 아직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들이 있다. 토성 탐사선 카니시호가 14억 5천만 km의 거리를 뚫고 전송해온 아름다운 얼음고리의 사진 같은 것들. 그래서 빛이 프레임 가득 번지는 ‘스크린샷’을 보며 나는 토성을, 재생을 위해 멸망의 주문을 외는 검은 단발머리 여전사를 떠올렸던 것 같다. 분명 저화질의 이미지는 이제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상할 수 없는 거리의 어떤 행성에서는 다른 중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그만큼 우리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그 거리의 감각에서 오는 모종의 불명확한 감정들을.
¹ 히토 슈타이얼 저/김실비 역, 『스크린의 추방자들』, 워크룸프레스, 2016. 김실비가 제안한 번역어 ‘가난’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랑스러운 아이디어의 지지자임을 밝힌다.
² 니콜라 부리오 저/역자 미상, 「불확실한 해석들」, http://www.podopodo.net/article/critics/detail.asp?seq=43
(번역: 최기원, 박재용)
A single act of putting the thumb of your right hand on the home button while pressing the power button with the center finger / picturesque landscapes: things that are far away and things that are seen at a close distance
Yoon Juli (Director of Archive Bomm)
I mull over poverty in today’s world ― poor youths, the poor elderly, poor countries and poor cats. The unprecedented high days have come about by bring in a rosy picture ―envisioned by some― and optimistic outlooks for all ― rather early. The future was waving a flag of multiculturalism, post-colonialism and tariff-free liberalism. With the promises which used to ease our hearts as sweet bonds gone now, the world now looks like a person who is completely burned out. Some came up with a reasoning that went: the short-lived era of grace fell down in the same orbit with the dominant forms of visual culture of yore. The culture and art borne by visual machinery ―camera obscura, DSLR, projector, storage devices controlled by magnetism, and large screens― has created a dominant meta-world by cutting off the world into little pieces into its own black squares. On the other side, it has become a dominant goal for visibility to pursue: organizing a different hierarchy and a different value system for infinitely expanding images. Due to the high speed of reiteration by the world, various visual industries have dominated the white concrete in a city as they overflow TV screen. Post-modernism amid the zeal of visual euphoria has become a global drug store to prepare and distribute sensorial drugs (the topic of violence on the visible is reduced to that of contemporary feminism. As the high days in our memory were the spoils of war gained after a victory at a large advance war, imposing each value on excessive visibility and tax on the reiteration of transactions have become a certified check to guarantee prosperity of a system.
Another hypothesis that follows is as follows. Just like an enigma with double sides on which it cannot be said for sure which one comes first, electronic capital and art is a one-bodied chemira. Such thinking recognizes the crisis of art/paintings discussed today to be identical with a visual value system which was ―or could have been― temporarily distorted by a black-world (the issue of ‘value system’ in this sense is not analogous to a mere value of exchange. It failed to suggest an attention-grabbing morality after modernism, anyway, and a list of successful artists ends up being interpreted as a common style of a particular generation/locale). In other words, when the spectacle of the middle class was put to an end, and when multi-culturalism was replaced by terrorism, post-colonialism by sophisticated regression of revolutions, we witnessed a new type of poverty which was borne out of algae on a tomb in a rampant visual industry. The images washed away into the downstream of a circulatory pathway are described as trans-legal precariat or new pornography. Albeit slightly tedious, I can quote the following statement:
“Poor images are the contemporary Wretched of the Screen, the debris of audiovisual production, the trash that washes up on the digital economies’ shores. They testify to the violent dislocation, transferral, and displacement of images?their acceleration and circulation within the vicious cycles of audiovisual capitalism. Poor images are dragged around the globe as commodities or their effigies, as gifts or as bounty. They spread pleasure or death threats, conspiracy theories or bootlegs, resistance or stultification.”¹
Let me turn to a different story ― on a gentle stop instead of acceleration. I have come to almost avoid reading (could not read) paper books from some time ago. I doubt over some type of hyperthymesia ― a memory disorder of remembering all trivial events happening to one. It does not, yet, enhance one’s IQ or memorization ability, so does not impact a learning capability at all. This peculiar disease discovered with advancement of brain science came to be known to the world in the process where a British woman named Jill Price was consulted on her trauma with her psychiatrist. According to a report released in 2006 by Neurocase, a medical journal on brain science, Jill Price has not much of a difference with the control group in the experiment on basic recognition capabilities, but the memory domain in the brain was observed to be diverse and broad compared to ordinary people. While the right-sided front cortex is known to store memories, Jill Price was using both the right and left sides of the front cortex (However, it is not yet clear if this is the cause of hyperthymesia). For instance, this memory disorder seems to derive from reconfiguration of each moment of experience as ‘a panoramic autobiographical memory’. Wouldn’t it be same as creating continuity as a series of non-continuous images ― e.g., a flipbook with lots of photos inside?
I have come to pay attention to reading content where seeing with eyes is involved after I could ―paradoxically enough― possess it at a stop state. What I do now is to drag a timeline using a virtual interface, store intriguing debatable topics, and put the thumbnails in a drama list preciously recommended by artificial intelligence into a wish list. Instagram has started to offer the ‘storing’ feature, so the act of pressing ‘Like’ ―out of habit―, pressing the ‘Store’ button and the scrolling of it all happens surprisingly at the same time (True, it does not happen to check out what I store on time. When I receive ‘a list of what I have stored this week’ in my email box, I drag it in the flow of the timeline, and update a list of things I have stopped to see later). Even this act has often been regarded to be bothersome or tedious, so I capture screen shots more often than before. The way in which fragmented ingredients are everywhere in different warehouses, of course, causes a hassle. By contrast, having my center finger placed on the power button of my iPhone in my left hand and placing my right thumb on the home button as if in a single gesture takes about one second. I feel as if I am doing something fun and cool, given the low level of skill required herein. If I shoot a scene is outside the screen, I do not hesitate a bit to take a snap shot. Since a snap shot is not such sensitive work or scanning, it gets accumulated in my photobook in a similar value with screen shots.
Although I have a peculiar bliss in still buying many paper books and editing and making a pile of copies, my book reading act has been replaced by an optical gesture accompanying a simple hand gesture ― instead of the act of using my eye muscles. A photo album with a buildup of stopped taxidermy is the background screen where optimized index images are recklessly scattered in an appropriate size. When I write or contemplate on something, I reproduce a virtual pile of paper ―virtual contexts― by swiping a thumbnail front and back or up and down, which is well dried after losing the wetness of a text. It shows a world like a concrete poetry through a large window. True, the digital technology which has become sophisticated above the level of a threshold electronically disintegrates the sense and experiences of humans and induces hyperthymesia. There is a mere difference in that the brain dubbed by Jill Price performs this virtualization work using mysterious methodologies, but I borrow the power of a semiconductor storage device. The sci-fi’s gaining a high popularity in the ’90s replaced humans’ eyes with optical lenses for military purposes or electronic components. However, if the screen shots and snap shots ―as a subordinate form of screen shots― are interpreted as a new type of selfies at a moment when digital literacy reaches its peak, wouldn’t imagination over old cliche cyborg post-humans be something different? (Would I be able to become a memo note or a word process with favorable algorithms in the near future? Would this be a prelude to a new type of amusement or secularity?
“Therefore, contemporary art (…) presents itself as an editing console. (…) It is a matter of editing a social reality or in other words, a matter of identifying its existentialistic and uncertain characteristics in a negative form.”² Lastly, I think about the artistic machinery of Yoon Hyangro. I once wondered if her previous painting series ―dubbed as pseudo-paintings― are to talk about becoming ‘artistic machinery’. She has introduced digital painting to print out her collection of used goods ―textbooks, comics, animation, and rusted visual cliched monuments― using inkjet print, and currently produces paintings as if to represent each and every point as if using a spray. Although it is not clear what is fortunate and what is not in the middle of the accelerated reproduction and death where things stop, contemporary picturesque planes ―blinking, dimming and transcoding― seem like a project with deep meanings attached to explore the ethics of a different value system. Above all, it would be something to think about in today’s paintings to emulate and reprogram the form itself. Some paintings ―not all paintings― are engaged in such a fight.
I used to be taken aback by the leaping development of panels from the moment I grabbed a big and rough mobile phone, whose resolution was advancing from 8 bits to 16 bits, from high colors to true colors, and from QCIF (176*144) to QVGA (320*240). There was a time which transiently passed by when we used to exchange notes overnight online to get even slightly more stable high-resolution patches in the age of PC communication. And yet, on the plane which has become the most sharp-edged plane, the way of exchange between one’s eyes and the screen, and the nozzle and a finger lets one realize the lightness of a resolution which has become perfectly transparent. True, some exceptions exist: things like the photos of such beautiful ice rings sent by the Cassini mission, exploring Saturn, crossing an unbelievable distance of 1.45 billion km. Looking at the ‘screen shot’ where the light was scattered in the frame, the Saturn and a black short-haired female warrior saying cursing words for rebirth. True, the low-resolution images have such an image today: a different type of gravity operates on a planet which position cannot be even imagined; we are that much distant from one another; and uncertain sentiments resulting from the sense of the very distance.
¹Hito Steyerl, trans. Sylbee Kim, The Wretched of the Screen, Workroom Press, 2016. Despite controversies over translator Sylbee Kim’s translation of ‘poor’, I endorse her version of translating it ― a lovely idea, I believe.
² Nicolas Bourriaud, translator unknown, ‘Uncertain Interpretations’, http://www.podopodo.net/article/critics/detail.asp?seq=43
(translated by Choi Ki Won, Park Jeayong)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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