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 Sujin Lee
학력
2005 New York University 퍼포먼스 스터디스 석사
2003 New York University 스튜디오아트 석사
2001 Maryland Institute College of Art 순수미술 학사
개인전 및 퍼포먼스
2016 <말 사이의 거리>, 케이크 갤러리, 서울
2015 <디태치드 리딩. 코리안 텍스트>, 타이가 스페이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2014 <트랜스크라이브>, 토마스 헌터 프로젝트 스페이스 갤러리, 뉴욕 맨하탄
2013 <보이싱 더 사운드>, A.I.R.갤러리, 뉴욕 브루클린
2009 <명확히 발음되다: 모음 단축, 자음 삭제/추가 (마지막에는 끝처럼 보이면 안된다)>,
메릴랜드 예술대학교, 메릴랜드 볼티모어
주요 그룹전 및 스크리닝
2015 <코리안 블루 웨이브스>, 컨템포러리 아트 루어, 에쎈
2015 <금호창작스튜디오 보고전>, 금호미술관, 서울
2015 <작가를 찾는 8인의 등장인물>, 아르코미술관, 서울
2015 <101. 디지털 테크놀러지의 시학>, 뉴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2015 , 만데빌 갤러리, 유니온 대학교, 뉴욕 시넥테디 2014 차학경 레퍼런스,
수하 갤러리, 광주
2015 <시간의 그늘>, 퀸즈 미술관, 뉴욕 퀸즈
2015 <더 아나크. 필름 프로젝트>, http://anarchfilmproject.tumblr.com
2013 <단편들의 초상: 테레사 학경차(1951-1982)>, 런던한국문화원, 영국, 런던
2013 <마이카 -덴/나우>, 쿤스트할레 비컨, 뉴욕 비컨
2013 <제5회 오프앤프리 국제 영화제>, 서울 시립 미술관, 서울
2012 <.I.R. 비엔날레>A, A.I.R. 갤러리, 뉴욕 브루클린
2012 <무빙 픽쳐스>, PS 122 갤러리, 뉴욕 맨하탄
2012 <시스테믹 리스트>, NURTURE아트, 뉴욕 브루클린
2012 <더 퍼스트 쇼>, 멀티플렉서 스페이스, 네바다 라스베거스
2011 <비틀려진 장난감과 게임>, 롱우드 아트 갤러리 @ 호스토스, 뉴욕 브롱스
2011 <제3회 오프앤프리 국제영화제>, 아트하우스 모모, 서울
2011 <인/익스/체인지>, 아트 스테이즈 국제 현대 미술 페스티벌 9, 슬로베니아
2010 <말의 무게>, http://stuffinablank.com
2010 <자메이카 플럭스 ’10 비디오 슬램>, 자메이카 센터, 뉴욕 자메이카
2009 <비젼 인 뉴욕시티>, 콜롬비아 대학교 메이시 갤러리, 뉴욕 맨하탄
2008 <에임 28: How Soon Is Now?>, 브롱스 미술관, 뉴욕 브롱스
2008 , 알자이라: 현대미술센터, 뉴저지 뉴어크
2008 <뉴 블러드>, 버텍스 리스트, 뉴욕 브루클린
2008 <맥시멈 퍼셉션: 현대 브루클린 퍼포먼스>, 잉글리시 킬스 갤러리, 뉴욕 브루클린
2007 <먹어요 예술을>, 멍키 타운, 뉴욕 브루클린
2007 <다양성 프로젝트 퀸즈>, 뉴욕 퀸즈
2005 , 청담 비디오 아트 페스티벌, 갤러리 드맹, 서울
2005 <비디오 시리즈 2005>, 골리앗 비주얼 스페이스, 뉴욕 브루클린
2005 <시간: 기초: 행동>, 볼리 갤러리, 미주리 캔자스 시티
2005 <뉴. 매스. 아트>, 컨템포러리 아티스트 센터, 메사추세츠 노스 아담스
주요 퍼포먼스
2012 <시간, 8 에서 8: 창의적인 비상상태>, 뉴욕 맨하탄 유니온 스퀘어 공원
2009 , 40º파이: 공원의 라이브 아트 시리즈, 뉴욕 맨하탄
루즈벨트 공원
2008 <타겟 랭귀지>, 브롱스 미술관, 뉴욕 브롱스
2007 <단식(빨리)>, 멍키 타운, 뉴욕 브루클린
2006 <명확히 발음되다: 모음 단축, 자음 삭제/추가 (마지막에는 끝처럼 보이면 안된다)>,
브루클린
2006 <아트 익스체인지>, 뉴욕 브루클린
2008 <이미지보다 오래 살아남은 목소리: 진행중인 발췌>, 무브먼트 리서치 @ 저드슨
교회, 뉴욕 맨하탄
출판된 글
2016 『하이픈』, 헤적 프레스
2013 『차학경 예술론』, 공저, 북코리아
2008 『퍼블릭 도메인』, “타켓 랭귀지” 모니카 드 라 토레와 협업 프로젝트, 루프 출판사
수상 및 레지던시 프로그램
2016 신진미술인 전시지원 프로그램, 서울시립미술관
2014-15 금호창작스튜디오
2013 뉴어크 미술관 아티스트 레지던시
2012-13 A.I.R. 갤러리 펠로우쉽
2012 아이 파크 아티스트 레지던시
2010 블루 마운틴 센터 아티스트 레지던시
2009 밀레이 예술 공동체 아티스트 레지던시, 로버트 심슨 펠로우쉽
2008 브롱스 미술관 아티스트 인 더 마켓 플레이스
2007 알자이라: 이머지 프로그램
2003 잭 굿먼: 예술과 테크놀러지 상 수상
2002 시드니 칸 섬머 인스티튜트 아티스트 레지던시
2000 뉴욕 스튜디오 프로그램 아티스트 레지던시
Education
2005 M.A. Performance Studies, New York University
2003 M.F.A. Studio Art, New York University
2001 B.F.A. General Fine Art, Maryland Institute College of Art
Solo Exhibitions & Performances
2016 , Cake Gallery, Seoul, Korea
2015 , Taiga Space, Saint Petersburg, Russia
2014 , Thomas Hunter Project Space Gallery, New York, NY, USA
2013 , A.I.R. Gallery, Brooklyn, NY, USA
2009 , Maryland Institute College of Art,
Baltimore, MD, USA
Selected Group Exhibitions & Screenings
2015 , Contemporary Art Ruhr, Essen, Germany
2015 , Kumho Museum of Art, Seoul, Korea
2015 , Arko Art Center, Seoul, Korea
2015 <101. Poetics of Digital Technologies>, New Alexandrinsky Theatre, Saint
Petersburg, Russia
2015 , Mandeville Gallery, Union College, Schenectady, NY, USA
2014 , Suha Gallery, Gwangju, Korea
2014 , Queens Museum of Art, Queens, NY, USA
2014 , http://anarchfilmproject. tumblr.com
≪말 사이의 거리≫에 관하여 윤민화 (케이크 갤러리 큐레이터)
말 사이로 들어서기
이수진은 에서 쓰면서 말한다. 아니, 말하면서 받아쓴다. 둘 중 무엇이 선행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두 행위는 서로에게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기의 측면에서 보면, 목소리는 글씨를 쓰는 손을 친절히 기다려주는 것이 분명하다. 덕분에 목소리는 영어가 갖는 리드미컬한 강세와 듣기 좋은 속도로부터 멀어져 버렸다. 쓰기의 입장에서도 불편함은 나아지지 않는다. 말의 흐름을 최대한 잃지 않기 위하여 손은 될 수 있는 대로 빠르게 쓰고자 노력하는 것이 역력하다. 하지만 제아무리 손을 빠르게 움직여도 쓰기는 말하기를 따라잡기 힘들다. 처음에는 종이의 왼편에서 오른 방향으로 정갈하게 줄을 이어가던 글씨는 금세 자리를 잃고 우왕좌왕 종이 위를 내달린다. 이렇게 쓰인 글씨는 도무지 읽기 힘들다.
말하기는 쓰기를 기다리느라 지치고, 쓰기는 말하기를 쫓느라 애쓴다. 이 작업에서 말과 글은 무엇 하나 제대로 성립되지 못한다. ‘동시에 말하고 쓰기’를 보면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은, ‘말하기를 실패한 목소리’와 ‘읽기 어려운 쓰기’에 불과하다. 어떻게 보면 이수진은 이 작품에서 입말과 글말의 통합을 꾀함으로써 그것들의 관계를 추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입말도 글말도 각각의 언어적 성질을 잃고 말았다. 입말은 입말대로 발음을 질질 끌거나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리고, 글말 역시 종이 위를 펜이 지나가며 그려내는 선형적 추상이 되었다. 알파벳은 본디 분절되어 있으며, 따라서 비선형적이다. 그러나 입말과 글말의 만남은 목소리와 쓰기로부터 각각 ‘언어’를 분리하며 그 과정에서 우연하게도 언어 이전의 목소리와 쓰기를 드러내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애초에 목소리와 쓰기는 어떻게 언어와 관계하고 있는 걸까. '(언어로 인하여) 의미가 있기 이전의 목소리’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마찬가지로 '(언어로 인하여) 글자로 판독되기 이전’의 쓰기는 ‘읽기’를 위함이었을까 ‘보기’를 위함이었을까. 이 물음들은 목소리를 음성언어와 문자와 관련해서 각각 생각해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우리가 목소리를 사용하는 방식, 그리고 쓰기를 하는 방식에 대한 생각도 꼬리를 물고 뒤따른다. 이수진은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작품에서 목소리와 쓰기, 그리고 그것들이 각각 언어와 관계하는 방식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이 그러한 대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서두에서 밝히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수진은 음성언어와 문자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면서, 목소리의 본질, 쓰기의 본질에 대한 궁금증을 일깨우고, 그것들을 ‘언어’의 차원에서 생각해보게 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곁가지들이 발생한다. 목소리와 쓰기가 갖는 고유성이 ‘언어’를 만나게 되면서 말하고 쓰는 주체에 대한 문제, 모국어와 제2의 언어의 문제, 번역에 관한 문제 등 문화적, 사회적 담론들이 그 사이에 빼곡하게 자리하게 된다. 따라서 단일한 경로로 이수진의 작업을 관통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일단 이수진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언어’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여 뒤흔들고 해체하고 균열을 일으켜 낯선 형태로 우리 앞에 제시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수진의 미로 같은 작품 세계로 들어갈 때 꼭 쥐고 있어야 할 한 타래의 실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목소리와 언어 사이의 거리 에서 목소리로 등장하는 여섯 명의 화자는 서로 다른 억양으로 영어를 구사한다. 이들은 사전 녹음 작업을 통해, 한목소리로 텍스트를 읽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때로 조화를 이루는 것 같지만, 결국 각자의 억양과 리듬을 쫓아 서로 다른 음성으로 갈라선다. 화면에는, 여섯 명의 목소리와 함께 텍스트를 발화하는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여섯 개의 목소리 각각이 결코 하나로 온전히 통합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입 모양 또한 그들의 것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작가는 녹화하는 과정에서는 소리 내어 그들의 목소리와 함께 했지만, 최종적으로 영상에는 작가의 목소리는 삭제된 채, 여섯 명의 목소리만이 들리게 된다. 나는 이수진의 입 모양과 한때는 만났다가, 다시 분리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여섯 명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껏 ‘이상함’을 느꼈다.
이 이상함은 작가가 가리키고자 하는 목소리와 언어 사이의 어디인가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틀림없다. 그 사이 공간을 호출하기 위해서 작가는 ‘여섯 명의 서로 다른 억양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작품에 초대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각자의 고유한 억양으로 영어를 발음하기 때문에, 어떤 예민한 청자는 이들의 출신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국어가 아닌 제2의 언어로 영어를 습득한 경우에, 대부분 자신의 모국어에 기반을 두는 독특한 억양이나 리듬을 가지고 발음하게 된다. 영어가 모국어인 경우에도, 어느 지방에 거주하느냐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게 발음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미국식’ 영어 혹은 ‘영국식’ 영어를 가르치는 실용 영어 학원이 있다고 한다. 본토의 발음으로 영어를 사용하도록 지도한다는 발상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미국식’ 혹은 ‘영국식’의 영어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이 세상에 과연 ‘기준’으로 정해진 발음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어떤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그 언어의 ‘기준’과 똑같게 발음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어떤 언어도 목소리들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소리들은 결코 언어 안에서 같아지거나 통합될 수 없다. 목소리는 그 어떤 언어에 놓이더라도, 항상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이수진은 출신 지역을 고려하여 여섯 명의 화자들을 작품 속에 초대하는 것으로, 목소리와 모국어와의 관계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낸다. 즉, 목소리와 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수진의 작품에서 여섯 명의 목소리가 결코 하나로 조화로울 수 없었던 데에는 ‘언어’가 아무리 그 목소리들을 분절하여 통합시키려 해도 화자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담는 목소리의 특성까지는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의 어느 철학자는 ‘목소리란,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혼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목소리는 살아있는 사람의 들숨과 날숨, 입술과 혀의 마찰이라는 생명력이 함께해야만 가능하다. 목소리는 육체와 그 육체의 삶과 붙어있다. 따라서 누군가의 목소리는 그 육체의 존재, 그리고 그 존재의 고유한 정서가 가진 리듬, 박자, 밀도를 은밀히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렇듯 목소리는 하나의 몸속에 상감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화면에는 여섯 명의 목소리가 갖는 이상한 리듬을 열심히 쫓는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여섯 명의 목소리와 함께 하는 이수진의 표정과 입 모양은 공허하고 어색하다. 음색이 다른 여섯 명의 목소리가 한 데 모이면서 그 누구의 몸의 흔적도 정확히 잡아내기 힘들다. 영혼을 잃은 목소리의 총합은 마치 기계음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것 같다. 그것을 쫓는 작가의 표정도 어색하고 낯선 기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수진은 전시의 일환으로 아티스트 토크를 하는 자리에서, 이 영상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에 대한 소개를 대신했다. 이것은 마치 “자, 내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으면 알아내 봐요!” 하고 짓궂은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는 작가 이수진의 태도는 ‘목소리’를 통해 자기 자신을 얼마나 활짝 열어젖힐 수 있는지, 혹은 얼마나 꼭꼭 숨어 들어갈 수 있는지 내기를 하며 관객들과 게임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목소리란 누군가에게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 수도, 잠글 수도 있는 ‘열쇠’와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의 스크립트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수진은 여섯 명의 화자들에게 특정 텍스트에 특정한 목소리를 요청했다. 괄호 안에 기재된 특정한 목소리에 대한 요구는 연극 대본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지문’과 유사하다. 배우는 극본에 적힌 지문을 통해 자신이 연기해야 하는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을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보통 지문은 객관적이고 설명적이다. 이수진은 스크립트에서 지문을 활용하여 여섯 명의 목소리에 화가 나거나, 배가 고픈 등의 캐릭터를 입히고자 하였다. 당연한 결과로, 해당 부분을 읽을 때 여섯 명의 목소리는 유독 커지거나 작아지거나 날카로워지는 등 리듬과 박자 면에서 극적인 변화를 드러내었다. 짧은 지점이었지만 이 작품에서 지문은 그것을 연기하는 자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이끄는 강제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수행성을 이끄는 강제력은, 나에게 신의 말씀을 연상하게 하였다. 흔히 신의 말씀을 ‘목소리 없는 문자’라고 한다. 성서의 신은 말로써 행동하고 그 언술을 통해 힘을 발휘한다. 그의 칙령은 문자를 통해 고정되어 율법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 율법에 신의 목소리는 없다. 말씀이 있었지만, 목소리 없이 율법으로 쓰인 것이다. 쓰인 말, 신의 말씀은 목소리 없는 말로 우리에게 계시된다. 이런 성격은 지문의 그것과 유사하다. 연출가는 지문을 통해 목소리 없는 문자로 배우에게 지시하고 따르도록 만든다. 따라서 내 생각에 이 스크립트에 쓰인 지문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배가 고픈지 하는 목소리의 설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 없이’ 쓰인 문자를 읽고 그것을 목소리로 드러내도록 이끄는 어떤 강제성에 있다.
목소리와 문자 사이의 거리
신에게는 말씀과 문자 사이를 매개하는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의 글은 목소리 없이 태어난 글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목소리’ 없이 문자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과연 인간의 언어는 목소리에 의해 대리보충되어 있을까. 이 물음은 인간의 몸, 몸의 한계와 제한으로서 목소리가 문자 언어에 기재되어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인간의 소통은 ‘허파’라는 기관에 의해 조건 지어지듯이, 어떤 말도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목소리’ 없이는 결코 표현될 수 없다. 그러니까 ‘목소리’와 ‘문자’는 이미 서로에게 매개되어 있다는 말이다. 서양 전통은 목소리와 로고스를 동일시하고, 문자를 이차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규정해왔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목소리에는 기침이나 웃음과 같은 단순히 새어 나온 공기는 없다. 비선형적이고 분절된 의미를 가진 언어로서의 목소리만이 해당하는 것이다. 음성 중심주의에서, 목소리란 이미 문자에 의해 분절되어 의미를 가진 말과 다름없다. 철자라는 분절된 기호를 통해 목소리는 언어가 된다. 이러한 목소리와 음성언어, 그 사이를 매개하는 문자와의 관계를 이수진은 <레의 대화> 에서 ‘자막’의 독특한 사용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레의 대화>는 두 사람의 대화를 영어와 한국어로 들려주고, 동시에 보여준다. 처음 들리는 것은 영어이다. 화면에는 영어 대화를 받아쓴 영어 텍스트가 있다. 그리고 이것의 ‘자막’으로서 한국어가 등장한다. 그런데 관객은 금세 이상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들리고 보이는 영어 대화와 한국어 자막이 일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작가가 대화를 진행한 방식에 있다. 1) 그들은 첫 번째 오디오 트랙을 준비하기 전에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의 부분을 선택하고 최대한 충실하게 받아 적어 스크립트로 만들었다. 2) 이 영어로 된 스크립트를 소리 내어 읽으며 첫 번째 녹음을 진행하고, 이 녹음된 대화가 작품에서 소리로 먼저 관객에게 들리게 된다. 3) 그리고 두 번째 녹음은 같은 영어 텍스트를 보면서 한국어로 즉흥적인 번역을 한 것이다. 4) 이때 한국어로 나눈 대화를 한국어로 받아쓴 텍스트가 자막에 흐르게 된다. 따라서 이 작업에는 여러 겹의 받아쓰기와 번역의 과정이 압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압축된 결과물로서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의도적으로 말과 글, 이 둘 사이의 거리를 극적으로 가시화한다.
"I might, I could have spea- speak-- I could have, so you know." "Eng--not, not everyone."
“Hahahaha!”
"Because I don't have like a set, uh, like, uh, minimum, limit?" "Because I know the circumstances where, it's just impossible to pay me, but…" "it's, it's, uh, it's good to know from the start."
- <레의 대화>에서 발췌
먼저 자막의 사용에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대화 중에 드러나는 모든 발화 작용들을 빠뜨리지 않고 적고 있다. 여기에는 말을 더듬거나, 웃거나, 발음을 끌거나, 자신의 말 중 문법적인 오류를 수정해가는 과정 등을 모두 포함한다. 보통 자막은 완벽한 문법으로 수정되어 쓰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자막이 실제 대화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사실 문법이라는 형식 바깥의 것들-웃음, 기침, 말 더듬기 등-을 문자로 기술하기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하면서 “어디까지 그대로 받아 적고, 어디부터 생략해도 되는지 헷갈린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영어보다는 한국어의 경우, 이런 받아쓰기가 훨씬 수월했다.”고 전했다. 이것은 언어마다 음성 언어와 문자 사이에 서로에게 개입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받아쓴 문장들을 가만히 보면, 언어 바깥의 것들까지도 받아썼기 때문에 제대로 읽히지 않는 부분들에서 유독 눈길이 멈추게 된다. 그럴 때마다 언어의 이질적인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는 듯 생경하다. 데리다는 “문자란 한 벌의 옷이 아니라 변장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문자란, 의미에 내재하지 않은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서, 의미 자체를 변질시키고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화로 ‘들을’ 때에는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일단 문자로 대화의 시시콜콜한 오류와 예기치 않은 소리를 직면하게 되면 그제야 자세를 바로잡고 언어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이수진의 받아쓰기는 문자가 어떻게 언어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들뢰즈의 경우에는 오히려 이처럼 언어의 지배를 넘어서는 목소리 그 자체에 의해서 표현되고 경험되는 것 -설령 그것이 언어를 왜곡하더라도-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카프카에 대한 연구를 통해 “기호학적으로 형성된, 작곡된 음악이 아니라 순수한 음성적 질료”로서 “의미화, 작곡, 노래, 말을 피해 가는 외침 소리”를 탐구하고자 했다. 나는 이수진이 2009년에 행했던 퍼포먼스 작업 에서 이러한 들뢰즈의 관심과 유사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서 이수진은 거리의 콘크리트 바닥에 흰 분필로 글씨를 썼는데, 모든 문자는 ‘발음 기호’만을 사용하여 적었다. 영어 사전에서 발췌한 발음 기호를 바닥에 써 내려가는 동안, 관객들은 발음 기호를 육성으로 읽게 되는 퍼포먼스였다. 발음 기호라는 것은 사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기호이다. 나처럼 모국어가 한국어일 경우에, 제2의 언어로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발음 기호에 기대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때, 발음 기호는 정확한 발음으로 언어를 구사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이미 영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발음 기호란 오히려 발음을 방해할 뿐이다. 사람들은 오히려 발음 기호로 인해 더듬거리게 되고, 마치 수수께끼를 푸는 듯이 발음 기호로부터 그것이 어떤 단어인지 유추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단어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순간, 쓰인 기호와는 별개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단어의 발음을 빠르게 발성해 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실제로 "영국 출판사에서 만든 사전을 사용했는데 각각의 단어에는 영국 발음 미국 발음이 차례로 제시되어 있었다. 나는 이 둘을 왔다 갔다 하며 사용했는데 어느 것이든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악센트와 함께 발음했다."고 술회하였다. 발음 기호는 목소리가 정교하고 섬세하게 음성 언어를 표현하도록 고안되었지만, 우리는 이미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스스로를 이끄는 대로 발성을 하는 것에 익숙한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언어 사용의 모범이 되는 기호로서의 문자가 목소리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관객들이 언어 안에서 자신을 미끄러뜨리는 상황, 다시 말해 순수한 음성적 질료로서 목소리 그 자체를 드러나는 상황을 끌어낸 것이다.
언어의 시간 사이의 거리 <레의 대화>는 번역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영어로 이루어진 대화를 영어로 다시 말하고, 받아쓰고, 그리고 한국어로 번역해서 말하고, 받아쓰는 과정에는 여러 갈래의 번역이 등장한다. 아마도 가장 두드러지는 번역은 영어 대화를 받아쓴 텍스트를 보면서 즉흥 번역을 하며 한국어로 대화하는 지점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영어로 대화했던 내용을 다시 영어로 반복해서 녹음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번역’이 존재한다고 본다. 두 대담자는 모국어인 한국어를 내버려 두고, 영어로 원본의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바탕으로 또다시 영어로 대화 나눈 것을 녹음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원본의 대화란 다시 말하면 작품의 프로토타입이 되는 스크립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스크립트는 즉흥적인 대화를 통해 쓰였고, 두 대담자는 시간이 흐른 뒤에 스크립트를 보며 당시의 대화들을 되풀이했다. 두 번째 대화, 즉 녹음에 쓰인 대화는, 첫 번째 대화를 쓴 스크립트를 보며 현재의 시간에 새로운 대화로 다시 구성되는 것이다. 이렇듯 <레의 대화>에서 언뜻 불필요해 보이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 대화들의 총합을 보고, 들으면서, 나는 자신이 발설했던 과거의 말을, 현재의 시간으로 번역하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보르헤스의 무수한 단편 중에는 이상하고 기이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돈키호테』를 번역한 삐에르 메나르에 대한 이야기만큼 이상한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여타 보르헤스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일화 또한 허구인데, 삐에르 메나르는 작중에서 『돈키호테』 1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한 부분을 번역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보르헤스가 칭찬해 마지않는 메나르의 최고의 작품은 원작 『돈키호테』를 스페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어에서 스페인어로 번역한 작품이다. 바로 이 점에서 <레의 대화>에서의 번역의 문제와 연결되는 아주 흥미로운 지점을 찾을 수 있다.
“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집필하려는 게 아니었다 - 그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가 집필하려고 했던 것은 『돈키호테』 그 자체였다. 물론 그가 절대로 원작을 문자 그대로 옮겨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경탄할만한 야심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일치하는-단어와 단어, 그리고 행과 행- 그런 몇 페이지를 쓰는 것이었다.”
세르반테스의 원작 『돈키호테』와 메나르가 번역한 『돈키호테』의 텍스트는 언어상으로 전혀 다름이 없이 똑같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메나르의 언어는 세르반테스의 언어보다 거의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고 말한다.(!) 두 텍스트에서 다른 점이라고는 단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세르반테스의 원작은 17세기에 쓰였지만, 메나르는 똑같은 문장을 두 세기 후에 썼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세르반테스의 경우에는 모국어인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았으나, 메나르의 경우는 프랑스인인 만큼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번역했다는 점이다. 메나르는 모국어인 불어가 아니라, 외국어인 스페인어를 배워서 외국어를 같은 외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니까 <레의 대화>는 참으로 메나르적인 (혹은 보르헤스적인) 번역을 보여주고 있다. 두 대담자는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들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원본을 만들었고, 그 원본을 보며 똑같은 대화를 다시 영어로 나누었다. 메나르의 번역에서 무한한 장점을 발견해 낸 보르헤스와는 달리, 나는 이수진과 대담자의 이 번역 아닌 번역에서 어떤 의미를 끌어내야 하는지 아리송하기도 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들이 번역하고자 한 것은 자신들이 뱉어낸 과거의 말이었고, 그것을 현재로 가지고 와 녹음을 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말을 현재에 와서 다시 한다는 것에서의 ‘번역’이란 정확히 무엇을 옮기는 행위일까. <레의 대화>에 숨겨진 레이어로서 ‘시간성’은 우리가 흔히 일상적으로 행하는 (한 언어와 다른 언어 사이의) ‘번역’에서 놓치고 있는 중요한 지점은 아닐까.
말하는 주체와 언어 사이의 거리 이수진의 작품들이 가리키는 곳에는 어떤 판타지로도 채울 수 없는 언어의 이면이 존재한다. 그 판타지는 ‘완벽한 언어’라는 허상이다. 앞서 살펴본 이수진의 몇몇 작품에서 언어는 온전하게 말하는 주체를 포섭하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언어라는 체계 바깥으로 떠밀려 나오는 무언가를 배설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말하는 주체는 자신이 언어와 붙어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어쩌면 잘 알려진 거짓말일 수도 있다. 언어에 완전히 통합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오는 자기 자신의 어떤 것 -이수진의 작품의 경우에서는 특히 ‘목소리’-을 외면한 채 언어로 자기 자신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것이다. <레의 대화>에서 두 명의 대담자 중 하나는 "우리가 이 대화를 우리말로 했다면 굉장히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았을까"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이루어진 대화에서 이러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제가 한국어를 쓸 때는, 꼭...(웃으며) 반쪽 사람 같은 거예요. <(웃음)> 왜냐하면은 인제, 영어를 사용해서 작업을 하잖아요. <음--> 근데 그, 부분이, 나의 그 부분이, 한국어로는 표현--된--적이 없는 부분들이거든요. <음-->근데, 그게 저한테는 굉장히 큰 부분이구.<으음...> 그래서 한국어로는 그--제가 영어로 표현한 그런, 부분들이 이제 없는 거죠.“ - <레의 대화>에서 발췌
두 대담자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는 특정 언어로 드러낼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이수진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아티스트 북 ≪하이픈≫ 에서 사무엘 베케트의 일화를 기술하는 것으로 이러한 입장을 반복한다.
“사무엘 베케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모국어인 영어로 글을 썼다. 1945년에 그는 불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불어로는 “문체에 구애받지 않는” 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베케트의 소설 Murphy는 1938년에 영어로 출간되었고 1947년에는 작가가 직접 번역한 불문판이 출간되었다. 베케트는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에는 불어로, 나중에는 영어로 저술하였다. En Attendant Godot는 1952년에 출간되었고 1953년에 초연되었으며 Waiting for Godot는 1954년에 출간되었고 1955년에 초연되었다.“
- ≪하이픈≫, 6쪽.
≪하이픈≫에는 베케트 이외에도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쓰는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 거주하는 하진,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인도인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줌파 라히리, 영국령이었던 케냐에서 태어났지만, 서구식 이름을 버린 응구기 와 티용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로 글을 쓰는 한국인 김시종 시인 등이 그들이다. 우리는 종종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모국어가 아닌 특정 언어를 선택하는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왜 그들은 양 언어 사이를 오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고, 특정 행위(여기에서는 주로 작품 활동으로서의 글쓰기)를 위해 특정 언어를 선택하는 것에 이르는 것일까. <레의 대화>에서 작가가 이야기했듯이, 영어로 표현될 수 있는 자신과 한국어로 표현될 수 있는 자신이 각각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수진이 오랫동안 진행했던 <차학경 프로젝트> 의 소재인 예술가 차학경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수진은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지낸 뒤,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교에 다녔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비교적 최근까지 약 이십여 년을 미국에서 지내다가 돌아왔다. 유학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미숙한 영어를 고쳐주거나 통역자처럼 중간에서 자신의 말을 다시 전달해주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작가는 그러한 경험이 불편하고 불쾌했다고 말한다. “내가 하려는 말을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로 전달해주는 것이 싫었다.”는 작가의 고백은, 그동안 ‘언어’라는 피상적인 개념으로 그녀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었던 나에게 비로소 촉각적인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다. 자신이 뱉은 말이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매개되어 전달되는 것이 끔찍이도 싫을 정도로, 이수진은 당시에 언어와 관련하여 주체성에 대한 고민이 컸던 것으로 예상한다. 그녀가 ‘차학경’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학부 강의에서라고 한다. 자신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한국인’ 작가가 타국의 미술 이론 수업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래서 더욱 반가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차학경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가서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산의 경험에서 비롯된 언어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작품에서 드러내었던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작업은 “언어에 관한 것”이라고 언술하고 있다. 차학경이 ‘언어’에 천착하게 되는 계기는 그 어떤 언어로도 온전히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한계에 맞닥뜨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녀에게 ‘언어’란 저항하고 배신해야 가장 첫 번째의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저항과 배신은 언어 안에서 언어와 달라질 수 있는 새로운 국면으로 이행하기 위한 필연적인 부정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하이픈≫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이주와 이산, 식민 등의 경험이 있다. 이러한 경험이 그들이 하나의 언어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 언어와 저 언어를 떠돌며 그 경계에 서도록 이끄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이 글을 쓰기 위하여 어떤 언어를 선택할 때, 그것은 그 언어에 안주하겠노라는 의지가 아니라 모국어 (혹은 제2의 언어)에 대한 ‘저항’과 ‘배반’의 발현으로서의 선택임이 틀림없다. 이주의 경험에서 ‘언어’는 자기 자신의 이방성을 계속해서 일깨우는 어떤 한계로 작용하며 자신을 얽매고 가둔다. 따라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언어의 바깥을 꿈꾸며 언어 이전의 혹은 언어 이후의 지대를 항해하고자 계속해서 언어의 경계를 흐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케트는 “자기 조국에 대해, 자신의 언어에 대해, 요컨대 자기 어머니에 대해 배신자가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가 자신의 작품을 불어와 영어로 각각 쓰는 것은 스스로 언어 안에서 배신자가 되어 버리려는 시도가 아닐까. 한쪽의 언어로만 자신의 작품을 매어두지 않고, 다른 언어를 통해 다르게 존재할 수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이쪽의 것도, 저쪽의 것도 만족스럽게 자기 자신이나 작품을 담아낼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하나의 언어에 갇히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으로서 다른 언어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선택하는 것은 일시적인 합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수진도, 차학경도, 그리고 <하이픈>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는 적어도 그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언어를 배신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의지는 자신의 이방성을 더욱 열어젖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말들의 사이에서 사실 ‘언어’에 관한 이수진의 작품을 다시 글로써 서술한다는 것은 퍽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녀는 ‘말들의 사이’를 유영하면서, 언어가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는 난센스의 지점을 우리 앞에 드러낸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을 또다시 ‘언어’로 설명하려는 순간, 논리적으로 명쾌해지지 않게 되는 덫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껏 이수진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풀어 놓았지만, 정작 이수진의 작품을 만나게 될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그 말은 오랜 시간 베케트를 연구한 어떤 사람이, 베케트의 삶에 관해 쓴 저작에서 밝힌 어떤 역설적인 문장들로 대신하고자 한다.
“운명의 무기인 ‘그런데’나 ‘그러므로’라는 말을 쓰지 않고, 추론에 기대지 않고, 결정의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하고, 그 자신의 작품에 주석을 다는 사람들에게 종종 얘기했듯 “그 빌어먹을 놈의 논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 대신 텅 빔과 충만이 교차하고 부분들이 이리저리 분산하는 몇 개의 시퀀스만을 남기는 것. 말하자면 달랑 가구 몇 점 딸린 방을 두서없이 방문하는 일을 떠올리자.”
Regarding The Distance between Words
Minhwa Yun (Cake Gallery Curator)
Stepping in between Words
In Sync/Split, Sujin Lee speaks as she writes. No, I mean she writes down what she says. I cannot decide which action precedes; however, it is clear that the two actions are deeply interconnected. From the speaking point of view, the speaking voice kindly waits for the hand to finish writing down what was just uttered. Because of this, the voice moves far away from the rhythmic intonation and the speed that are easy-on-the-ear. From the writing point of view, things are not going any better. It is obvious that the hand is writing as fast as it can so that it does not disrupt the speaking flow, but the hand never moves fast enough to catch up to the speaking. The letters lining up from left to right soon lose their sense of direction and begin running here and there on the paper. Since this is how the text is written, it is just too hard to read what it says.
Speaking seems to grow tired while waiting for the writing, and writing struggles to chase the speaking. In Sync/Split, neither speaking nor writing appears to be successful. From watching this simultaneous “speaking-writing,” I manage to make out two things: the voice that fails to speak and the text that is indecipherable. In some ways, Lee attempts to combine the two acts together to track down how they are related to each other. However, the result is that both the "mouth-language" and "hand-language" lose their characteristics as language. The “mouth-language” tends to drag the endings of words and often produces a murmur, and the “hand-language” becomes abstract lines created by the pen running on the paper. We are reminded that the alphabet is a series of unrelated sound units; it is a nonlinear system by nature. However, the meeting between the “mouth-language” and “hand-language” in Sync/Split separates “language” from the speaking voice and the act of writing. The process helps us imagine what writing and speaking may have been like before language was born.
I wonder how the voice and writing came to join language in the first place. Before language was there to assign a meaning, what did the voice express and how? Likewise, before language became a tool for deciphering, was writing something to be “read” or to be "seen?" These questions leave me pondering how we connect the voice with spoken language as well as with written language. Furthermore, they make me think about the ways in which one utilizes the voice and the written word. Most of Lee’s work deals with the space between language, the speaking voice, and the written word. The reason I have chosen to describe Sync/Split in detail, is that I believe it best represents the topics Lee’s work has explored to date. Lee has experimented intriguingly with spoken text and written text; her work leads the audience to contemplate the essence of both the voice and writing. There are many other issues to consider related to the topic: the identity of the speaker and writer when the authenticity of the voice and the written word come together to make meaning, the notion of mother tongue and a second language, the difficulties of translation, etc. One will see all these cultural and social discourses as part of a bigger discussion about Lee’s work. Therefore, the audience must contemplate multiple layers of context in order to understand Lee’s work. Lee does not leave language as it is; she shakes it up, cracks it down, and then re-presents it to us in a somewhat unfamiliar form. This makes up a “skein of thread” that we must hold on to as we enter Lee’s maze-like work.
The Distance between the Voice and Language
In One Horse or Two Horses? (In a Hungry Voice), there are six voices speaking English with accents, and the accents are all different. Lee made a recording of the six voices reciting the same text. The six voices unite at times; but soon they come apart as each follows its own rhythm and intonation. The artist on the screen utters the same words with the six voices simultaneously. Just like the six voices that fail to stay together, the artist's mouth moves in sync with them and goes out of sync, again and again. For the video shoot, the artist recited the text while listening to the recording of the six voices, but later removed her own voice; the artist's voice is no longer audible in the finished piece. It is disorienting watching the artist’s mouth repeatedly going out of sync from the disembodied voices.
I am certain that this strange feeling seeps out of the space somewhere between the voice and language, and this is the space to which that the artist wants us to pay attention. Lee utilized people who speak English with accents in order to highlight the “in-between space.” Someone with an experienced ear may be able to tell where each voice "comes from." The speech of “non-native” speakers tends to carry a certain accent or rhythm of their mother tongue. Even for a native English speaker, his/her speech could have a regional accent depending on where s/he lived. In Korea, there are private institutes where they teach students how to speak "American English" or “British English.” They are based on the idea that they teach people to sound like “native speakers of English.” What a foolish idea it is to believe that there is one way to “sound!” Is there such a thing as “standard pronunciation”? Mastering a language doesn't mean that one speaks and sounds exactly the same as the “standards.” There is no language that makes different voices sound identical. Language cannot process multiple voices and turn them into one same voice. Whichever language it speaks, the voice retains its own authenticity. In One Horse or Two Horses?, the artist stirs up our curiosity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voice and mother tongue by presenting us with six people whose speech reflects their “origins.” This is, after all, a question about how the voice and identity are related to each other. Even if language tries to unify the voices within its system, it fails to alter the authenticity that resides in the voice. Therefore, the six voices never stay as one, in harmony.
According to an ancient philosopher, the voice is like “a soul that breathes life into the body." The voice exists with life―a living body that inhales and exhales with friction between the lips and tongue. The voice is attached to the body and its life. Therefore, the voice reminds us of the living body and also reveals the rhythm, pulse, and “density” of the spirit inside. The voice must be implanted in the body like that in order to exist. One sees the artist tirelessly following the strange rhythm of the six voice’s speech. Her facial expression and mouthing seem empty and unnatural. When the six differently sounding voices overlap, it is hard to differentiate one body from the others. The combination of the soulless voices resembles the sound of a machine. The image of the artist's face trying to follow those voices is strange and machine-like as well. Lee held an artist talk in conjunction with the exhibition The Distance between Words and introduced herself by playing a clip from One Horse or Two Horses? It was as if she were mischievously saying, "Well, guess who I am if you think you can!" By using other people's voices as a self-introduction, it felt like Lee was suggesting a game to play―to show how the voice can open oneself up, or how well one can hide him/herself in the voice. Yes, the voice is like the key to open or lock the door to a person’s identity.
I would like to point out an interesting passage in the script for One Horse or Two Horses? where Lee asks the participants to “voice” their lines in certain manner. The instructions for specific voices in parenthesis are similar to the stage directions in a play. Stage directions help actors contextualize the text and perform it. Therefore, they are usually objective and explanatory. Sujin’s instructions guide the voices to be "angry" or "hungry." As a result, the voices reading these particular lines become distinctively soft, loud, or sharp, causing a dramatic change in the rhythm and pitch of their speech. It is a small part, but the directions clearly highlight the force within language, leading performers to change the manner of their speech. Such performative power of language reminds me of the voice of God. God’s voice is often referred to as "words without a voice." God in the Bible acts and presents his power through speaking. God’s orders become concrete through writing and are passed down as commandments. However, there is no audible voice of God. His words, which did not come with the voice, are used as commandments. The nature of God’s Word resembles that of stage directions in a script. Directors guide actors how to act and speak based on the stage directions, which are not connected to a voice. Therefore, what I consider crucial here is not how angry or hungry the voice is supposed to be, but the ability of written language to compel action without any sound at all.
The Distance between the Voice and Written Language
There is no actual voice connecting God's speech and his Word; God's Word was born without being spoken, without the sound of his voice. Then, is it possible for humans to write without spoken language? As Jacques Derrida wrote, is writing a supplement to speech, really? This is also a question about whether speech is already ingrained in written language as a reminder of the human body, including its limitations. Just as human speaking requires lungs, speech cannot produce a meaning without a voice. In other words, the voice and speech are already connected to each other. Western traditions consider spoken language to be the logos, but written language to be secondary and even inferior. However, their definition of speech does not include the sound of simply released air such as a cough or laughter. This means only the part of the voice that can be broken down and acknowledged by written language is considered as speech in their philosophy. In phonocentrism, only the spoken language, which is articulated and rendered by written language counts as the voice. Written language processes the voice with its symbols and turns it into language. Lee's video work Re-Conversation(s) [sic] uses subtitles in an unusual way to presen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voice and spoken language, and to show how writing joins the two together.
In Re-Conversation(s) [sic], the audience sees and listens to a conversation in Korean and in English. The piece begins with English audio. The screen shows an English text, which is a transcript of a conversation, and is accompanied by Korean “subtitles.” Soon, the audience will find things become strange. The English speaking and writing do not match the Korean subtitles. One can find the reason of this "un-synchronicity" in the work process. (1) The two speakers (Lee and Yu) had a conversation in English before recording their “first audio track.” Several parts of the conversation were selected and transcribed as faithfully as possible. The transcript was turned into a script. (2) They recorded their “first audio track” by reading aloud the script, which is in English. This is the audio that the audience hears first in the piece. (3) The speakers recorded their “second audio” by verbally translating the same English script into Korean on the spot. (4) The transcription of the Korean conversation was used in subtitles in the piece. There are many layers of dictations and translations in the piece. The combined result effectively makes visible the distance between the spoken language and written language.
"I might, I could have spea- speak-- I could have, so you know."
"Eng--not, not everyone."
“Hahahaha!”
"Because I don't have like a set, uh, like, uh, minimum, limit?"
"Because I know the circumstances where, it's just impossible to pay me, but…"
"it's, it's, uh, it's good to know from the start."
Excerpts from Re-Conversation(s) [sic]
In the subtitles, Lee intentionally includes the non-verbal vocalizations and other natural spontaneous elements of speech. They include laughter, drawls, and verbal self-corrections of grammatical errors. Generally, subtitles are only mostly accurate. It is rarely a problem if subtitles do not match the conversation word for word. It is, in fact, not an easy task to translate the elements outside of grammar―such as laughter, a cough, or a stutter―into written language. Lee confessed that she was quite confused by how far she should have gone in terms of transcribing every little detail in the conversation. She also stated that it was much easier writing down the same elements in Korean than in English. The ease or difficulty of this task must depend on how phonetic each language is. When one examines the transcriptions (the script and the subtitle), s/he tends to linger on the parts that do not read easily due to the elements outside language. When this happens, it is as if we discover another aspect of language that we have not known before and find it uncanny. As Derrida reminded us, “[writing] is not a guise for language, but disguise.” Written language is not in the meaning itself; they are separate entities. Therefore, writing can alter and distort the meaning. We do not usually find it strange when we hear the small “non-words” in a verbal conversation. However, when we see the same elements presented in written language, it makes us sit up and have another look. Lee’s “dictation” shows how written language can create discomfort with language itself.
Gilles Deleuze was interested in the elements expressed and experienced through the voice, the things that go beyond the control of language―even if they misrepresent language. In his study on Kafka, Deleuze investigated in “a cry that escapes signification, composition, song, and words,” which is “a pure sonorous material,” not “a composed and semiotically shaped music.” I was able to see a Deleuze-like interest reflected in Lee’s performance piece /f??net?k ?s?mb?lz/.
For /f??net?k ?s?mb?lz/, Lee writes on the concrete ground with a piece of white chalk, only using the phonetic symbols. As Lee selects words from her English dictionary and writes down their phonetic symbols, the audience enters and reads aloud what Lee wrote. Phonetic symbols may be unnecessary for people who are native speakers of English, but if one spoke Korean as her mother tongue like me, s/he would often depend on phonetic symbols to learn how each word should be pronounced. However, the same exact symbols easily disrupt a fluent English speaker’s speech because the unfamiliar symbols may cause him/her to stutter or stumble on words. It will be as if they are solving riddles, guessing what each word is. When the audience realizes which word the symbols signify, they tend to go ahead and say the word, separating themselves from the process of deciphering. Lee reflected on the experience, “I actually used a dictionary made by a British company; therefore it listed pronunciations of British English and American English. Even though I alternated between the two, people didn’t seem to care about the differences and spoke in their own accents.” Those phonetic symbols are carefully designed to represent different sounds, but we are already accustomed to the way our voice leads us to speak. /f??net?k ?s?mb?lz/ presents a situation where the written word as a symbol cannot control the voice. This is the space where the audience slips and falls within language; it is where the voice reveals itself as a pure sonorous material.
The Distance between Periods in Time in Language
Re-Conversation(s) [sic] also brings up the notion of translation as a topic for discussion. The piece shows many different methods of translation: “re-speaking” an English conversation in English, transcribing the “re-conversation,” and interpreting the same conversation from English to Korean and then transcribing it. The most distinctive example may be the improvised Korean interpretation of the English script. I would like to state that another form of “translation” took place when Lee and Yu recorded their own reading of the English script. The speakers specifically chose the English language over their mother tongue, Korean, for their initial conversation, and then read the English script consisting of excerpts from the same conversation. I consider the English script to be the prototype for the piece. The script was created by recording and transcribing the unscripted conversation. After some time passed, the two speakers got together and “repeated” their original conversation by reading the script aloud. The recording, which was used as the first audio track, is actually a new conversation held in present time. Watching the final result of all these complicated processes, which may seem unnecessary, allows me to contemplate the act of translating the words spoken in the past into the present time through speaking.
Jorge Luis Borges wrote many strange, peculiar short pieces, and nothing is more bizarre than the one titled Pierre Menard, Author of the Quixote. This is a fiction like many other works by Borges. In the tale, Pierre Menard is the person who translated the ninth and thirty-eighth chapters of the first part of Don Quixote as well as a fragment from chapter twenty-two. The work Borges considered to be Menard’s best is actually not a translation of Don Quixote written in Spanish to other language, but it’s a translation from Spanish to Spanish. This is where I was able to find connections to the translations in Re-Conversation(s) [sic].
Pierre Menard did not want to compose another Quixote, which surely is easy enough―he wanted to compose the Quixote. Nor, surely, need one be obliged to note that his goal was never a mechanical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he had no intention of copying it. His admirable ambition was to produce a number of pages which coincided―word for word and line for line―with those of Miguel de Cervantes.
Borges states that the language in Cervantes’s original text is almost identical as Menard’s translation. However, to Borges, Menard’s text is almost infinitely richer compared to Cervantes’s. There are only two differences between the two texts: First, Cervantes’s original text was written in the 17th Century while Menard composed the same text two centuries later. Second, Cervantes was a native Spanish speaker and therefore fluent in the language; but Menard, a French man, had to work to master the language and then translated the work. Spanish was a foreign language for Menard, and he ended up translating the text written in a foreign language to the same foreign language.
Re-Conversation(s) [sic] presents a Menard-like (or Borges-like) translation after all. For whatever reasons, the two performers chose English over their mother tongue to have a conversation, created a script, and had the same conversation based on the script in English. While Borges discovers infinite richness in Menard’s text, I am not certain how I can make sense out of this “non-translation” in Re-Conversation(s) [sic]. One thing that is for sure is that what Lee and Yu wanted to translate were words they had spoken in the past, and they did it by brining them to the present time and doing a recording. What is exactly translated in the act of “re-speaking” the words from the past? I wonder if the temporality, the hidden layer in Re-Conversation(s) [sic], may be an important aspect of translation one easily overlooks (when translating one language to another).
The Distance between the Speaking Subject and Language
In the place Lee’s work points us to, there lies a hidden side of language, which may never be fulfilled by a common fantasy we have―the notion of “perfect language.” In Lee’s work discussed in this essay, language does not contain the speaking subject wholly, but evokes a situation where some “part” of oneself is pushed out of the language system. The speaking subject tends to believe that s/he is connected to language, but that may be one of the most widely spread misconceptions. We look away from the part of ourselves, which fails to integrate with language―the voice in Lee’s work―believing that we can express ourselves effectively in language. In Re-Conversation(s) [sic], one of the speakers states that if they had done the initial conversation in Korean, the conversation would have gone a very different way. The same point of view is reflected in other part of the piece.
In Korean, I feel like I am a half person almost because, I am like, I, work in, work in English in my work.
Hmm-mm.
So it's almost like that part of me, hasn't been expressed in Korean.
Mmm―mm-mm.
And that, that's like a huge part of me.
Mm-mm.
So it's almost like in Korean, that part of me is missing.
From Re-Conversation(s) [sic]
The two must believe that part of themselves can be only expressed in a particular language. Lee re-presents this viewpoint in her artist book Hyphen with a story about Samuel Beckett:
Samuel Beckett was born in Ireland and spoke English as his first language. He wrote in English at first, but he started writing in French in 1945. The reason behind his choice of language was that he could write “without style ” in French. The first novel he wrote in French was Murphy (1947), which was a translation of his book in English written in 1938. He wrote En Attendant Godot first and then Waiting for Godot. En Attendant Godot was published in 1952 and first performed in 1953. Waiting for Godot was published in 1954 and first performed in 1955 (6).
Hyphen introduces several other writers who work in a language other than their mother tongue: Ha Jin who is a native Chinese living in the U.S., Jhumpa Lahiri who was born in the U.K. but emigrated to the U.S. with her Indian parents, Ng?g? wa Thiong'o who was born in Kenya when it was a British colony and later rejected his Western name, and Kim Si-jong, a Korean poet who was born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and now writes in Japanese. One often encounters bilinguals choosing the other language over their mother tongue. Why don’t they just freely move back and forth between two languages, but come to choose a particular language to perform a particular act (writing for the characters in Hyphen)? If their reason is aligned with what Lee says in Re-Conversation(s) [sic]―she sees herself broken down into two parts, and each part can only be expressed in English or Korean, but why? I was able to find an answer to this question in the artist Theresa Hak Kyung Cha, one of the subject matters of Lee’s work, Theresa Hak Kyung Cha Project.
After her high school education in Korea, Sujin Lee moved to the United States and attended college. She ended up living in the U.S. for nearly twenty years in total until she returned to Korea. While she was in college, she often encountered people who corrected her English or even “translated” what she was saying in English without her permission, which made her feel uncomfortable and displeased. When Lee told me, "I couldn't stand it when someone else delivered what I was trying to say in their own voice." I began to empathize with her experience almost “tangibly.” Until then, I was too focused on the mechanics of language in her work. I suspect that Lee was very keen on understanding her identity in relation to language. That is why she despised it when her own words were reassembled and redelivered by a different voice to "make sense." Lee first encountered Theresa Hak Kyung Cha's work when she was in graduate school. She must have been surprised and also pleased to discover a Korean artist discussed in an art theory class. Cha was born in Korea, but she immigrated to the U.S. with her family and spent her youth in Hawaii and then in California. In her work, Cha revealed her struggles with language and identity, which was caused by her immigrant experiences, and she herself once wrote that her work was about language.
It seems that Cha came to inquire into the issue of language because she had faced the limitation of language; there was no language where she could ever express herself as a whole. Therefore, language had to be the first thing for her to resist and betray. Such resistance and betrayal was a necessary step for her to take in order to enter a new state of differentiating oneself from language within language. The writers mentioned in Hyphen share similar immigrant or colonial experiences. Those experiences prevent them from settling with one language but lead them to wander around different languages and eventually reach the “borders between languages.” When they choose a language to write in, that does not mean that they are willing to settle in that language, but their action manifests their resistance to―and betrayal of―their mother tongue (or their second languages). In immigrant experience, language functions as a restriction, continuously reminding of the foreignness of the self, and “imprisoning” the self. Therefore, one has no other choice but to dream of a space outside language and to aim to explore the space which is situated before and after language. One must blur the “language borders.” Beckett talked about “being a traitor to his own homeland, his own language―in short, going against his own mother.” Writing the same book in French and then in English may have been his attempt to be a traitor to language within language. He did not want to have his work strapped down in one language, but wanted to show that he could exist differently through another language. Even if one failed to express oneself in one language, s/he would still be on a quest to find another, as a statement to resist being tied down to language at all. It may be just a temporary settlement for them to choose another language over their mother tongues. However, Sujin Lee, Theresa Cha, and all the writers mentioned in Hyphen are willing to be traitors to language in order to escape its “confinement.” This is no different from having one’s foreignness in plain sight.
In-between Words
Admittedly, discussing Lee's work, which is about language, with language does not seem suitable. In her work, Lee navigates the space between “words” and presents a nonsensical place where language stops being itself. Therefore, when one tries to talk about Lee’s work in language, he/she gets trapped in the space that’s not logically clear. I have written about Lee’s work at length in this essay, but what I really want to say to her future audience is something quite different. I will have this paradoxical quote speak for me―from a book about Beckett's life, written by Nathalie Leger, a dedicated Beckett scholar.
No words such as "however" or "therefore,” which are the weapons of fate. No inference. Have the least amount of determination. No “bloody logic”―just as [Beckett] said to those who commented on his work. Instead, picture some sequences alternating between being empty and full, dispersion of fragments, and random visits to rooms with a few pieces of furni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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