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연 Juyeon Seo
학력
2014 첼시 예술대학, 순수미술, 석사 우수 졸업, 런던, 영국
개인전
2016 <비정형의 도형>, 플레이스막, 막사, 서울
2015 <산속의 늙은 노인>, 공간 사일삼, 서울, 2015
단체전
2014 , Triangle space, London
Education
2014 Chelsea College of Art, MA Fine Art, Distinction London, UK
Solo Exhibition
2016 , placeMAK, MAKSA, Seoul
2015 , Space Four, One, Three, Seoul
Group Exhibition
2014 , Triangle space, London
“우리는 행복해요.”
정은영 (작가)
빚과 빛
우선 ‘빚’이라는 문제적 글자에서 시작해보자. 어지간한 사람들은 속이 좀 답답해 올 것이다. 구글에 ‘국민 일인당 빚’으로 검색어를 넣어보면, 2016년 2월을 기준으로 약 2,761만원, 2015년 대비1년만에 236만원이 늘었고, 가계, 기업, 정부의 금융부채는 총 4,713조원으로6.2%의 상승세를 보인다는 엄청난 양의 수선스런 경제뉴스를 접할 수 있다. 그렇다. 답답함은 우리 거의 모두가 빚더미를 딛고 위태롭게 서있기 때문에 가능한, 실은 크게 놀랄 이유도 없는 증상이다. 2,761만원이라는 국민 일인당 빚의 금액은 현재 내가 지고 있는 빚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내 경우는 집이나 차와 같은 자기재산을 구축하기 위한 빚이 아니라, 순수하게 학자금에 관한 빚이다. 한 달에 몇 차례씩 학자금 융자의 이자와 원금을 인출해 간다는 알림 문자는 언제나 짧은 한숨을 동반한다. 한 차례만이 아닌 이유는 여러 학기에 대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딩동딩동 울리는 인출 알림은 또한 수 많은 ‘은행대출우대’, ‘카드대출’, ‘자동차대출’ 등의 스팸 문자와 한 덩어리로 아우성댄다. ‘학자금’이라는 성격은 어쩐지 빚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학자금이야말로 빚과 완전한 협력관계에 있다.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는 장미빛 미래와 희망이라는 최음제에 중독되고, 학벌쇄신이 조장하는 안전한 신분상승이라는 음모에 가담해 우리는 기꺼이 빚을 지고 말기 때문에.
서주연의 작품, 각각의 제목을 부여 받지 못한, 그래서 다만 ‘이 작품’이라 지시할 수 밖에 없는 한 점은 제 몸의 전면에 어쩐지 사무적이고 웃음기 하나 없는 고딕체로 ‘빚’이라는 문자를 달고 있다. 글자의 주변은 붉다. 그냥 붉은 것도 아니라 글램(glam)하게 붉다. 그렇다고 육감적이거나 퇴폐한 것 같지도 않다. 퀴어하지도 않고, 크리스마스의 낭만적 반짝임도 아니다. 그냥 평평하게, 뻔뻔하게, 성실하게, 집요하게 반짝댄다. 반짝이 안료를 얼마나 들이 부었을까? 괜한 물감 값 걱정을 불러내는 반짝임이다. 그래서 또한 그것은 ‘빚’이다. ‘반짝이는-빛’이 아니라 ‘반짝이는-빚’. 희망으로 고문하는, 언젠가는 내심 ‘빛’이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머릿속에서 돈 걱정을 떠나지 않게 만드는 ‘빚’이다. 이 ‘빚’의 꽉 찬 넓이와 높이 뒤편에는 그에 대응하는 또 다른 ‘빚’이 자리한다. 이번엔 하얗다. 하얗긴 하얀데 티없이 순수하게 하얗지는 않다. 쩍쩍 갈라진 균열을 겨우 붙들어 맨, 맨들거리는 흰 표면이 애처롭도록 변변치 않다. 그런데 ‘빚’이라기엔 글자의 받침이 모호하다. ‘ㅈ’ 받침이 들어가야 할 자리는 조금 이상하게 변형된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거치되어있는 훼손된 식기건조용(으로 추정되는) 채반 위로, 몇 개의 접시, 검게 썩은 바나나, 스푼과 포크, 그리고 하얀 뇌가 위태롭게 걸쳐 있다. 이들은 ‘빚’의 번역일까, ‘빚’의 서브텍스트일까, ‘빚’의 재현일까? 이것은 모두 다이고, 또 다른 ‘빚’이며 ‘빛’이 되었을지도 모를 어떤 소외는 아닐까. 등을 맞댄 이 두 면의 빚의 메타포로 이루어진 세계는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두 면의 ‘빚’은 캔버스라는 회화의 근원 위에 조형된다. 두 개의, 두 면의 큰 캔버스는 익숙한 목재구조의 원칙을 따라 하나의 조각물처럼 세워진다. 캔버스의 '왁구'가 조립되는 쪽매 맞춤과 이음의 방식이 반복되고, 이 두 개의 캔버스를 관계시키는 목재들간의 복잡한 접합부에 철제 보강물이 보충되면서 두 면의 ‘빚’은 약간의 사이공간을 품고 서로를 지지하며 일어선다. 문자는 캔버스 위의 회화가 되고, 그 회화를 이루던 캔버스는 조각이 되고, 그 조각의 틈과 언저리에 다소 흉측한 이야기들이 덧붙는다. 표면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관습을 잘 행하던 캔버스의 엉성하고 기괴한 뒷면, 혹은 사이-공간이 생겨난다. 작업 이후의 부산물로 남았을 안료통, 종이로 조야하게 만들어진 목잘린 비둘기 조각들, 아마도 그것들을 만들기 위해 쓰여졌을 부스러기 골판지가 작품 곳곳에 잠복하던 개념들의 의미망을 기민하게 연결해, 서툰 이야기를 꾸며대기 시작한다. 이는 마치 우리 모두의 ‘빚’이 그 거부할 수 없는 이유와 사연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 놈의 돈’에 얽힌 서글픈 사연들, 끔찍한 사고들, 모멸 당한 인간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하라 외치는 희망의 알리바이들이 우리를 닦달하고 있다. 여전히 반짝이고 번들대는 두 개의 ‘빚’이 외부를 향해 제 존재의 자명함을 변함없이 외치는 와중에도.
반짝임과 번쩍임
서주연은 ‘빛’도 제작한다. 이 역시 작품명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이 작업은 기표인 ‘빛’과 진짜 ‘빛’의 물리적 발생, 그리고 그 사이를 헤메이는 기의로서의 ‘빛’의 관계를 수행함으로써 존재한다. 작가는 빛 그 자체를 제작했다기 보다는 빛이 빛이여야하는 조건들을 제작했다. 그리고 그 제작된 빛이란, 빛을 소재화 한 관습적 조형물 덩어리라기 보다는 ‘빛’이 당최 무엇이길래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라는 다소간의 분노를 드러내는 과장된 제스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빛’ 조각은 사실, ‘빚’ 조각보다 좀 더 멋있고, 주목받고, 으스댄다. 그는 ‘빚’처럼 ‘뒷면’(혹은 사연, 혹은 배후, 혹은 어떤 숨겨진 역학)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무려 9개나 되는 램프의 막강한 광량을 정면으로 맞으며 무대 위의 주연배우처럼 당당하다. 그런데 이 빛을 다시 비틀어 보자면, 이 빛은 빛의 밝고 명료한 속성을 이미 넘어선 지나친 과잉이다. 붉게 흐르는 빛이라는 문자 주변은 발광하는 야광안료를 바탕으로 삼고, 센 광량의 조명조각이 뿜어내는 진짜 빛과 경쟁하듯 서로를 비춘다. 빛이 어두움을 밝히는 선의를 보이지 않고, 되려 상대 빛을 겨눔으로써 빛과 빛의 충돌은 휴지기 없이 과열되고만 있다.
빛과 빛과 빛. 빛을 비추고 비추고 비추는 빛의 무한한 동어반복. 그 과열한 빛은 서울도심을 뒤덮은 떠들썩한 간판, 광고판, 전광판들의 발광하는 빛에 피로한 우리에게 대단히 새로운 미학적 경험일 수는 없다. 우리는 그 빛이 매우 자주 더 나은 삶을 거짓 치장하는 악덕을 자행해 왔다는 것을 안다. 이를테면 전광판의 무수한 램프들이 발광하는 국정홍보영상이나 대출광고문구 같은 것. 모든 개인들을 위한 자본과 신용의 평등-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이 그럴듯한 민주적 개념이 현혹하는 자애로운 국가의 통치술. 거대한 도시에 점점으로 박힌 '빛-글자'들이 실은 '빚-글자'임을 알 때 조차, 우리는 그 과잉한 스펙터클에 어리석게 미혹되곤 했다. 작가가 사용한 반짝이나 야광 안료 따위는 이 세계를 집어삼킨 번쩍이는 빛의 통치에 저항할만한 힘은 없어 보인다. 빚으로 연명하는 모두의 근근한 삶으로 채워진 빛에 점령당한 세계가 유토피아일 리도 없다. 재난 속의 삶-일상적 재난이 우리 앞에 펼쳐질 뿐이다. 서주연의 '빛- 캔버스'와 '빛-조각'의 대면은 재난을 불러온 권력적 빛 앞에서 어떤 결단을 하고 있는지를 질문함과 동시에, 세계를 향한 개인의 감각이 완전히 바뀌어야 함을 경고한다. 충분한 빛은 모든 것을 자명하고 명백하게 만들겠지만, 과잉의 빛은 우리를 눈멀게 할 것이라는 경고.
이 과열된 번쩍임 앞에서, 그러니까 이 일상화된 재난 사이에서, 작가는 또한 서로를 마주한 너와 나의 존재조건과 서로를 보는 문제 등에 대해 의문한다. 그는 잘 이해할 수 없다. 이 초현대적인 삶은 왜 돌연 재난이 되었는가. 나는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 시대의 빛은 왜 더 큰 어두움을 만드는가. 왜 국가는 통치로 위장한 폭력을 거듭하는가. 왜 자본은 우리에게 자유를 내어주지 않는가. 왜 노동은 우리를 해방시키지 않는가. 왜 나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타인의 희생이나 모종의 거래가 필요한가. 왜 타자의 삶은 이토록 무감각한 거리를 갖게 되었나. 왜 우리는 도래할 재난을 알면서도 막아내지 않는가.
왜 우리는 이토록 불행한가.
문자와 딩벳(dingbat)
그런데 예술은 우리를 불행으로부터 구원 할까? 서주연은 사무 노동자에서 예술 노동자로 삶의 자리를 바꾼 적이 있다. 삶의 자리를 이동한다는 것은 종종 혹독한 자기희생, 혹은 타인의 희생이 담보된 어떤 이기적인 강력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 경력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에 누구보다도 깊은 감회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그것이 곧 행복의 감각을 불러낼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사무실의 책상받이로, 모니터를 대면하면서 기계적으로 감각했던 세계의 논리가 비로소 그의 신체적 감각과 사유의 질감으로 다가오는 것이 못내 감동적이었던 모양인지 이 경험은 왕왕 작업과정에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개입한다. 그의 작업에는 재능있는 화가의 특별한 감각으로 그려낸 신체화된 드로잉이 아닌, 컴퓨터의 자판으로 불러내는 딩벳폰트와 의미의 상징으로서의 기호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러한 조형적 선택의 관성으로부터 그의 사무직 시절의 삶을 얼마간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 그의 작업은 작가 자신의 자그마한 신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큰 스케일과 육중한 부피감을 가질 때가 많다. 이 역시 수없는 페이퍼워크의 반복 속에서 문자화되고 개념화된 물질과 재화만을 무덤덤하게 감각하던 삶을, 완전히 즉물적이고 육체적인, 숨이 차고 땀 흘리는 감각으로 바꾸어내고 싶은 간절함으로 읽히기도 한다. 담담한 도상을 불러내는 작가의 움직임엔 한껏 힘이 실린다.
여전히 ‘빚’과 ‘빛’사이에서 진동하는 서주연의 또 다른 작품들은 눈이나 귀와 같은 감각기관을 딩벳으로 불러내고, 재난의 폭발음이나 굉음, 연기와 만화적 제스쳐같은 것들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해 문자의 자리를 대리하게 하기도 한다. 문자와 딩벳, 사물과 상징, 기표와 기의가 서로 갈등하는 동시에 조화하는 역설은 노동과 예술, 회화와 조각, 평면과 공간의 이항으로, 그의 작업의 내적 논리로, 계속해서 확장한다. 이러한 작가의 조형적 선택은 재료를 다루고 구조와 공간을 연출하는데에도 자주 적용된다. 간결하고 매끈한 재료가 거칠게 힘을 준 행위들과 자주 만나거나, 한결같이 예쁘고 광나고 반짝이는 형상과 표면이 위태롭고 위험하고 폭력적인 의미와 교묘히 결합하고 또 긴장하며, 개인적 경험과 감각의 서사를 거의 폐허에 가까운 공간과 만나게 하는 식으로. 물론 이와 같은 조형적 방법론은 불화와 역설 안에서조차 미학을 발견하는 현대미술의 양식적 관성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품제작 과정과 전시공학의 측면에서 발견되는 작가의 지나치게 빈틈없는 연출이나, 우연이 일어나기 힘들어 보이는 성실함은 그 역설의 미학을 뛰어넘지 못할 때가 많다. 또한 작업의 조형적 원칙들로 자주 이용되는 양면성과 투명성, 반영성 같은 것들은 일종의 저항적으로 부조리한 언어의 발명을 기대하게 하지만 쉽게 주저한다. 그의 수많은 드로잉들은 그래서 조금 힘이 없다. 그러나 이 힘없는 말-종종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지나치게 몰두하는 세밀함을 포함하여, 그 힘없는 조형언어들은 그러므로 힘센 이미지도, 단호한 주장도 아닌, 보다 머뭇거리고 쉬이 속마음을 들키고 가끔은 침묵하는, 얇고 옅고 미미한 반복적 질문의 중층을 성실하게 쌓아 올린다.
예술은 아마도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좀더 집요하게 행복에 대해, 어쩌면 불행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는 애써 무디게 눌러두었던 감각을 깨워내 예술의 논리로 사유하는 법을 고안하고 또 고안했을 것이다. 그저 존재함으로써 규범적 세계를 채우던 각각의 사물들이 이제 작가에게 소환되고 해체되고 재조합된다. 예술언어가 조직되고 갱생되는 내적인 논리들, 혹은 우발적 우연성들을 서서히 긍정하며 작가는 좀 더 촘촘하게 모든 역설을 물질로 조형할 수 있다는 신념을 어느 순간에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모호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해야하는 세계, 힘이 없지만 그것을 부단히 존재하게 하는 세계. 문자를 조합하던 키보드 자판이 형상(딩벳)을 내뱉는 어떤, 순간.
다시 빚과 빛
얼마전 한 젠더연구자로부터 ’아가씨대출’ 이라는 용어를 전해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이 말은 소위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만 신용을 부여하는 여성전용 대출의 한 형태다. 그라민 은행이 시작한 ’마이크로크레딧(Microcredit)’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금융서비스에의 민주적인 접근권은2005년 유엔에 의해 곧 인권임이 천명되었다. 이에따라 경제권이 부여되지 않았던 빈곤계층, 특히 여성들에게도 빈곤을 타계할 기회가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여성인권의 의제가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소액대출상품이 제공되었고, 특히 한국사회에는 전례없이 놀랍도록 다양한 ’여성전용’ 대출상품이 범람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후 연구는 다시 한번 충격적인 결과를 내놓는다. 이러한 금융구제활동이 여성들에게 더 나은 경제권을 제공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무자비한 폭력으로 여성을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독 여성젠더가 지켜야하는 어떤 관습적 가치가 ‘수치(shame)’로 탈바꿈되지 않도록, 여성들은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가씨 대출’이라는 금융상품은 ‘여성임’을 신용으로 환산하는, 즉 여성의 성과 몸을 금전으로 대리하는 것을 정식화하는 자본주의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다.
서주연의 빚/빛-조각은 이러한 자본의 논리가 뱉어낸 삶의 구석진 감각을 기어이 일깨운다. 일상적 재난은 이와 같이 세계의 구조적 작동방식의 비밀을 알아챌 때 더 끔찍해 지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논리학의 유서깊은 개념을 앞세워 보편성을 정치(精緻)하게 만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삶이 남들과 다를 것임을 상상한다. 모두의 특별한 삶, 경쟁적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 ‘노오력’하는 삶. 자신만은 구조적 제도에 지배 받지 않을 것이라는 이 기이한 신념. 그것은 탈근대적 삶의 형태라기 보다는 공공의 감각이 완전히 결여된 특권화된 구별짓기와 거대한 프로파간다가 되었다. 자본의 속내를 감추고 행복의 헛된 이미지를 생산하는 세계의 일원으로서 예술가는 어떤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을까? 서주연은 박이소의 유작 드로잉으로 제작된 거대한 설치물, ’우리는 행복해요(2004)’를 처음 마주했을 당시의 충격에 대해 여러차례 말하곤 했다. 이 거대한 행복의 역설이 서주연의 작업으로 계승된다. 이 ‘웃픈’ ‘빚’의 역설을 또한 역설의 예술로서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흔들리는 삶들에게 그가 묻는다. 모두 안녕들 하신가, 오늘은 이자 연체를 무사히 넘겼는가? 성실한 노동자인 당신의 일자리도 아직 무사한가? 타인의 고통에 비해 당신은 이만하면 행복한가? 당신의 삶이 오늘도 무사히 재난을 빗겨갔음에도, 우리의 빚은 아직 희망의 빛으로 남았는데도, 그런데도 왜, 우리는 아직도 이토록 불행한가?
‘We Are Happy’
-siren eunyoung jung (Artist)
Debt and light
Let’s start off with this problematic word ‘빚’ (debt), which for many sits like a knot in the pit of their stomach. A Google search for ‘South Korea’s household debt per capita’ returns pages of economic reports stating that as of February 2016, debt per capita is now 27 million won, or about $25,000--up 2.36 million won from the year before. Total gross debt of the country including household, corporate and national debt amounted to KRW 4,713 trillion ($300 billion)--an increase of 6.2% over last year. Yes indeed. It should be no surprise then that frustration is a common symptom for people stuck in such insurmountable debt. The average household debt per capita, 27 million won or about $25,000, happens to be the figure of my own personal debt. In my case, I didn’t accumulate debt by acquiring assets such as a house or car, but by taking out education loans. Several times a month I receive SMS alerts notifying me that a portion of principal and interest for my loans are being withdrawn from my bank. The reason why I receive these ongoing notices every month is because the amount is for several semesters. Their incessant dings and dongs are accompanied by a roar of spam messages for ‘prime rate bank loans’, ‘credit card loans’, and ‘automobile financing’. ‘Educational expense loan’ may sound different than the word ‘debt’, but they are quite nearly the same thing. We gladly owe for what we are all addicted to: the aphrodisiac called hope, the bright future yet to come we take part in the conspiracy of upgrading our educational specs to assure a safe way to higher personal status.
Juyeon’s works forego individual titles such that we can only call them ‘work’, and amongst them we find one work with the word ‘빚’, in businesslike Gothic font without a hint of a smile on its face. It is encircled in a red outline. Not just red, but glamorously red. Not voluptuously or decadently so, either. It’s not queer nor does it twinkle romantically like Christmas. It blinks flatly, shamelessly, sincerely, and incessantly. How much glitter has she coated it in? This twinkling made me wonder about its cost, and thus this twinkling itself owning a debt. The ‘twinkling lights’ are now ‘twinkling debts’. And it’s very ‘twinkling-debt’ and not ‘twinkling-light’ that makes us constantly think about money yet also makes us blindly hope that ‘debt’ might turn into ‘light’ someday. Alongside and responding ‘빚’ (debt) is another ‘빚’ (debt), also a signboard of similar size and shape. This time it is covered in white but it doesn’t offer a sense of innocence. The slick and shiny white surface rests feebly on a crevice. However, the placement of the bottom consonant ㅈ in 빚 (debt) is somewhat uncertain. The support character ‘ㅈ’ making final consonant for ‘빚(debt)’ is strangely transformed. It has been replaced with plates; also a decayed banana, utensils and a white brain are loosely positioned on a damaged dish rack. Are these objects a translation, subtext or reproduction of debt (빚)? Perhaps they represent everything as well as another meaning of debt (빚) and the leftovers from what could have become light (빛). Positioned back to back, these two metaphors for debt (빚) are not hopeful at all. The sculptures are born out of the structure of painting, canvas.
Two pieces, two sides of canvases are stood on like a sculpture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familiar timber structure. The parquetry-work and seaming method to assemble the ‘stretcher’ of the canvas are repeated, and also the reinforcing metals are supplemented on the complicated connections between wood constructions, then finally two sides of ‘Debt’ stand up, supporting each other and embracing a slight gap in between. The text becomes a painting, the canvas with the painting becomes a sculpture, and there are dreadful side stories lurking. Loose and strange back side of the canvas which normally should exist as the surface or a gap-space appears. A discarded pigment container and leftovers of corrugated cardboard shreds--probably used to make a crudely fashioned pigeon head next to it--are placed in a space that might normally be covered, but remain exposed behind the canvas. These components pull out and connect hidden and subtle contexts about the work. Also, they speak as if everyone’s ‘debt’ exists as an unavoidable reason and side story. These objects describe another side of debt: the grim stories, terrible accidents, and humiliations that are entwined with the ‘damned money’ in the real world, and how we are endlessly haunted by the hopeful messages of overcoming those. All the while, the twinkling and glossy pieces of ‘debt’ are claiming their existence in the world.
Twinkle and flash
Seo makes ‘빛’ (Light) as well. ‘Light’ also could not acquire its name yet this work exists as a relationship between light as signifier, the physical property of light, and wandering in the limbo of the signified meaning of light. Seo produced conditions that define the identity of light instead of presenting light as it is. Plus, this production does not look like a conventional sculpture utilizing light; it looks like more of an exaggerated gesture out of anger, towards the reality of light that generates debt. When compared to the ‘debt’ sculpture, the ‘light’ sculpture appears more elaborate, attractive and arrogant. ‘Light’ does not have a rear side (or side story, background, hidden and dynamic, for that matter); it is rather the confident lead actor on a stage showered with powerful light from 9 pieces of UV-lights. In other perspective of this ‘light’, it has already gone beyond its bright and clear attributes. The surroundings of the red-rimmed word ‘light’ basing on fluorescent pigments, shine on each other, as if they are rivaling against the real light from the powerful light sculpture. Instead of shining into the darkness without showing its goodwill, the two lights face each other and the collision overheats endlessly.
Light, Light and Light. There is the endless repetition of light as a verb that lights up the light. It is not much of a new aesthetic experience for us who got sick of excessive light from billboards hanging like a haze over Seoul. We are very aware that these lights have committed misconducts by disguising a false promise for a better future a lot often. One example of false promise can be found in promotional video of a government agency or in advertisement for private loans on huge, luminous screens. The benevolent governmental technique with credit equality for every person - which the capitalism deceives with this plausible democratic concept. Even though we know that the embedded words of ‘light’ scattered around the city are really ‘debt’, we are foolishly seduced by their loud spectacle. Seo’s glitter or the fluorescent pigment looks powerless in front of the reigning light which devoured this world. And this could not be a utopia where the world is seized by light and lives barely survive in debt. Living in disaster - daily crisis, is all opened in front of us. The confrontation between ‘light-canvas’ and ‘light-sculpture’ question what kind of resolution has to be made in front of the powerful light and warns to re-engage one’s sensitivity towards the world. The warning that the enough lights would make everything clear and definite, but the excessive lights will make us blind.
So before this excessive light, that is in this daily crisis, Seo questions about how we interact with others; about my existence and yours, and about our ways of seeing each other. Seo is not so sure herself about how this ultra-modern society abruptly became a crisis. Why am I myself and not you? Why does light in this time create more darkness? Why does a nation repeatedly mask violence in authority? Why does capitalism not offer us freedom? Why does labor not emancipate us? Why other’s sacrifice or a certain deal is needed to earn my freedom and happiness? Why is there an imperceptible distance in life between myself and the others? Why are we not preventing the predictable forthcoming disaster?
Why are we so stuck in our own misery?
The Letter and the Dingbat (the Keyboard Symbol)
Can art save us? Seo migrated from working in an office to being an artist. Changing careers often requires harsh self-sacrifice or an egoistic strong will sacrificing others. Seo seems to be grateful that she has been able to continue her career in the art field again, however I am not quite sure if that can necessarily bring happiness. Nonetheless, since she might be affected by the fact that the logic of the world which she mechanically perceived facing a monitor as a working furniture in the office finally approached to her as physical sense and texture of thinking, these experiences thus applied to her artwork in both positive and negative ways. In her works, instead of skillful drawings by a talented painter, dingbat from a keyboard and sign as a symbol are frequently used. From such inertia of her formative choice, her life as an office-worker could be assumed to some extent. On the other hand, we also see that these works usually are executed on a huge scale and volume that go beyond the small size of the artist herself. This also can be read as Seo’s desire to change the flat world of repetitive paper works and handling conceptualization of materials and commodities to the sweating world of pure physicality. Seo’s movements resembles a calm image, vested with strength.
The other works still vibrating between ‘debt’ and ‘light’, call sensory organs such as an eye and ear into dingbat, or let substitute the position of the letters with symbolic imagery of explosion sound or a roar, smoke or cartoonish gestures. The conflicting yet harmonious two paradoxes of text and dingbat, object and symbol, signifier and signified, is continuously extended to a transposition of labor and art, painting and sculpture, two-dimensional and three-dimensional, and as an internal logic of her works. Such formative choices in Seo’s work is often observed from her handling the materials and directing the space. Concise and slick materials matched with rough gestures and beautiful forms are carefully and dangerously united or contended with precarious and violent meanings; in the manner of personal narratives and sensory experiences to be juxtaposed with desolate space. These kinds of her formal choices obviously look like following a stylistic choice of the contemporary arts which finds aesthetics even in paradox and dispute. However, her meticulous direction found in execution of the exhibition space, the fabrication of the works, and also the artist’s diligent effort which seems less likely to arouse coincidences, often fails to jump over the aesthetics of paradox. Also, formal elements like double-sidedness, transparency and reflectiveness frequently used in Seo’s work let us expect an invention of a fiercely irrational language, but it does not come. So, her drawings are somehow listless. These fragile words--overly sensitive in every way--build thin layers of questions repeatedly and atop one another. The kinds of questions are not a powerful image or a solid opinion, but more of a lingering; occasionally revealing their intentions, and sometimes falling into silence.
Art might have not succeeded to completely changing Seo’s life. However, it may have led her on this continuous pursuit to answer questions about happiness and unhappiness. Seo must have planned carefully how--using art--she could revitalize her once unwanted and hindered senses back to life. The objects which filled up the normative world only by its existence, were brought, dismantled, and then reassembled by her hands. Seo must have found a certain conviction that she can handle portraying paradox more closely with materials as she gradually affirmed the internal logic in which language of art is organized and regenerated or coincidences. The world which is ambiguous yet should be enough as it is, and frail yet continuously sustaining. In the moment, when the keyboard combining letters suddenly spit out the shape (dingbat).
Back to debt and light
I recently encountered a term called the “Agassi loan” from a gender researcher and was truly shocked. This particular form of loan system exists exclusively for young women (agassi) in the commercial sex industry. The democratic access right to financial services was later declared as human right by the United Nations in 2005 based on the notion of “Microcredit” which Grameen Bank first launched. Accordingly, an argument that the opportunity to eradicate poverty must be reachable to poor people, especially for women, has become an important agenda of women’s rights. Ever since then, small loans for women have been offered, and especially in Korea, unprecedented and surprisingly various type of loan products “only for women” overflowed. However, later research revealed a shocking fact: rather than empowering women financially, but these loan structures rather forced women out to cruel violence. Because, women should do whatever it is necessary to repay their debt to not let a certain customary value to which women has to abide by be transformed into a shame. Thus, the “Agassi Loan” which converts ‘womanhood’ to credit, is so to speak a way to expose the intention of capitalism that formalizes the substitution of the gender and body of a female to money.
Seo’s debt/light-sculptures shine a light on secluded matters in everyday life that capitalism has left behind. Since the daily crisis becomes even more miserable for us when we find out the secret of how the systems of world work, we deliberately close our eyes and ears. People rather imagine that their life is going to be different with others than making universality more exquisite and intense by putting forward the time-honored concept of “logic for hasty generalization”. Remarkable life of all. The life that competitively ‘exertive’ for happiness. This strange belief that oneself will not be controlled by the structured system. Such thoughts have become more of a discrimination from the privileged class and a huge propaganda rather than a post-modern lifestyle. As a member of this world that continuously manufactures false images of happiness hiding real intention of capital, what kind of image can an artist make? Seo frequently mentions her experience of seeing Yi-So Bahc’s posthumous large-scale sculpture entitled ‘We are Happy’ (2004). Ever since then, Seo’s work has inherited Bahc’s paradox of happiness. This ‘tragicomic’ paradox of ‘debt’ should be only conveyed through the art of paradox. Seo asks all in wavering life: ‘how are you doing?’, ‘did you pass the overdue today?’ ‘Do you feel secure in your place in the workplace?’ ‘Are you happy in comparison to the miserable life of others?’ Although we managed to live today by avoiding disasters, and our debt remains as a light of hope--yet why are we still so hope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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