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혜 (1989)
개인전
2017 《Xagenexx》, Onground2, 서울
2016 《Dear. Drops》, 아카이브 봄, 서울
주요 단체전
2017 《층과 사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7 《매체 연구: 긴장과 이완》, 대구미술관, 대구
2017 《A Snowflake》, 국제갤러리, 서울
2016 《서울 포커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No Longer Objects》, 북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6 《트윈픽스》, 하이트컬렉션, 서울
2015 《오토세이브: 끝난 것처럼 보일 때》, 커먼센터, 서울
2015 《굿-즈》, 세종문화회관, 서울
2015 《평면탐구: 유닛, 레이어, 노스텔지어》, 일민미술관, 서울
2014 《오늘의 살롱》, 커먼센터, 서울
2013 《Placebo Factory》, 63회 홍익대2017 회화과 졸업전시회,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서울
2012 《Spring Water》, 2012 부산비엔날레 ‘배움의 정원’, 부산진역, 부산
Junghae Park (1989)
Solo Exhibitions
2017 Xagenexx, Onground2, Seoul
2016 Dear,Drops, Archive Bomm, Seoul
Selected Group Exhibitions
2017 Layers and Spaces,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Gwacheon
2017 Media Study : Tension and Relaxation, Daegu Art Museum, Daegu
2017 A Snowflake, Kukje gallery, Seoul
2016 Seoul Focus NO LONGER OBJECTS, Buk-Seoul Museum of Art, Seoul
2016 Twin Peaks, Hite collection, Seoul
2015 AUTOSAVE : When It Looks Like It Is Over, Common Center, Seoul
2015 Goods, Sejong Culture Center, Seoul
2015 Crossing Plane :Unit, Layer, Nostalgia, Ilmin Museum of Art, Seoul
2014 Today's Salon, Common Center, Seoul
2013 63th Graduate Exhibition, Hongik Museum of Art, Seoul
2012 Spring Water, Garden of Learning, Busan Biennale, Busan
박정혜 《Xagenexx》 : 빛 안에 잠겨있는 탁월한 기호들의 넘침
방혜진 (비평가)
X0
전시 제목 ‘Xagenexx’는 언어화를 거부하는 무의미의 기호다. 특정 언어로 독해되지 않으려는 이러한 선언적 태도는, 그러나, 여기에 주의 깊게 읽혀야 할 것들이 있음을 반증한다. 읽히지 않겠다는 저항의 의도를 충족시키는 것은 오류를 각오한 채 읽고 또 읽어보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사실, 이 ‘무의미한’ 단어 ‘Xagenexx’가 본래 어떠한 ‘유의미한’ 단어로부터 비롯되었을지를 간파하기란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x의 자리에 원래 있던 알파벳의 정체가 아닐 것이다. 박정혜 작가 스스로 이 출발점이 밝혀지는 걸 꺼리기도 하지만, 실제로 보다 주목해야 할 차원은, 본래의 알파벳을 능청스럽게 대체하고 있는 ‘x’의 다층적 지위이다. 그것은 ‘agene’ 양쪽으로 포진해있음으로써 알파벳 x를 가장하나, 또한 그 자리에 다른 알파벳이 있었어야 함을 지시하는 미지의 값 x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알파벳을 지우는 행위로서의 수행적 x이어야 하고, 덧붙이자면 ‘a gene’, 곧 어떤 유전자의 양편으로 확산되고 있는 생명의 움직임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이 글은 제목 ‘Xagenexx’를 탈언어화시키는 결정적 요인 ‘x’를 일종의 변수로 설정, 이에 대입 가능한 (거짓) 값들을 추정해보고자 한다.
X1
전시장에 들어서면, 관객은 수많은 x의 출현과 마주하게 된다. x의 형상이 회화들의 표면에, 또한 전시장 두 곳에 분포된 유리창 표면에, 촘촘하고 가득하다. 제목을 비의미화시키고자 획책하는 x의 존재가 사실상 전시를 핵심적으로 구축하는 시각적 구조물이라는 사실은, 이를테면 회화 이미지와 언어 텍스트 간의 상호 심문을 불러일으킨다. 제목에서 누락된 언어의 기능은 회화 이미지로 돌아와, 그것을 서사적으로 읽으려는 행위를 충동하고 연이어 차단한다. (그러므로 제목에서 본래의 알파벳이 x로 대체되면서 발생되는 것은 의미의 실종이 아니라 질문의 증폭이다.) 한편 공간의 차원에서, 회화에 서로 다른 색과 선으로 구현된 일련의 x들이 캔버스를 뚫고 나와 유리창과 벽으로 이어지는 풍경은 꽤나 흥미롭다. 회화의 단위는 어떻게 구획되는가. 감상 대상으로서 전시라는 모듈은 각 회화의 물리적 총합과 어떤 산술관계를 갖는가. 세계 일반과 특정 회화는 어떻게 서로를 내포하거나 암시할 수 있는가. 얄궂게도, 마침 전시 기간 중 한쪽 창문 너머로 시공 단계의 건물이 보이는데, 그 미완성 건물에 설치된 유리창에는, 흔히 그렇듯, 유리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대각선 x자의 테이핑이 부착되어 있다. x는 회화 프레임 내부가 세계로 관통되지 않는 막힌 표면임을 알리며, 동시에 그럼에도 늘 그 너머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고하는 지표다.
X2
말하자면, x는 3차원 세계에 대한 2차원 회화의 함수이며, 그렇게 세계가 하나의 표면으로 수렴되는 과정이다. 단일한 점을 향해 응축시키는 x는 빛을 삼키고 세계를 흡수한다. 점으로서의 x에 대한 가장 유명한 가설은 선 원근법일 것이다. 회화가 점차 이 장치를 포기하기로 한 이래, 원근법이 곧이곧대로 호명되어선 안 될 이름이 된 시점에서, 박정혜가 《Xagenexx》 전시에 뿌려놓은 x들은 마치 원근법의 뼈대를 노출시키는 듯하다. ‘투과하여 본다’는 원래의 의미(ars perspectiva/perspicere)처럼, 원근법은 중층의 공간들을 상정하고 이를 꿰뚫는 행위를 요청한다. 공간을 관철시킴으로써 깊이의 인상을 탄생시켰던 원근법이, 회화 제작 단계에서의 원리가 아닌, 회화 표면에 납작 달라붙은 도상으로 구현될 때, 이제 원근법을 둘러싼 질문은 각도를 비튼다. 회화가 담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시시각각 변해가는 복수의 시점들을 어떻게 회화에 관통시킬 것인가. 《Xagenexx》에서 이러한 질문은 또한 빛의 문제가 된다.
X3
박정혜 본인은 가령 전시작 <Twins chord>의 마름모꼴 형상으로부터 특정한 대상을 연상하려는 시도를 완고히 거부하겠으나, 일단 나처럼 이 x의 흐름을 원근법과 연결시켜 상상하기 시작한 관객이라면 아마도 카메라의 조리개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렌즈를 관통하는 빛의 양을 조절하는 이 장치는 열림과 닫힘의 운동 속에서 x의 형상을 쉴 새 없이 새겼다 지운다. 조리개가 허용하는 빛의 양은 이미지가 구현하는 깊이의 문제와 직결되며, 말하자면 원근법의 이데올로기를 사진이 회화로부터 쟁취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맡아왔다. 일련의 순간들의 흐름으로부터 특정한 순간을 분리해내는 조리개가 작동될 때마다, 세계는 일순 응결된다. 흐름으로부터 하나의 단면을 도려내는 것은 늘 진실 이상의 은폐를 함축할 터인데, 그렇다면 《Xagenexx》는 회화의 표면이 담을 수 없는 것들에 선언적으로 x를 그으며 기만의 시도를 지워낸다. 그것은 사진을 모방하는 대신, 모방할 수 없음을 표방하며, 여러 가능성의 기호인 채로 물러난다. 이 기호들은 빛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때 빛은 회화에 담겨 있거나 회화로부터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이를테면 전시장으로선 이례적인 유리창 너머로부터 벽면을 훑고 공기를 가로질러 캔버스 위에 머문다. 그렇다. 《Xagenexx》는 빛의 전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올랐다 스러지는 빛. (농담을 더하자면, 심층을 표면에 머물게 만드는 x-ray라 부르도록 하자.)
X4
누군가에겐 다 끝난 문제다. 빛과 시간이라니. 오랜 시간 회화가 논해왔던 빛과 세계 재현의 문제는 사진 및 영화의 등장과 함께 영상에 위탁되었으며, 그마저도 빠르게 소진되어 가는 중이다. 회화가, 회화로, 시간의 흐름을 담으려는 시도 역시 충분하다면 충분한 변형들을 통해 나름의 성과에 대한 인정과 나름의 패배에 대한 수긍을 일으켜왔다. 사실, 회화가 가시적 세계의 재현에 대한 의무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이래로 회화가 오로지 자신만을 염두에 둔 채 재귀적 질문을 반복했을 때, 빛과 시간, 두 개의 항은 영영 회화로부터 추방당할 듯 보였다. 박정혜의 《Xagenexx》는 빛의 경로를 좇되 그것을 담을 수 있다고 함부로 주장하지 않는데, 이는 역설적이게도 영화에 대한 어떤 주장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에 따르면, 영화란 “설명이 부재한 채로 빛 안에 잠겨 있는 탁월한 기호들의 넘침”이다. 《Xagenexx》는 설명할 수 없는 상태에 압도당하기보다는 잠정적으로 설명에의 의지를 정지시킨 채, 기호들의 넘침을 응시하게 한다. 올리베이라의 문구와 다른 것은 다만 빛의 장소와 방향이다. 이미지 내부로부터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표면을 핥는, 머무르다 퇴락하는 빛. 그리고 빛의 흔적으로서의 x들. 시간의 경과에 따른 빛의 연속을 탐미하는 박정혜의 회화는, 영상을 차용하거나 그것과 유사하고자 노력하지 않은 채, 어쩌면 영화가 이루고자 했던 바로 그것에 기이한 방식으로 맞닿는다.
(번역: 박지형)
Junghae Park Xagenexx: A saturation of magnificent signs bathing in the light
Haejin Pahng (Critic)
X0
The exhibition title ‘Xagenexx’ is a meaningless sign rejects to be verbalized. This declarative attitude trying not to be interpreted as a certain language, however, disproves the fact here are things need to be read considerably. The action of reading again and again but preparing fallacies might fulfill the intention of resistance against to be understood. In fact, it is not impossible to detect which of the meaningless term ‘Xagenexx’ was derived from a meaningful term. The important thing, however, is not just the identity of alphabet originally existed at the position of x. Although the artist herself is reluctant to reveal the starting point, in fact the dimension we have to claim our better attention is the multiple statuses of ‘x’ which hypocritically occupies pre-existed alphabet. It disguises alphabet x by occupying both sides of the word ‘agene’; it is a mysterious value x which indicates another alphabet should have written instead; more than that, it has to be a performative x with the action of wiping out the alphabet; to add on, it is even a movement of life that is expanding to both sides of ‘a gene’. This text, therefore, tries to set the decisive factor ‘x’ which de-verbalises the title ‘Xagenexx’ as a variable value and estimates possible (false) values able to be substituted.
X1
The visitors face with the numerous appearance of x when they enter the exhibition space. The figuration of x is dense and full on the surface of paintings and the windows spread out in two spots of the exhibition space. The fact, that the presence of x which schemes to un-signify the title is actually a visual structure composing the exhibition requisitely, arouses mutual interrogation between the image of painting and language texts. The function of language omitted from the title returns to the image of painting, and it provokes and consecutively blocks the behavior of reading things narratively. (Thus the thing causes from the replacement of pre-existed alphabet to x in the title, is not the disappearance of meaning but the amplification of inquiries.) In the perspective of the space, meanwhile, the scene that a series of x made up of various colors and lines coming out from the canvas and connected to the windows and wall is quite appealing. How the unit of painting is divided? How the modules of exhibition as the object of appreciation arithmetically relates to the physical sum of each painting? How the world in general and a specific painting are possible to connote or infer to each other? Curiously, a building under the construction is seen over the window during the exhibition period; tapes are attached in the shape of diagonal x on the window of the building to show the presence of glass, as usual. x represents the interior of painting’s frame is a blocked surface which does not penetrate the world, but at the same time it is a index alerts the presence of the world beyond the frame.
X2
So to speak, x is a function of two-dimensional painting about the three-dimensional world, and is the process that the world converges into one surface. x which condenses to a single point devours the light and absorbs the world. The most famous hypothesis of x as a spot would be the linear perspective. Since painting gradually decided to give up this device, at the point of time when the perspective became a term cannot be told frankly, a group of x Park scattered in the exhibition Xagenexx seems to expose the framework of the perspective. Like the original meaning as ‘see through (ars perspectiva/perspicere)’, the perspective requires to presume the midrise spaces and discern them. When the perspective that invented the impression of depth by accomplishing the space is visualized not as the principle in the process of painting but as the icon stick fast on the surface of the painting, the question surrounding the perspective twists its standpoint. How the flow of time that painting cannot represent and multiple perspectives changing from moment to moment can penetrate painting? It becomes the matter of light when it comes to Xagenexx.
X3
Junghae Park might obstinately reject the attempt to associate a specific subject with the diamond-shape in the exhibited work Twins chord, but the viewer like myself who started to imagine the connection between the perspective and the flow of x might think of the aperture of camera. The device which controls the amount of light penetrates the lens keep carving and erasing the shape of x with opened and closed movement. The amount of light the aperture allows directly relates to the matter of depth that an image creates; so to speak, it has been taking a decisive role with regards to photography that took the ideology of the perspective from painting. The world is condensed for an instant when the aperture operates to separate a moment from the series of flow of moments. Cutting out a single part from a flow might always connote concealment more than the truth, and Xagenexx erases the attempt of deception by drawing x on the things that the surface of painting cannot embody. Rather than replicating photography, it represents the impossibility of replication, and steps back as a symbol of various possibilities. These symbols are surrounded by light, and this light is not imposed nor released from the painting but comes from the exterior, for instance from beyond the window which is exceptional when it comes to the exhibition space, and it runs through the wall, cut across the air, and stays on the canvas. Yes it is, Xagenexx is the exhibition of light. The light rises and disappears depending on the current of time. (Speak half in jest, let it call x-ray that makes in-deepness to remain on the surface.)
X4
It might be the finished matter to someone. It is said light and time. The matter of light and representation of world that has long been discussed by painting was entrusted to video with the advent of photography and film, and it is also rapidly draining away. The attempt of painting to connote the flow of time in painting also has achieved the agreement of its own outcome and failure through plenty of modifications. In fact, when the painting repeated the recursive question that only considers itself since it has released itself from the duty of representation of visual world, the two clauses ? light and time ? seemed to be banished from the painting forever. Junghae Park’s Xagengexx follows the track of light but not thoughtlessly insists it can be embodied, and it ironically reminds of a claim about film. According to Manoel De Oliveira, film is “a saturation of magnificent signs bathing in the light of their absence of explanation”. Rather than overwhelmed by the unexplainable situation, Xagenexx holds the willingness of description provisionally and makes to stare the overflow of signs. Only different thing from Oliveira’s phrase is the location and direction of light. The light licking and staying on the surface of images and dilapidating, not releasing from the interior of image; a series of x as the traces of light. Park’s painting that aesthetically seeking for the sequence of light according to the elapsed of time, touches the thing which film might have tried to achieve, without appropriating video or trying to be similar to it.
(translated by Jihyung Park)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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