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2010 석사, the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시카고, 일리노이, 미국
2007 학사, 서양화과, 서울대학교, 서울, 한국
개인전
2014 과거를 잊은 도시: 기억되지도, 잊히지도 않는, 코너 아트스페이스, 서울, 한국
2013 동네스토리닷컴2, 스페이스 오뉴월, 서울, 한국
2012 동네스토리닷컴, 스페이스 오뉴월, 서울, 한국
2010 Letters from Griffintown, Auberge Alternative’s arts centre, 몬트리올, 퀘벡, 캐나다
그룹전
2014 Only time is now,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센터, 서울, 한국
2013 촉4, 축개인전 Be Touched·Ⅳ, 동덕여자대학교,서울 한국
플레이그라운드, 복도갤러리,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 한국
2012 CONTESTED SITE: ARCHIVES AND THE CITY, FOFA Gallery at Concordia University, 몬트리올,
캐나다
(2인전) 우연(雨連)한 공간, 갤러리 맺음, 서울, 한국
2011 인간의 집, 갤러리 맺음, 성북예술창작센터, 서울, 한국
Spring Benefit, Evanston Art Center, 에반스톤, 일리노이, 미국
2010 Art Loop Open, the WIT hotel, Chicago Artists’ Coalition, 시카고, 일리노이, 미국
My Dear Friend Sullivan Building, Pop-Up Art Loop project, 시카고, 일리노이, 미국
20th Evanston Biennial 2010, Evanston Art Center, 에반스톤, 일리노이, 미국
Graduate Thesis Exhibition, Sullivan Galleries, 시카고, 일리노이, 미국
UnCommon Territories, Heaven gallery, 시카고, 일리노이, 미국
2008 What We Want Is Free, Mess hall, 시카고, 일리노이, 미국
Department (Store): collaboration with J. Morgan Puett, Sullivan Galleries, 시카고, 일리노이, 미국
공공미술프로젝트
2014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 설치 및 출판,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2012-11 나의 소중한 벗 성북에게, 뉴미디어 영상 방송 및 출판 ,성북예술창작센터 (서울문화재단)
2010 My Dear Friend Griffintown, Performances and Installation Commissioned by
Urban Occupations Urbaines, Montreal, Quebec, Canada
레지던시
2014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서울, 한국
2013-11 성북예술창작센터, 서울, 한국
2011 Vermont Studio Center, 존슨, 버먼트, 미국
2010 Auberge Alternative’s arts centre, 몬트리올, 퀘벡, 캐나다
수상 및 지원
2014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프로젝트 기금,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서울, 한국
2013 시민-예술가 협력형 프로젝트 기금, 서울문화재단, 서울, 한국
2012 성북예술창작센터 공공미술 프로젝트 지원금, 서울문화재단, 서울, 한국
2011 Vermont Studio Center Artist Grant, Vermont Studio Center, 존슨, 버먼트, 미국
2010 The WIT Prize, Art Loop Open, 시키고, 일리노이, 미국
Evanston Biennial 2010 Jurors Award, 에반스톤,일리노이, 미국
Edward Ryerson Fellowship (SAIC 대학원 졸업자 장학금), 시키고, 일리노이, 미국
최영환, 건물에 말 걸기
글 | 김 남 시
최영환 작가는 건물에 ‘말을 건다’. 그는 건물을 향해 편지를 쓰거나 햇빛을 반사해 건물 안에 비추거나 어떤 때는 거울로 모르스 부호로 보내면서 말을 건다. 2010년 시카고에서 행했던 퍼포먼스 “설리반 빌딩과 2시간 동안의 대화”에서 작가는 거울을 통해 시카고 고층 빌딩에 햇빛을 반사해 말을 걸었다. 작가가 유학했던 도시 시카고는 겨울에는 영하 28도까지 내려가 숨을 들이쉬면 폐가 얼어붙을 것처럼 느껴지는 추운 도시다. 그가 대화를 시도한, 1800년대 지어진 그 건물은 지어질 당시에는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그 이후 주변에 지어진 훨씬 높은 빌딩들에 가려져 늘 그림자가 져 있다. 그가 건물을 향해 거울로 보낸 햇빛은 어두운 건물 안쪽에 빛을 보내며 말을 건다.
그는 왜 건축물을 말을 거는 대상으로, 말을 걸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까? 하이데거에 따르면 “거주한다‘는 것은 단지 어떤 건물 안에서 숙박하거나, 일한다는 것이 아니다. 거주함이란 ’평화로이 있음, 평화롭게 됨, 평화 속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거주함이란 ”자유로운 영역 안에 울타리 쳐진 채 머물러 있음“이며, 그를 위한 ’보살핌’이다. 하이데거에게 진정한 건축물이란 거주함에 거처를 마련해주는 곳이다. 건축물은 하이데거가 사방(四方)이라 부르는 대지와 하늘,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 [인간]을 ‘보살피는’ 사물이다. “땅을 구원하고, 하늘을 받아들이며, 신적인 것들을 기다리고 죽을 자들을 인도하는” 이러한 보살핌, 그것이 ‘거주함’의 단순하고도 소박한 본질이다. 건축물은 이들에게 터전을 베풀어주는 장소 Ort 이다.
‘말을 건다는 An-spruch’것, 이것은 하이데거에게 존재사유의 출발점이다. 존재에 대한 사유는 대상을 우리 ‘앞에 세우고 vor-stellen’ 그를 객관화시켜서 분석하고 캐물음으로써가 아니라 존재를 향해 an 말을 걺 sprechen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그 존재와 연루시킴으로써 시작된다. 건축물에 말을 건다는 건, 건축물의 존재를 묻는다는 것이다. 거주함에 거처를 마련해주는 그 건축물의 존재에 대해 묻고 그를 함께 사유하려 한다는 것이다.
모더니즘 건축가들에게 건물은 어디까지나 그 건물을 이용할 인간의 요구를 충실히 따라야할 대상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건축물은 인간의 요구와 욕구를 기능적으로, 가장 충실하게 충족시키는 대상이었다. 그 기능들 속에서 ‘거주함’의 의미는 철저히 사라진다. 고층 빌딩에서 대지는 ‘구원’되기보다는, 더 많은 공간을 그 위에 쌓아 올릴 수 있는 발판이고, 하늘은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중력을 이기고 더 높이 솟아오르는 건물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철저하게 목적 합리적 기능의 요구에 종속된 실용적 건축물 속에서 신적인 것들은 들어설 자리를 잃었고, 인간 역시 ‘인도’ 되기보다는 잠시의 체류나 숙박을 위해 안전하게 ‘보관’되는 존재가 된다. 결론적으로 모던 건축물들은 건축물로 부터 ‘거주함’의 본질을 쫓아내어 버렸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대인의 고향상실 Heimatlosigkeit 이란, 그들이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했다는 사회적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과 건축물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가 이렇게 변화된 데에서 유래한다.
최영환 작가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는 우리가 몸을 누이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건축물이라는 존재에 대해 우리가 갖는 관계를, 그 건축물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를 사유해보려고 한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시작된 도시적 삶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최영환 작가의 포커스와 그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의 스케일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그는 그 안에서 ‘거주함’이 이루어지는 사물로서의 건축물과 거주하고 있는 사람 사이에, 이미 오래전에 상실되어 버린 관계의 회복을 꿈꾸는 듯하다. 아니 적어도 현대 도시적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건물을, 그저 즉물적이고 객관적인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싶어 하는 듯하다. 그는 건축물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관계를, 2인칭으로 지칭될 수 있는 사람과 건축물의 관계를 회복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상기시키고 싶어 한다. 건축물에 말을 거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 건축물에 대한 우리의 관계의 양상을 다른 것으로 떠올리고 싶어 한다.
2010년 캐나다에서 행했던 공공미술 프로젝트 “Letters from Griffingtown”에서 작가는 재개발 예정부지 거주민들과 대화를 통해 자신이 살던 건물을 향해, 조만간 철거를 앞둔 그 건물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요구한다. 건물에게 말을 거는 주체가 작가 자신이 아니라, 그 건물과 거주함의 관계를 맺고 있는 거주자여야 함을 깨달았던 셈이다. 수년간 자신이 살았던 곳, 자신의 신체가 익숙해있던 주거지가 사라지고, 그 장소를 떠나 다른 낯선 주거지를 찾아야 하거나, 혹은 이미 철거되어버린 옛 주거지를 발견했을 때, 이러한 상황은 그 주거지에 대한 정서적 태도를 발전시킬 조건이 된다. 그렇게 주민들이 써 준 편지는 건물의 창에, 건물 벽에 설치된 거울 위에 써졌다.
2014년 성북동 프로젝트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은 이 프로젝트의 한국판이라 하겠다. 작가는 성북동 재개발 지역 주민들에게도 건물을 향해 편지를 써줄 것을 요청해보았지만, 여기서 작가의 의도는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재개발이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복잡하고 대결적인 상황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재개발은 야비하고 폭력적으로 이루어진다. 건설 회사는 재개발 동의서를 받기 위해 주민들을 회유하고, 그게 잘 먹히지 않을 때는 온갖 방법의 협박을 동원해 결국 수년에서 수십 년을 살던 터전을 버리고 떠나게 만든다. 보상금을 받기로 합의한 주민과 그렇지 않은 주민 사이의 갈등은 공동체를 심각하게 해체시킨다. 합의를 거부하는 집에 내 걸린 ‘죽음을 불사하며 내 집을 지키겠다!’는 붉은 현수막은 그런 첨예한 위기와 갈등의 흔적들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주민들로서는 자신의 주거지에 대한, 작가가 원하던 정서적, 인격적 태도를 발전시킬 여유가 없다. 그들에게 집은 그 속에서 살았던 삶의 시간들을 담지하고 있는 주거지라기보다는, 어차피 철거되어야 할 것이라면 되도록 높은 보상금을 받기위해 붙들고, 씨름해야 하는 인질 같은 것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민들에게 건물을 향해 말을 거는 편지를 써달라던 것은 실현되기 힘든 요구였다. 대신 작가는 주민들과 그들이 살았던 주거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고, 그 인터뷰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자신의 주거지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나 텍스트를 뽑아달라고 요구한다. “아름다워라 삼대가 사는 이 집”, “폭염세월 견디고 곱게 물든 성북동” 이라는 문장들이 나왔고, 작가는 이 문장들을, 건물에 직접 써 넣는 대신, 건물에 부착된 반사 패널을 통해 건너편 건물이나 도로에 투사하는 방법으로 가시화시켰다. 그렇게 투사된 문장들은, 집집에 매달려 있는 붉은 현수막과는 달리, 햇빛이 비치는 동안만 가시화되다가, 해가 지고 반사 패널에 비춰지는 햇빛의 각도가 바뀌면 사라진다. 그래서 그것은 “사라지기 쉬운ephemeral” “빛의 현수막”이 된다.
햇빛에 반사된 문장을 건물에 투사하는 것은, 작가가 건물에게 말을 걸기 위해 행했던 이전의 두 방식의 결합을 통해 탄생했다. “설리반 빌딩과 2시간 동안의 대화”에서 거울로 햇빛을 건물에 반사시키던 방법과 “Letters from Griffingtown”, “친애하는 고층빌딩에게”에서 건물 표면에 직접 글자를 써넣던 방법이, 햇빛을 반사시켜 글자를 투사하는 것으로 결합되었다. 이 결합을 통해 햇빛이라는 상징성 풍부한 매체는 구체적 내용을 얻었고, 말과 비교해 영속적인 특징을 갖던 글자 매체는 ‘사라지기 쉬운 순간성’을 획득(!)했다. (이를 ‘획득’이라 말한 이유는 사실 글자 매체의 ‘영속성’은 글자 자체의 속성이라기보다는 글자가 쓰이거나 새겨지는 물질적 매체 - 종이, 나무, 돌 - 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연기 또는 햇빛으로 쓰여지는 글자의 ‘순간성’은, 다른 매체를 통한 글자에 비해 좀 더 시적인 성격을 획득한다.) 내가 보기에, 이 결합으로 탄생한 매체는 재개발 지역 건축물에게 말을 걸기에 적합하다. 햇빛에 반사되어 생겨난 글자들은 해가 방향을 바꾸거나 지면 흩어져 없어지는데, 이는 재개발을 통해 조만간 사라질 건물의 운명에 대한 포에틱한 시각화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코너아트 스페이스 전시 <과거잊은>은 여러 가지 점에서 역설적이다. 가장 치명적인 사실은 작가의 초기 작업부터의 핵심 매체였던 태양광이 등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윈도우 갤러리에 설치된 반사 패널은 태양광이 아닌 인공광을 반사해 “과거잊은”이라는 문장을 투사한다. 두번째 결정적인 사실은 이 작업이 이전까지 작업의 장소특정성과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전시장은 철거를 앞둔 건축물이 아니다. 작가는 이 두 사실을 분명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조건에서 생겨날 작업 결과를 이전 작업과의 관계 속에서 치밀하게 따져 보았을까? 이 질문이 작가 자신에게 분명하게 해명되지 않는다면, 이번 전시는 이전까지 작업들의 사진과 영상에 ‘반사패널 모형’을 추가한 포토폴리오-전시가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
코너아트 스페이스 전시장은 ‘주거함’의 가능성이 완전히 탈각된 곳이다. 수 십 개의 성형외과들이 늘어선 대한민국 의료수출의 메카, 압구정 지하철 역 주변 건물들은 “땅을 구원하고, 하늘을 받아들이며, 신적인 것들을 기다리고 죽을 자들을 인도하는” 거주함의 의미론과는 오래 전에 이별을 고한 장소들이다. 특히 성형외과 건물은 ”자유로운 영역 안에 울타리 쳐진 채 머물러 있는“ 곳이 아니라, ‘죽을 자들’이 늙고 죽어가게 마련인 자신의 신체에 인위적으로 ‘신적인’ 젊음과 생기를 주입하려는 곳이다. 그 곳은 ‘거주’가 아니라 ‘도약’을, ‘평화 속에 머무름’이 아니라, 화려한 불빛 속에서 튀어 오르려는 삶을 위해, 지불된 체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자기 신체의 ‘과거(before)를 잊고’, 새로운 애프터(after)의 신체로 거듭나기 위해 ”뼈를 깍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무릅쓰며 머무는 곳이다. 전시장 역시 성형외과 건물 1층에 위치해 있다. 바로 이 건물로부터 ‘과거 잊은’이라는 문장이 주차장 바닥을 향해 투사된다. 햇빛이 아닌 인공광이라 투사된 글자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으며, 불을 꺼버리지 않는 한 사라지지도 않는다.
도대체 이 “과거잊은”의 발화주체는 누구일까? ‘거주’할 수 없는, 거주함이 불가능한 이 건물들을 상실과 안타까움을 갖고 바라보는 작가인가? 아니면 ‘과거를 잊고’, 화려한 미래로 도약하고 싶어하는 이 건축물, 그와 똑같은 의도로 성형시술을 받기 위해 이곳에 체류하는 사람들인가?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 프로젝트에서의 문장들이 낮의 빛이 존재하는 동안만 보이던 것과는 반대로, “과거잊은”의 문장은 낮의 빛이 사라지고 주위가 어두워져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장은 ‘시장이 잠든’ 틈에 침입하는 게릴라식 구호도 아니다. 주위가 어두워지면 시장은 잠들기는커녕 더 활기를 띄고, 북적거리는 환락과 소비의 시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글자는, 어두워지면 더 빛을 발하는, 전시장 건물에 붙은 성형외과 간판 글자와도 흡사하다. 이 모호함은, 내가 보기에, 통상 미술작품에 허용되곤 하는 비결정성의 모호함을 넘어서는, 위험한 경계에 다다르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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