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2009 The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 M.F.A.) 졸업, 시카고, 미국
2001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대학원( M.F.A.) 졸업, 서울, 한국
1998 이화여자 대학교 미술대학( B.F.A.) 졸업, 서울, 한국
개인전
2014 The Green Cabinet, 보안여관, 서울, 한국
2013 CAVE into the cave, Kunst Doc, 서울, 한국
2005 Come out of the GLASS FOREST, Gallery DOS 특별 기획전, Gallery DOS, 서울, 한국
GLASS FOREST, 영아티스트 수상전, Gallery Al, 서울, 한국
2003 from City to City, 백송문화재단 ‘향당상’ 수상기념전, 백송화랑, 서울, 한국
2001 City with Inner Light, 덕원갤러리, 서울, 한국
단체전
2014 로우테크놀로지: 미래로 돌아가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Salon de Cerveau - Salon the Brain , 스페이스 캔, 오래된 집, 서울, 한국
Dream Society, 서울미술관, 서울, 한국
공간을 점령하라, 아트스페이스 갤러리 정미소, 서울, 한국
동시적울림, 포르타밧 미술관,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New hero, 블루스퀘어 네모, 서울, 한국
2013 Neverland, 그 첫 번째 방, 단원 미술관, 안산, 한국
xLoop: Mutation, Grotesque and/or Creative?, 대안공간 루프, 서울, 한국
물物기척,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전시실, 서울, 한국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전시실, 서울, 한국
Artist’s Portfolio, 사비나 미술관, 서울, 한국
대구예술발전소; 수창동에서-나에게 너를 보낸다,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한국
2012 당신의 불확실한 그림자 Your invisible shadow, 금호미술관, 서울, 한국
제7회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 아웃도어 스크리닝, 서울스퀘어, 서울, 한국
2011 Rhyme Time : 2011 창동 스튜디오 Open Studio, 창동창작스튜디오, 서울, 한국
Seoul Digital Media Content International Festival, LG U+ Media Facade, 서울, 한국
New Dialogue, Fine Arts Center Gallery, Northereastern Illinois University, 시카고, 미국
TEAF’ 11 - 2011 Taewha-river Eco Art Festival, 울산 태화강 둔치, 울산, 한국
2010 Sprouting, Noyes Cultural Arts Center, Evanston, 일리노이, 미국
2009 Starting Again, The Hall Long Gallery, Greenleaf Art Center, 시카고, 미국
Beyond a Boundary Between Space and Place, Sullivan Gallery, 시카고, 미국
New Works, Sullivan Gallery, 시카고, 미국
2008 Home, Betty Rymer Gallery, 시카고, 미국
레지던시
2014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 서울, 한국
2013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장기입주작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2011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창작스튜디오 (창동), 9기 장기입주작가, 서울, 한국
수상
2014 Emerging Artist 지원기금,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2013 서울문화재단 예술 창작 지원 사업 시각예술, 서울, 한국
2011 국립현대미술관 창작 지원금 (Community Project), 서울, 한국
2010 CAAP Cultural Grants, the Chicago Department of Cultural Affairs, 시카고, 미국
Black Rock Arts Foundation, Black Rock Arts Foundation, 샌프란시스코, 미국
2002 백송미술재단 향당상: 우수청년작가상, 백송문화재단, 서울, 한국
무쇠다리 여인, 백열전구, 그리고 스위치 없음.
글 | 이 재 준
무쇠다리 여인
고궁의 담장을 따라 오른쪽으로 걷다보면 한국 정치의 중심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아름답게 익었지만 먹을 수 없는 은행들이 바닥에 즐비하다. 길은 왠지 한산해 보인다. 한 참을 그렇게 가다보면 건너편에 보안여관이 보인다. 길을 건넌다.
이예승의 이 있다. 간결하다. 보안여관의 오른쪽에 관리실 쇼윈도우가 눈에 띈다. 뒤로는 번쩍이는 금속 반사판이 둘러쳐져 있고, 바닥에는 검고 굵은 전선들이 이리저리 널려있다. 재봉틀 다리 세 개가 보인다. 얼핏 보아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것들이다. 그 위로 둥글게 흰 천이 둘러 감겨있다. 오른쪽 열려진 쪽문 틈으로 간혹 바람이라도 불면 하늘거리는 흰 천이 살짝 움직이는 것 같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여인의 치맛자락이 머리에 스친다.
“귀가 울릴 만큼 주위의 거리가 성나 울부짓고 있었네.
상복 차림의 날씬한 여인이 엄숙히 고뇌하는 모습으로,
꽃무늬 레이스 치맛자락을 화려한 손으로
살짝 쳐들어 흔들며 지나갔지,
조각상같은 다리로 재빠르고도 고상한 걸음으로,
나는 미치광이인 양 떨며,
태풍이 싹트는 창백한 하늘, 그녀 눈에서
넋을 빼앗는 감미로움과 뇌쇄적인 쾌락을.
번갯불…… 그리고 어둠! 그녀의 눈길로 홀연히
나를 되살려놓고는 일순간 사라져버린 아름다운 여인이여,
영원한 저승이 아니고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인가?
…” (C. 보들레르, <지나가는 여인에게>, 일부)
저 치맛자락의 하늘거림은 멈출 수도 잡을 수도 없다. 치맛자락과 무쇠주물 다리 사이에는 분명한 부조화의 느낌이 있다. 하지만 치맛자락의 미세한 운동은 묘한 조화를 예감케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 운동은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가 통로 끝에서 맞이하게 될 푸른 식물 이미지의 운동과 연결될 것이다.
그런데 우두커니 서서 계속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연히, 아주 우연히 무쇠다리를 휘감은 흰 천의 여며진 틈 사이로 그 안쪽이 살짝 드러날 때가 있다. 순간 긴장이 감돈다. 금기는 알 수 없는 욕망을 자극하는 법이다.
하지만 정작 기대와 흥분을 억누르는 것은 상식을 빗겨간 낯선 상황이다. 모터와 맞물려 운동하고 있는 무거운 쇳덩어리 바퀴들이 흰 천 속 은밀한 곳에 살아 있는 것이다. 치맛자락을 조금씩 흔든 것은 바람이 아니라 실상 기계의 좌우 회전 운동이다. 기계의 이 메커니즘이 관음증적 욕망을 부추기는 메커니즘에 연결되고 있다. 하지만 <무제>가 그것만을 의도한 것이라 여긴다면 착각이다.
옛 라틴말 아니마(anima)가 운동, 생명, 그리고 영혼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오랜 인식 습관은 움직이는 것을 살아있다고 여긴다. 무쇠다리 여인은 기계 작동의 메커니즘을 욕망의 메커니즘만이 아니라 인식의 메커니즘과 연결시킨다. 욕망할 수 없다면 알 수도 없으며, 알 수 없다면 욕망할 수도 없다.
무쇠다리 여인은 인간적인 것들에 의해 저지당한 어떤 것들을 들여다보도록 제안한다. 이예승은 톱니바퀴의 자동운동을 인식과 욕망의 운동에 개입시킴으로써 의식적이 내가 의식할 수 없는 것들이 폭로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은폐된 것을 걷어내는 이러한 방식이 인간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의 결절에 의해서 충분히 성립할 수 있음을 말하려 한다. 무쇠다리 여인은 분명히 <무제>를 이끄는 라이트모티프(Leifmotif)이다.
1층
출입구 유리문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온통 검은색 차광필름으로 도배되었다. 들어오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궁금하다. 냉큼 문을 밀고 들어가 머리를 내밀면 비좁은 현관에 발이 멈춘다. 흰색 바탕의 형광 간판에 ‘보안 여관’라고 쓴 커다란 감색 글씨가 왼쪽 벽에 걸려있다. 그것은 건물 외벽에 붙어있는 작은 간판과 같으므로, 적어도 이곳이 ‘여관’의 의미를 가진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좌우로 늘어선 방들 앞으로 반쯤 열린 문들이 어지럽게 눈에 들어온다.
외부 온도는 영하를 훨씬 밑돈다. 내부의 온도도 별반 차이가 없다. 좁은 통로를 따라 앞으로 걸어가면 외부와의 명암차이 때문에 방안의 어둠이 눈을 마구 끌어당긴다. 건너편 방 그리고 다시 그 건너편 방, 냉기로 가득한 방들이 움직이는 몸을 잡아당긴다. 걸음은 이미 입구 반대편 욕실 문 앞에까지 와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낡은 쇠경첩의 마찰음, 뒤에서 쫓아오는 구두 소리, 미친 피아노소리가 들린다. 낯익은 공간 이미지들과 사운드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매우 자극적이며 그로테스크하기에 나를 중심으로 한 모든 방들의 좌우배치가 해체되는 것 같다.
마감이 닳아 없어져 속내를 다 보여주는 건물. 그 여관의 낡은 천장에는 백열전구들이 아래로 축 쳐진 채 행과 열을 맞춰 매달려있다. 황소의 커다란 눈이 나를 쳐다본다. 유리구슬 위로 손잡이 모양의 상아색 노브인슐레이터(knob insulator)들이 박혀있다. 그것들은 램프를 쓰던 시절 으스대고 싶었던 첨단 기술의 상징이다.
여관 출구 오른쪽에 잠겨있는 비밀 방에서는 녹색과 적색의 전선들이 빠져나온다. 전선은 담쟁이처럼 벽과 기둥을 가지런히 타고올라 노브인슐레이터로 향하고, 다시 방향을 틀어 이곳저곳의 필라멘트 끝에서 멈춰선다. 전선의 종착지에서 물질의 에너지 변환이 이루어진다. 전기에너지는 텅스텐을 불태우고 미미한 광에너지의 성취에 흡족해한다. 황소의 눈들이 껌뻑거릴 때마다 몸이 만나고 있던 어둠으로부터 낯선 공간들이 우리의 감각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사운드로 가득 찬 통로와 방들에서 일상의 몸과 접속됐던 그야말로 뻔한 공간은 점차 지워진다.
1초미만의 순간. 우리 몸의 감각들은 역치까지 발화한다. 일상 감각이 무뎌지거나 쇠락해지는 국면이다. 공간이 쪼그라들거나 지워지고 시간이 늘어지거나 단절되어 뒤섞이는 이상한 국면이다. 의식적인 나는 지워진다. 혹은 파편들로 분해된다. 마치 낡아 흙이 무너진 벽처럼 방바닥에 널브러져있다. 그 대신 몸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그렇다면 이 장소는 관찰과 이해의 대상이 아닌듯하다.
나의 소멸 메커니즘
미디어 감각론의 세례를 받은 미디어 고고학은 주의분산이라는 개념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이는 분명히 심리학적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유물론적 관점에서 그것은 멀리 16세기 중반 카메라 옵스큐라까지 추적해 가서 ‘메시지’라는 커뮤니케이션 특성 대신에 감각의 물리적 특성과 미디어의 기계적 특성을 연결시키거나 이 연결의 담론 특성을 파헤친다.
대개 감각지각이 역치 수준까지 도달하면 집중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른다. 또한 거기엔 정서적 동요가 덧붙는다. 안정 상태에 이르기까지 주의는 계속 분산되고 몸의 망각 속에 묻혀있던 운동이 순간순간 의식을 대신한다. 몸의 작동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거듭된 반복의 메커니즘에 따른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반사운동 혹은 의식되지 않는 습관이라 부른다. 뜨거우면 회피하고, 차가우면 움츠린다. 비좁은 공간에서 몸은 밀치고 지나치게 넓은 장소에서 몸은 허우적거리며 공간을 탐색한다. 거기엔 의식적 사고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주의분산은 대량의 강력한 감각 자극에 의해 의식의 집중이 해체된 마음 상태이다. 그런데 기계적 메커니즘에 따라 주의를 분산시킴으로써 나의 의식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표현 방법은 새로운 예술형식이 추구하는 강력한 미학적 경향성이다. 이는 주의집중에 의한 관조적 태도 혹은 성찰을 예술에 관철시키려는 전형적인 방법과 구분된다.
정신이 눈을 뜨기 전에 축음기의 물리적 운동은 청각을, 사진의 물리적 운동은 시각을, 영화의 물리적 운동은 몸의 감각을 깨운다. 그러나 이는 기계가 기계를 생산하고, 거대 자동기계에서 작은 자동기계로 이행한 역사와 함께 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목해야할 것은 단지 감각의 심리적 특성만이 아니라 몸의 기계성과 미디어의 기계성이 조응한다는 사실이다. 몸의 운동 메커니즘과 기계의 운동 메커니즘이 조응하는 역사적 계기들은 이미 기계제 생산 공장에 존재한다. 지난 200년간 이루어진 노동의 기억은 기계의 작동과 몸의 작동을 이음새 없이 스티칭한다.
그런데 스티칭을 이토록 완벽하게 만든 것은 공장노동만이 아니다. 19세기 이래 엔터테인먼트 산업 역시 우리가 스티칭의 이음새를 망각하도록 만들었다. 파리의 몽마르트에 세워진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의 파노라마극장이 그랬고, 나다르(Nadar)의 사진관이 그랬다. 현대인은 줄을 서서 기다릴 만큼 열광했지만, 정작 그들이 한 일은 몸의 경험을 기계의 경험으로 교환하는 것이었다. 인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순간에도 기술은 늘 그렇게 우리에게서 실현되고 있다. 이제 체화된 기억들을 기록하고 축적해온 우리 몸은 대부분 기계에 무리 없이 반응한다.
그렇지만 이를 어두운 극장 안에서의 몰입과 같은 심리적 상태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분산된 의식을 이끄는 기계적 메커니즘에 주목해야하고, 또한 그 메커니즘이 몸의 작동과 유사성을 획득하면서 일상에서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어떤 작용, 즉 ‘의식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의 영역으로 이끌어내는 작용’에 주목해야 한다. 몸과 기계라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기능적 유사성. 이것은 휴머니즘이 그토록 불안해하고 거부하고자 한 대상이다.
인간의 몸을 다루는 의학의 역사는 휴머니즘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근본적으로 휴머니즘과 하나가 될 수 없는 내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의학은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정교함의 과학기술적 신념 위에 서있다. 그래서 의학이라는 정교한 기계의 메커니즘에서 몸은 인간의 몸이 아닌 사물의 몸이다. 거부하고 싶겠지만 의학에게 인간은 본래적으로 사이보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계의 메커니즘에서 의식이 의식할 수 없는 것, 즉 의식 바깥의 것을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20세기 전후의 초현실주의자들이 으젠느 앗제(Eugene Atget)의 사진에서 이러한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앗제의 사진들은 19세기말 파리의 그저 그런 일상 풍경을 기록하고 있다. <그랑 트리아농(Grand Trianon)>(1901)은 베르사유의 한적한 공원을 포착한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고,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파리의 시시콜콜한 일상의 모습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이 앗제의 사진에서 본 것은 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고 있는 사진 기계의 메커니즘이다. 그런 메커니즘이 인간적 시각과 정신의 정형화된 습관이 만들어놓은 단단한 현실을 걷어낸다. 그 대신 우리의 의식이 관찰할 수 없는 현실, 그저 지나쳐버리면서 결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폭로한다. 주말이면 인파로 북적댔을 평일 낮 공원은 우리에게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 듯 의식에서 사라지지만 그의 사진에는 실재하는 것이다.
분명히 미학적 측면에서 앗제의 사진들은 해석되고 의도된 현실을 해체시키고 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자. 그 사진들에서 앗제의 이름을 지워보자. 그러면 우리를 그렇게 초월적 현실 혹은 실재로 이끈 것은 사진 기계의 이상한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그는 그러한 카메라와 그러한 렌즈를, 그러한 현상액과 인화지를 사용했고, 그러한 처리과정을 거쳤다. 앗제가 실제로 자신이 초현실주의자의 혁신적인 공헌을 의도하면서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그의 사진을 그렇게 보이도록 한 것은 사실상 그에게 사진을 의뢰한 당시 파리시의 공공 시스템이며, 촬영, 현상과 인화에 이르는 기계적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기계의 메커니즘이 우리에게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내가 의식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나’의 의식 앞에 데려올 수가 없다. 그러나 앗제의 기계 장치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예승의 기계장치들도 이런 메커니즘을 계승한다. 을 작동시키는 백열전등, 스피커들, 프로젝터들, PC들은 보안여관의 통로, 방들, 바닥, 천장 등에 과도한 의미 개입을 억제한다. 기계의 메커니즘은 보안여관의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이 공간에 개입하고 있는 ‘의식할 수 없는 현실’을 버선목 뒤집듯이 보여준다. 그 현실은 보안여관의 사건들, 나의 사건들, 기계의 사건들, 작가의 사건들이 뒤섞이며 발생하는 또 다른 사건들이다. 에 들어갔을 때 만난 공간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고 계속 생성되고 있다는 느낌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예승의 작업은 더욱 더 건축적이다. 건축적인 공간은 외부와 결합함으로써 그것이 놓인 장소에서 사라지면서도 또한 누군가에게 채워지기 위해 그 자체로 나타나야하는 생성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거나 비워진다.
의 건축적인 작동 메커니즘을 가름하는 결정적인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1층과 2층을 표상한다. 열의 단속 운동과 빛의 연속 운동이 그것이다. 사운드는 두 가지 요소 사이에 혼재한다.
하얀 열과 의식할 수 없는 것들의 복사(複寫)
백열등의 구조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맨 밑에는 소켓에 전구를 끼워 넣기 위한 스크류베이스가 있다. 그 위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핀치가 세워져있고 다시 그 위에 도입선과 지지선이 올라와있다. 그 사이에 차단판이 설치되어있다. 이것은 전구의 위쪽에서 발생하는 열을 아래쪽 전선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차단해준다. 도입선과 지지선이 차단판을 관통하고 필라멘트가 가는 지지선 맨 위에 빨랫줄처럼 늘어져 붙어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을 감싸고 있는 유리관 혹은 유리구슬이다. 유리 구조물은 진공이거나 아니면 아르곤 가스 등으로 채워진다.
백열등은 전기저항을 이용한다. 일정한 양의 전류는 특정 금속 물질을 통과할 때 특정한 저항에 부딪힌다. 저항이 강한 물질일수록 저지당하는 전기에너지는 열에너지로 바뀐다. 이런 상태가 가속화되면 그 물질이 용융점에 도달하면서 빛이 발생한다.
백열등은 얇은 튜브 모양의 물질(필라멘트)에 전기가 통과할 때의 높은 저항으로 인해 발생한 빛을 광원으로 삼는 전기장치이다. 그런데 상온의 대기에서 필라멘트에 전류를 흘려보내면 천천히 발화 하면서 마지막에는 급속히 연소한다. 만일 이처럼 필라멘트가 쉽게 타버린다면 백열등은 사용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유리관을 진공으로 만들거나 혹은 거기에 불활성 가스를 투입한다. 불활성 가스인 질소나 아르곤 가스는 필라멘트의 연소를 억제해서 빛의 소멸을 지연시킨다. 보안여관 1층 천장에 매달려있는 저 백열등들은 약 1,000시간 이상을 견딘다.
백열등 기술의 핵심은 큰 전기 저항을 지니면서 연소될 수 있는 물질과 그 물질의 연소 가속 현상을 제어하는 일이다. 백열등의 역사는 이러한 과학기술 문제들을 해결한 결과물이다.
백열등의 발명은 1802년 고출력 축전지를 만들었던 험프리 데비(Humphry Davy)에 의해서였다. 그는 용융점이 높은 백금에 전기를 가했을 때 그 물질이 녹으면서 밝게 빛나는 현상을 관찰했다. 하지만 그의 백열등은 발광하자마자 곧 꺼져버렸다. 40여년이 지난 1840년 워렌 드 라루(Warren de la Rue)는 데비의 실험을 참조해서 처음으로 백금 코일로 이루어진 필라멘트를 만들어 진공상태에서 일정시간 발광에 성공했다. 하지만 백금은 양촛이나 가스를 대신할 만큼 저렴한 것이 못됐다. 이듬해 프레드릭 드 몰레인스(Frederick de Moleyins)는 진공유리관 안에 백금코일을 넣은 전기등의 특허를 얻었다. 1874년 캐나다인 헨리 우드워드(Henry Woodward)와 매튜 에반스(Mathew Evans)는 질소를 채운 유리관 안에서 탄소 필라멘트의 발광을 실험하는데 성공했고 특허권을 얻었다. 하지만 이들 중 우드워드는 의대생이었고 그의 친구는 여관주인이었다. 풋내기 두 사람은 미래에 거대 자본을 형성할 전기장치를 사업화할 수 있을 만큼 노련하지 못했다.
과학기술의 역사에서 산업혁명과 정치혁명, 그리고 전쟁이 있었던 19세기와 20세기는 황금기였고, 발명의 시대였다. 전기 보급율의 가파른 증가는 백열등이 미래의 첨단기술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불러왔다. 에디슨과 같은 노련한 사업가는 그것을 직감하는 것을 넘어 기획했다. 에디슨은 이미 대나무를 40시간 이상 가열해 만든 탄소필라멘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캐나다인들의 특허를 헐값에 사들였고, 영국인 조셉 스완(Joseph Swan)과 기술협정을 맺었다. 스완은 탄소필라멘트의 문제를 해결한 인물이었다. 탄소필라멘트는 일정시간이 지나면 연소하면서 검은 그을음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유리관 내벽에 달라붙어 백열등의 빛을 점점 약화시키는 문제를 야기했다. 그는 탄소가 산소와 작용할 수 없도록 유리관을 완벽한 진공상태로 만들었다. 그 결과 에디슨과 스완의 백열등은 1879년 특허를 얻은 최초의 상업용 전기장치가 되었다.
그 뒤 에디슨의 제네널 일렉트로닉(General Electronic)사는 ‘에디스완(Ediswan)’이라는 이름으로 미국과 영국 전역에 백열등을 사용하도록 정치인들을 움직였다. 기술은 경제적이며 또한 정치적인 것이다. 그리고 130여년이 지난 현재 백열등은 다시 정치적 금기의 대상이다. 이는 백열등을 주요 광원으로 사용하기에는 에너지효율성이 지나치게 낮기 때문이다. 白熱燈.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백열등은 ‘하얀 열’을 내는 장치이다. 백열등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광에너지는 투입된 전기에너지의 고작 5~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는 열에너지로 방사된다. 백열등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따뜻한 느낌이 났던 것은 단지 느낌상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열등이 발광할 때 복사하는 열은 불필요한 특성, 그것은 정보이론에서 말하는 일종의 노이즈이다. 열을 제거하고 빛을 걸러낸다는 것은 노이즈를 제거한다는 것과 같다. 일백년이 넘는 백열등의 역사는 10%의 밝음 위해 90%의 어둠(노이즈)과 함께했던 인간 문명사의 생생한 기록이다.
기술을 인간적인 것으로 길들이는 것은 돈의 매끈한 논리이다. 그렇지만 90%의 비효율성은 그러한 논리의 이면이다. 정치경제학은 표면온도 3,000℃에 이르는 하얀 열을 매력적인 미학으로 은폐한다. 20세기 초 제네럴 일렉트로닉사는 새로이 출시한 백열등을 선전하는 광고지에 이런 문구를 써넣었다. “불을 켜려 성냥을 쓰지 마세요. 문 옆에 설치된 스위치를 켜기만 하면 된답니다.” “여러분은 아름답고 건강한 전등의 물결을 만날 수 있어요.”
백열등이 광원으로 사용되는 한, 자본의 매끈한 논리는 열을 빛과 공존할 수 없는 노이즈로 정의하는 것이다. 백열등 기술은 거울과 같다. 거울이 결코 온전히 밝게 비추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뒷면이다. 투명하게 반사하는 거울에게 뒷면은 한 번도 온전하게 자신을 드러낸 적 없는 무한한 어둠으로 존재한다.
인간적인 기술의 매끈한 메커니즘은 언제나 다듬어지지 않는 거친 메커니즘과 함께한다. 거칠고 조야한 메커니즘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기술의 정치경제학은 미학을 동원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더 나은 기술을 보장한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백열등의 금기 현상처럼 특정 기술이 가치를 다한 것으로 판정되고 폐기되기를 기다릴 때면, 원래 그 기술의 이면, 즉 거칠고 조야한 기술의 메커니즘이 그제서야 시야에 들어온다. 또한 미래의 더 나은 기술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힘을 얻을 때마다, 아마도 그에 비례하여 거친 기술들은 계속 절단되어 우리 앞에 계속 쌓일 것이다.
백열등이 켜질 때마다 이처럼 기술의 잘려나갔던 거친 부분들이 고개를 든다. 보안여관 입구 오른쪽에는 1호실이 있다. 이 은밀한 제어의 공간에서 가지런히 뻗어 나온 전선들은 계속 이어져서 실제로는 울퉁불퉁 골지고, 구불구불 흘러내리고, 이리저리 널브러진다. 텅스텐에 흘러간 전류는 엄청난 저항에 못 이겨 더욱 더 뜨겁게 달궈진다. 하얀 열기가 방사된다. 우리의 의식에 의해 은폐되었거나 절단되었던 열에너지가 냉랭한 공간에 낯선 결들을 만든다. 의 작동으로 내가 지워지는 것은 사실상 의식에 의해 잘려나갔던 나의 일부가 환기되는 현상이다. 갇혀있던 노이즈가 순간순간 방사되면서 여관 1층에 다른 말들을 끌어들인다.
백열등의 점멸은 망각을 역치에 이르도록 자극하는 전기신호이다. 그것이 내뿜는 하얀 열기들은 망각되었던 기억과 느낌의 표상들을 내가 서있는 이리로 불러온다. 몸을 비스듬히 돌려야 서로 교차할 수 있을 만큼 비좁은 통로, 그리고 좌우로 늘어선 작은 방들에서 수많은 표상의 단편들과 열기가 뒤섞인다.
그런데 그런 표상들은 보안여관의 것이고, 작가의 것이자, 관객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누구의 것이지만 누구의 것도 아니다. 지난 수십 년간 보안여관에 묵었을 수많은 이들의 기억과 의미의 기호들이다. 그리고 통로에서 방안을 들여다보는 나의 관념들과 뒤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기억을 끌어낸 작품의 기호들과 뒤섞여 있기도 하다. 의 기계적 메커니즘은 이처럼 여러 시간의 결들을 교차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결들은 사운드를 통해 2층으로까지 죽 늘어진다.
의식이 은폐시켰던 관념들은 망각의 경계를 자극하는 백열등의 반복된 신호에 따라 불현듯 나타났다가 일순간 꼬리를 감춘다. 기호들은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 마치 통로 끝 맞은편 벽에 흔들리는 푸른 식물들처럼, 도저히 그것을 꺾어 손 안에 넣을 수가 없다.
2층. 여기엔 스위치가 없다.
보안여관이 주는 정보는 전형적이다. 벽의 일부는 허물어져 내릴 만큼 낡았다. 후락한 그곳이 여관이었다면 분명히 오고간 이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내가 실제로 살지 않았던 시간의 기억이 나의 다른 기억들로부터 추론된다. 이러한 기억들은 비록 망각의 경계 너머로 일순간 불쑥 튀어나온 것이긴 해도 이미 익숙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한 몸의 기억이 아니며, 또한 그것만이 전부도 아니다. 이러한 느낌들과 관념들에는 낯선 것이 개입한다. 의 기계 장치들이 생산한 것들 중에는 조우할 수 없는 서사들과 단편적 기억들이 마주치면서 우연히 발생한 관념들과 표상들 혹은 이미지들도 포함된다. 우연한 관념들, 표상들은 전적으로 기계의 메커니즘에 의해 덧씌워진 것들이다. 그렇기에 인식의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시간과 공간은 이것들에게서 유효하지 않다. 이예승은 바로 이 우연한 것들을 위해 1층과는 다른 장소를 마련한다. 그것이 2층의 내용을 이룬다.
여기서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이라는 장소의 역할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장소가 보안여관의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이다. 이곳은 양쪽으로 개방되어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중간에 서면 2층 바닥과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반대로 계단을 내려오면 1층의 천장과 바닥이 보인다. 더욱이 이 장소에서는 1층의 익숙한 사운드가 자연스럽게 2층의 낯선 사운드와 혼합된다. 오르내릴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그 자체의 사운드를 가진 계단은 양쪽 층을 위해 존재하는 완충지대 같다. 계단은 서로 다른 영역들을 아울러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공간이다.
1층의 사운드가 니체의 표현처럼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것이었다면, 2층의 그것은 기술이 인간적인 것으로 되기 직전의 사운드이다. 노이즈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인간적인 기술이 은폐한 사운드 같지도 않다. 노이즈 같지 않는 노이즈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것 역시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하는 무엇이다.
사운드의 혼합, 즉 아래층에서 위층의 사운드가 진동하고 역으로 위층에서 아래층의 사운드가 진동한다. 우리의 청각은 충분히 그 혼합으로부터 아래위 공간을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예승의 의도는 사운드의 혼합에 의해 아래위로 분리된 공간을 뒤섞어 놓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2층을 말하는 결정요소는 빛의 운동이다. 여기서 의 기계장치는 인간적인 것들을 위축시키고 자신의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실현한다. 매우 기술적이고 순수하다.
단순한 막대 이미지의 빛 운동은 공간을 관통하면서 분할하고 다시 이어놓는다. 15호실에서 출발한 빛의 운동은 9호실과 10호실을 거쳐 13호실에 이른다. 그리고 순간의 단절과 굴절을 통해 12호실에서 고립된 분절 운동을 반복한다. 여기에 머무른 운동은 사뭇 자극적인 붉은색과 보라색의 신호로 단속 상태가 된다.
15호실과 9호실 사이에는 외부로 향한 창문이 하나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눈길을 사로잡는 15호실의 재빠른 빛 운동이 갑자기 외부로 투사되었다가 다시 9호실로 되돌아오는 과정이 존재한다. 이 창문은 이 실현하는 빛의 시간 운동을 외부 세계의 시간으로 개방시킨다. 1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모든 기계장치들은 나의 관념들을 사로잡아 묶어버리지만, 2층 창문을 통해 기계적 메커니즘이 유사한 밝기(luminance)로 덧입혀진 관념들을 외부로 투사한다. 특히 저녁 무렵 날이 어두워지면 보안여관에서 빠져나간 빛의 시간 운동은 담벼락까지 뻗어나가 경복궁의 시간과 뒤섞인다.
기계적인 메커니즘이 장악한 2층 상황은 1층과의 완전히 분리를 원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 차이를 끊임없이 발생시킨다. 2층은 더욱 기계적이며 그래서 의식의 기억과 관념을 표백한다. 계속해서 간섭하는 1층쪽 사운드, 그리고 1층의 잔여물인 백열등은 2층에서는 노이즈가 된다.
빛의 시간 운동이 2층 대부분의 공간을 관통한다. 지배한다. 나아가 좌우로 움직이는 빛 운동의 연속, 그리고 마지막 끝 부분에서 이루어진 단속의 반복은 이 장소에서 시간이 매끈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매끄러운 듯 보이는 것은 단지 나의 머릿속에서만일 뿐이다.
불연속적인 시간들이 장악하고 있는 2층은 대체 무엇일까? 차갑고 낯선 관념들을 익숙한 기억들 틈 사이로 밀어낸 하얀 열기가 2층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1층에서 관념들은 여러 결들로 나뉜 시간들이었다. 그것들은 누군가의 의미들이 끈끈하게 붙어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느낌들로 이루어진 기억이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결들을 전기적 메커니즘이 생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층에서 빛의 시간 운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즉 우리의 삶과 함께하지만 의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의식할 수조차 없는 것들을 더욱 더 기계적인 것으로 변환시킨다. 스위칭한다. 인간적이지 않은 것들로, 즉 순수하게 만드는 것이다. 1층에서 발생한 의미들은 2층에 이르러 기계적인 순수함에서 탈인간적인 형태로 변형된다.
‘나’는 13호실 한쪽에 놓인 긴 의자에 앉는다. 뒤에서 옆으로 다시 앞으로 흐르는 감각 이미지들의 기계적인 시간 운동이 감지된다. 이것은 1층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방식이다. 빛과 사운드가 ‘나’를 관통한다. ‘나’는 메커니즘의 일부가 된다. 그곳에는 ‘나’가 그러한 운동을 지속시키거나 저지할 수 있는 스위치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기계적인 것에 의해 순수해진 의 2층에서조차 나는 이상한 분열을 직감한다. 2층에는 비록 말끔히 정리된 채이긴 하지만 여전히 보안여관의 오랜 의미들이 나무 바닥에, 나무 기둥에, 흙벽에, 나무 천장에 완전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쇠다리 여인’의 작동이 인간적인 관념과 인식의 습관을 통해서만 힘을 발휘했던 것처럼, 그토록 기계적인 느낌으로 가득 찬 이곳 2층은 오직 1층을 통과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이예승은 순수한 ‘기계의 영도(0 degree)’에 도달하려하지 않는다. 제로존(zero zone)에서 기계는 순수한 물리적 기능으로만 작동하는 존재일 것이다.
전작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예승의 작업은 인간종으로서 살아가는 방식, 즉 그때 그곳의 인간이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친숙한 관념들과 표상들을 내려놓지 않는다. (2013)은 제목이 매우 흥미롭다. 동굴 속에서 발견한 것은 늘 우리와 얽혀있는 우리이다. 플라톤의 오만한 착각과 달리 동굴 바깥이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 그것은 온전히 바깥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예승은 동굴바깥으로 우리를 안내하려는 구원적 비판(redemptive criticism)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것’에 기계의 메커니즘을 개입시킴으로써, 오랜 진화의 습속에 안락하게 들어앉은 ‘나’의 의식이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드러내보여주는 일에 집중한다. 물론 그 나머지는 우리의 몫이다.
은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매끈하게 작동하는 기계 메커니즘을 낡은 보안여관의 건물에 이식한 결과물이다. 금속 캐비닛의 문을 하나씩 여는 운동으로 숨겨진 내용물을 꺼내듯, 의 기계 운동은 원래 공간에 달라붙어있던 인간적인 것의 관념들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또 두렵고도 낯선 방식으로 진동하도록 변환시킨다. 진폭이 아래위로 심하게 흔들리면서 의식할 수 없는 기억들과 느낌들을 순간순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작가의 것도, 나의 것도, 보안여관의 것도 아닌, 그래서 누구의 것도 아닌 무엇이다. 어쩌면 그저 관념들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시간의 결들에 붙어있던 인간-기계의 관념들이 의 안팎에서 식물의 푸른 하늘거림처럼 명멸하고 있다. (사진, 이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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