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국민대학교 미술학부 회화전공 학사, 한국
국민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전공 석사, 한국
개인전
2013 사라진 모뉴먼트, 갤러리 도스, 서울
2013 사이성의 알레고리, 아트 스페이스 에이치, 서울
2009 스핑크스의 눈물, 송은 아트 큐브, 서울
2008 하피의 숲, 갤러리 도올, 서울
2007 델리리움: 꿈꾸는 속도를 빠르게 하는 카페인, 미술 공간 현, 서울
2005 YA PROJECT5: 욕망의 알레고리, 가 갤러리, 서울
부스 & 2인전
2008 의식의 신세계(석사 학위 청구전), 국민 아트 갤러리, 서울
2006 TESTICLE _상징적 거세(데이빗린치 오마주 퍼포먼스), 국민 아트 갤러리, 서울
2005 키아/오컬트 파워, 국민 아트 갤러리, 서울
그룹전
2012 도어즈 아트페어 2012, 임페리얼 팰리스 호텔, 서울
2012 소셜 아트 @예술, 소통방식의 변화, 사비나 미술관, 서울
2012 신 새김전, 아트 스페이스 에이치, 서울
2011 서울 컨템포러리 신세대 아트스타 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서울
2011 나는 화가다, UNC 갤러리, 서울
2010 서투른 건 하고 싶지 않아, DNA 갤러리, 서울
2010 예술, 도시의 부활을 외치다, 문래 예술 공장, 서울
2009 서고운 쇼케이스, 플래툰 쿤스트할레, 서울
2009 극장전, 삼성극장, 부산
2009 아트로드77-with art, with artist, 아트스페이스, 헤이리
2009 프로포즈, UNC갤러리, 서울
2008 대학미술협의회 기획전_대동단결, 한국예술종합학교 신축교사갤러리, 서울
2008 풍경과 상상, 그 뜻밖의 만남, 고양 아람미술관, 고양
2008 아파아파, 그문화, 서울
2008 인사미술제 - 미와 추의 사이, 본 갤러리, 서울
2008 SeMA 2008-미술을 바라보는 네 가지 방식, 서울 시립 미술관, 서울
눈 없이 보기, 귀 없이 듣기, 입 없이 말하기
─ 서고운의 작품들이 조각 없이 조각내는 것과 애도 없이 애도하는 것
최정우 (비평가, 작곡가)
서고운의 작품을 처음으로 봤던 때가 언제였던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까지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을 그의 화력(畵歷)을 생각할 때, 아마도 2011년의 어느 언저리쯤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하여 회고할 뿐이다. 그러나 처음 봤던 순간의 그 열광만큼은 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서고운의 작품을 처음으로 봤던 곳은 어디였던가. 만약 이 물음이 그의 작품을 육안(肉眼)으로 직접 본 장소를 묻는 질문이라면, 나는 그곳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어떤 단체전이 끝나갈 때 즈음, 나는 오로지 그의 작품만을 보기 위해서 전시회 마지막 날에 한 전시장을 찾았고, 거기서 나는 작가와 그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직접, 그것도 동시에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작품들을 철수하고 있었고, 미안하고 동시에 감사하게도, 나는 다시 포장되어 작업실로 귀환하기 직전에 놓인 그의 작품들을 재차 열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작품들을 그저 그렇게 떠나보내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아쉬워 용달차에 작품들을 실을 때까지 그 작품들과 함께했다. 보이던 작품들은 다시 포장되었고, 그렇게 다시금,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보이게 될 것이(었)고, 또한 다시 보게 될 것이(었)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고 첫 응시였다, 그렇게 기억한다. 하여 나는 이 만남과 응시를 하나의 작지만 분명한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 작품들은, 눈 없이 바라보고, 귀 없이 귀를 기울이며, 입 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것은, 바로 이 부재(不在)의 사건이 존재(存在)했다는 사실, 그리고 또한 앞으로 그러한 부재가 간헐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예고, 바로 이러한 사실과 예고에 관한 것, 바로 이 사실과 예고 사이에 위치한 어떤 시간과 공간, 그 기이한 좌표에서 발생하는 어떤 사건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무엇이 사건인가, 그림이 묻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살기 위한 어떤 치열한 의지가 아니라 죽음을 바라보는 어떤 치명적 관성을 향해 있다. 그런데 그러한 방향성의 눈을 지니고 있어야 할 그림 속의 ‘증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그 눈, 혹은 얼굴이 가려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눈이 없는 존재, 보고 있으면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맹인, 뒤통수는 존재하지만 얼굴 자체는 부재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그런 이상한 목격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림을 바라보는 나는, 바로 이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보이지 않는 증인의 증언에 대한 또 다른 증인, 저 목격할 수 없는 목격에 대한 또 다른 목격자가 되고 있다. 거기에 사건의 형태로 놓여 있는 것은, 원인과 과정과 결과가 확연히 그려지는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녹아내리는 육체’가 있는 풍경, 따라서 숫제 풍경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부재하는 사건의 풍경이다. 이야기 속의 화자 또는 그림 속의 목격자가 바라보는 어떤 사건, 그러나 동시에, 이야기 속의 벙어리 또는 그림 속의 눈먼 이가 말하지도 바라보지도 못하는 어떤 사건, 이 기괴한 사건을 바라보는 기괴한 목격자라는 또 하나의 사건을, 나는 그렇게 말하지도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말하거나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다시 묻자면, 이 불가능한 사건 앞에서, 그림 안의 증인은, 그리고 또한 그림 밖의 목격자는, 어떤 애도를 표현해야 하며 또한 표현할 수 있을까.
무엇을 애도하는지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애도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애도가 과연 가능할까. 섣불리 대답하자면, 그러니까 바로 이 대답을 가장 멀리 지연시키기 위해 대답하자면, 아마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애도란 어떤 확정적인 대상에 대한 확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연약하고 무력한 이들’이란 그림 속의 어떤 특정한 존재나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명명 혹은 호명은 어쩌면 이름 부를 수 없는 그림 밖의 또 다른 목격자들의 ‘이름’을 위한 것, 따라서 여기서 애도되는 것은 아마도 그림 밖에서 그림 안을 애도하는 자, 바로 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애도는 어쩔 수 없이 깊은 늪 안으로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가면서 우울증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 말 그대로 여기서 애도는 그 자신의 탈을 바꿔 쓴다. <애도의 사막>의 이러한 탈바꿈 속에는 서고운의 작품들이 이후 계속해서 반복하고 변주하며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형상들의 어떤 원형이 담겨 있는데, 여기서의 ‘원형’이란 기원으로서의 원형(原形)이 아니라 차라리 어떤 발생학적 단위로서의 원형(元型)에 더욱 근접하는 것이다. 도살되거나 조각난 (그러나 바로 그럼으로써 접합되는) 고깃덩어리, 얼굴도 없고 표정도 없는 (무표정의 표정을 지닌) 인물들의 군상, 널브러져 있거나 녹아내림으로써 (비로소) 전시되는 육체들, 무대를 구획하기도 하고 제거하기도 하는 천들과 막들, 더럽거나 정갈한 식탁 혹은 성스럽거나 상스러운 제단, 하늘과 땅 혹은 위와 아래의 (불분명하나 분명 존재하는) 대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 모든 형상들에 의해, 오히려 애도하려는 자는 그 스스로가 애도되며, 거꾸로 애도되는 대상은 애도를 통해서 사라지기는커녕 다시금 더욱 일그러진 불안의 형태로 귀환하고 회귀하게 된다. 애도하는 자는, 그 자신의 애도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교살되며 질식한다.
서고운의 풍경 속에서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Vanitas, lux mea, (진리가 아니라) 허무야말로 나의 빛인 것. ‘바니타스 정물(Vanitas' still life)’의 주제는 여기서 또 한 번의 언어적 변용을 하게 되는데, 서고운의 그림들 안에서 증식하고 번식하며 창궐하고 있는 ‘정물(still life)’이란 또한 ‘아직도 살아 있음(still living)’에 대한 죽음의 증거, 다시 말해 부재의 존재에 대한 증언이자 불가능의 가능성에 대한 목격이 된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이렇게 그 존재가 가능해지는 증언과 목격은, 바로 그 존재 자체 때문에, 동시에 부재하고 불가능한 어떤 것이 된다. 죽어 널브러진 것들의 일견 정적인 배치의 구도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들, 곧 지금도 여전히 살아내야 하는 것들의 적나라한 구조와 힘을 폭로하고 노출시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시각적 변증법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여기서 더 중요한 것, 더 시급한 문제는, 보이게 하는 힘과 보게 하는 힘 사이의 변증법적 투쟁이다. 서고운의 작품들 속에서 드러나는 사건이 만약 어떤 ‘결과’를 그려내고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투쟁의 전장(戰場)일 것이며, 만약 그것이 여전히 생존해 있는 것들의 어떤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이러한 싸움의 풍경(風景)일 것이다. 그것들은 눈 없이 응시하고 귀 없이 경청하며 입 없이 고함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복화술사들>을 바라봐야 한다, 눈 없이, 그리고 또한 말해야 한다, 입 없이. 입 없이 무언으로 말하고 있는 존재들, 잘려진 손만으로, 오직 그 손에 달린 손가락만으로 무언가를 헛되이 가리키려고 애쓰는 존재들, 형상들, 사물들, 조각들, 조각 없이 조각난 조각들, 하여 애도 없이 애도를 반복하는 헛된 부재의 존재들. 고깃덩어리 밖으로 숨 막히듯 답답하게 삐져나온 머리는 머리카락을 문 채로 입을 다물고 있고, 종이로 만들어진 것처럼 힘없는 얼굴은 입조차 막혀 있는 불능의 상태이다. 말하자면 문제는, 바로 이러한 불가능의 상황에서 어떻게 가능성의 조건들을 끌어내는가 하는 것, 그림을 통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실의 불가해함 속에서 어떻게 다음 발걸음을 딛는가 하는 것이다. 하여 나는 서고운의 작품 <구토>야말로 그가 눈 없이 바라보고 귀 없이 귀 기울이며 입 없이 말하려고 하는 본령이 가장 잘 드러난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토> 안에서 인물은─물론 그것을 ‘인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그 자신의 배설의 위치, 배변의 장소에서 오히려 거꾸로 무언가를 게워내고 있다. 게다가 그것도 입이 아닌 곳으로, 입으로 게워내야 할 것을, 기어코 입이 아닌 다른 곳을 통해, 조각난 얼굴의 틈으로, 반쪽이 난 두개골의 틈으로, 더욱이 먹는 것인지 싸는 것인지 모를 어떤 구멍으로, 그렇게 게워내며 또한 흡입하고 있다. 이 ‘구토’의 풍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이 질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러니까 이 질문이 묻고 있는 ‘이해’를 정말 이해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당신은 나의 글을 허투루 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구토의 풍경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역전된 배설, 이 역설적 섭취, 이 전도된 사건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을 그린다는 것, 그리고 그런 풍경들을 부조리하게 살아낸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불가해한 풍경과 부조리한 생존을 통해서만 비로소 어떤 목격이, 어떤 청취가, 어떤 증언이 가능해진다는 것, 다시 말해서, 죽음을 향한 눈먼 바라봄을 통해 비로소 어떤 시선이 가능해지고, 부재를 향한 귀먹은 귀 기울임을 통해 비로소 어떤 청취가 가능해지며, 불가능에 대한 입 없는 발설을 통해 비로소 어떤 애도의 증언이 가능해진다는 것, 하여 이 불가능한 가능성을 계속해서 그려나가겠다는 것, 나는 이것이 서고운의 작품들이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으며 또한 걸어갈 어떤 ‘애도의 사막’, 그렇게 차려낼 ‘부조리한 식탁’이라고 생각한다. 서고운의 작품들은 따라서 그 자체로 ‘예기치 못한 사건’이며, 그러나 동시에, 그런 예기치 못한 사건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진행의 풍경을 문제 삼는 것, 그 풍경을 보이게 하는 힘과 보게 하는 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사유하는 것, 그런 하나의 사건이기도 하다. 서고운의 하얀 식탁보 위에 한편으로는 가장 성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가장 더럽게 차려진 제단, 그 위에서 가장 익숙한 것들이 가장 낯설게, 그리고 가장 생경한 것들이 가장 친숙하게 교차하고 교살되며 교미한다. 그러므로 저 제단 위에서 눈을 감아 그림을 바라보고 귀를 닫아 그림에 귀 기울이며 입을 닫아 그림을 증언할 몫은 온전히 나와 당신의 것으로 남는다. 나와 당신은 이 성스러운 것과 더러운 것의 몫을, 구토를 하며, 다시 삼키며, 그렇게 살아내며, 수행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바로 거기서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질 것이며, 또한 우리가 그러한 사건들을 벌이게 될 것이다. 눈 없이, 귀 없이, 입 없이,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조각내듯 다시 접합하면서, 그렇게, 바로 그 ‘사이’에서.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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