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연세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학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학과 대학원과정 졸업
개인전
2013 롤랑의 노래, 갤러리 버튼, 서울
2012 성스러운 밤: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롯데갤러리, 광주
2011 [Tu], 금호미술관, 서울
2009 Salo, 주인의 비열한 규칙들, 아트스페이스 미테, 광주
2009 Panicroom, 아트스페이스 헛, 서울
2007 Blow Up, 갤러리 정미소, 서울
단체전
2013 L'Imaginaire, LIG아트스페이스, 서울
2013 Interpenetrate 국제교환입주프로그램 참여작가 보고전, 창동스튜디오, 서울
2012 오픈스튜디오 8, 고양창작스튜디오, 경기
2012 오픈스튜디오, 쿤스틀러하우스 슐로스 발모랄, 독일
2012 No.45 Kumho Young Artist, 금호미술관, 서울
2011 길에게 묻다, 갤러리 잔다리, 서울
2011 코리아 투모로우, 예술의 전당, 서울
2011 Beyond Issue, 갤러리 조선, 서울
2010 상상적 진실, 갤러리 175, 서울
2010 히스테리, 대안공간 루프, 서울
2010 1세기의 첫10년,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서울
2010 coming-out: 진정한 장소, 통의동보안여관, 서울
2009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갤러리소소, 헤이리
2009 인물-징후, 갤러리 킹, 서울
2008 불량배: 타자의 이미지, 갤러리 쿤스트독, 서울
축제
이병희 (미술비평)
대상화된 관람
벌써 오용석의 첫번째 개인전 (갤러리정미소, 2007)으로 인연을 맺은 것이 벌써 5년 전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채집한 소재였던 실제 인물들(나진스키, 엘리자베스 쇼츠, 조이 스테파노)의 잔인하고 비극적인 스토리와 그것을 회화라는 사치스러운 매체로 그리면서 작가가 뱉어내던 이야기들이었다. 전시장에서 이 이야기들은 물컹한 페니스들과 더불어 강한 색채의 물감으로 반죽되고, 짓이겨지고 반죽되어 캔버스에 그려졌다. 법의 차원에서는 도저히 다스릴 수 없는 인간 욕망의 사악하고도 고혹적인 사도마조히즘적 폭력의 양상들, 그 폭력의 과정에 어쩔 수 없이 눈길을 사로잡히는 공범자이자 쾌락주의자로서의 관람자. 그 관람이 도리어 이제 화면에 떴다. 그 관람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폭력의 결과에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자리에서 지극히 잔인한 관람을 지속한다. 폭력의 현장과의 관람의 거리는 아슬아슬하게 가깝지만 안전하다. 그 관람은 그렇기에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적인 차원을 추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쾌락의 운명은 쾌락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어떤 욕망의 궁색한 바닥을 치는 것으로 치닫는다. 그 순간 쾌락은 매혹된 대상들과의 관계를 새로 설정하여야만 되살아나는 새로운 운명의 길로 접어든다.
슬프지만 애도하지 못하는 자
""회화""라는 행위가 소극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나마 어떤 애도의 작업이 된다면 어떨까. 아니, 다시 말하자. 애도하지 못하는 자의 초상을 통해서 애도를 무대화한다면 편이 낫겠다. 사실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제대로 ""애도""할 수 없다. 온갖 상실들, 가령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과 헤어졌거나 잃고 나서 그 상실에 대해 슬퍼하고 극복하고 새로운 대상을 찾을 때까지의 그 과정을 겪을 수가 없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거나 아니면 애도의 방식이 이미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애도는 너무 완벽하게 끝나는 듯 보인다. 마치 슬픔의 정도와 애도의 방식 혹은 기간은 비례적으로 계산되는 듯 치뤄지고 정작 애도의 주체는 정신만 혼미해지고 만다. 집단적인 차원으로 확장하여보면, 국가적 사명을 달성코자 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자취들은 쉽게 지워지고, 없어지고, 부셔지고, 잊혀졌다. 그 과정에서 상실된 그 무엇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무엇(도대체 무엇인지 이젠 정말 잊어버렸나보다)들을 매장시키고 그 매장-상실에 대해서 그리워하거나 애도하고자할 때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했는가? 대부분은 그 상실의 책임을 묻기만 하거나, 혹은 그 상실의 값이 얼마 얼마로 매겨지는 식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조금 서설이 길었지만, 애도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며 그 수행은 절대 완벽할 수 없다. 애도는 완벽하게 끝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차원으로 승화되는 과정이라고 하여야할 것이다.
그간 줄곧 봐온 오용석의 작업을 보자면, 수차례에 걸친 반복적인 행위들 속에 애도의 차원을 담지하는 것이 느껴진다. 작품들에는 항상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떤 이미지들이 있고, 그 안에 관능적이면서 동시에 차갑게 느껴지는 몸들이 있다. 채집된 이미지들은 지속적으로 반복, 왜곡되어 등장한다. 여기에 지배적인 정서는 비극적이고 외롭고 스산하고 우울한 느낌들이다. 그런데 항상 그렇듯 이 느낌들은 '대상'들의 주변을 서성이기만 한다. 만남은 어긋나고, 관계는 절단되며, 대상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림에서 몸들이 서로 엉키어있거나 붙어있는 듯 보여도 말이다. 이 느낌들은 주로 그의 작업 노트에서 지배적이다. 근데 이 서성이는, 소유되지 않고, 소유하지 않고, 항상 이별이 예견되는 이 느낌은 우리에게 익숙한 느낌이다. 즉 뭔가를 소유하지 못하였기에 한 번도 제대로 상실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애도해 본적도 없는… 단지 뭔가 갑자기 항상 들이닥쳐 뭔가를 앗아가서 허망한 그런 느낌이다.
지난 개인전 (금호미술관, 2011)는 어떤 불가능한 관계와 그것의 비가시성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군상(기사들의 춤 : 카우보이 댄스 스태그, 2011)에서 인물들은 집단적으로 어울려있지만 제각각이고, 떠난, 사라진,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애절한 정서가 가득하다. 실루엣만으로 암시되는 어떤 대상의 자취들. 그런데 이는 단지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집단의 기억이 전이된 것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그런데 집단의 기억은 반복된 상실들에 무감각하여 도대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른 채 불감증에 걸려버렸다. 그리하여 헤어짐-상실-망각은 무감각하게 반복된다. 쾌락이 그것의 작동기제가 멈추었을 때 새로운 대상들을 찾고 새롭게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면, 상실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 메말랐을 때 대상은 어떻게 거듭 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
발광하는 색, 그것은 화려한 무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전시에서의 인물들은 ""환희에 가득 찬 듯""발광하는 색채들에 휘감겨있다. 이 발광하는 색들에 사로잡힌 몸들은 회화가 되어버렸다. 이제 이 몸들은 더 이상, 구체적인 개인의 육체이라기보다는 그저 이러저러한 몸뚱아리들일 뿐 아닌가. 아무리 고문당하고, 살해당해 난자당했을지라도, 혹은 아무리 격렬하게 사랑을 나눴을지라도, 아무리 아름다운 몸들에서 성애의 육즙이 물씬 풍겨 나왔다하더라 할지라도. 이제 그 몸들은 어떤 스토리를 갖지 않는다. 어떠한 관계, 그것이 폭력적인 것이건, 성애적인 것이건 간에 그 여타의 관계들로부터 초연하다. 이제 몸들은 단지 색으로부터 배어 나온다. 얼굴만 둥실 떠 있거나, 색-자연 배경에 배어버렸다. 여전히 실루엣만으로 그 흔적만을 남긴다. 그러나 불분명한 몸들의 제스처들은 체위만으로, 포즈만으로, 표정만으로 엉켜있다. 즉 쾌락의 대상으로서의 제한된 육신을 벗어난 껍데기 혹은 탈주체화된 이 몸들은 육체를 떠나고 관계를 떠나버린 채 행위만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에 기뻐하기에, 이들은 발광하는 색채들 속에서 그들만의 축제에 빠져있는가. 회화 속으로의 탈출? 아니 도피? 발광하는 노란, 하얀, 빨간, 푸른, 검은…. 색들과 더불어 우리 아름다웠던 기억 속으로 한껏 빠져들어가볼까? 아니 그것을 재현해볼까? 글쎄, 어떤 면에서 제스처들만 남은 몸들은 기억의 찌꺼기인지도 모르고, 자유로운 새로운 대상들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색들이 밝게 발광할수록 그 역할은 ""승화""의 책임을 떠맡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승화"". 그것 참으로 아리송한 말이다. 어찌 보면 여태 반복되어온, 다시 말해 유령처럼 계속 불려 나온 그의 소재들은 ‘성스러운 밤 (Holy Night, 2012)에서 드디어 장례를 치르고 한 번의 푸닥거리로 영원한 굿바이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게 ""승화""라면 기나긴 애도의 과정, 점차로 ""대상""들을 진정으로 떠나보내는 시점에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다.
현대의 고민하는 주체들의 고민 내용은 이렇다. 쾌락도 우울함 조차도 작동하지 않고 욕망의 기능이 바닥을 쳤는데, 습관적인 유희와 거래만이 지속되면서 '생명' 차원을 고집해야하는 것. 그 자체가 고민이다. 즉 죽음과 고요만이 기다리는 죽음충동만이 춤판을 벌이고 유령들만이 난무하는 마당에 도무지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용석의 작업들은 생각보다 쉬운 제안을 한다. ‘우리 푸닥거리 한판 합시다’라고.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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