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한국
타마미술대학대학원 미술연구과 조각전공 석사과정 졸업, 일본
타마미술대학대학원 미술연구과 박사과정 졸업, 일본
예술학 박사학위 취득, 일본
개인전
2013 Nomadic Navajo, 홍은예술창작센터, 서울
2013 Defensive Measure, 쿤스트독, 서울
2010 Defensive Measure, 문신미술관, 서울
2009 Defensive Measure, 갤러리 ZERO HACHI, 도쿄, 일본
2008 Defensive Measure, 갤러리 하시모토, 도쿄, 일본
2008 Defensive Measure, 아트포럼뉴게이트, 서울
2007 Defensive Measure, 보다사진아트센터, 서울
그룹전
2013 기계, 생명을 꿈꾸다, 경기도미술관, 안산
2012 입체조형展, JARFO, 교토, 일본
2012 Qultagh, ADAMAS253, 헤이리
2012 Hero,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
2012 바츠혁명, 경기도미술관, 안산
2012 폭력의 경계, 아트스페이스 휴, 파주출판단지
2012 모옌가르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
2012 서울 국제조각 페스타, 예술의전당, 서울
2011 한-일 국제교류展_JARFO_교토,일본
2011 타마미술대학 박사과정전, 타마미술대학 미술관, 도쿄, 일본
2010 SADU국제교류, DORADO Gallery, 도쿄, 일본
2009 co-core 국제강평회, 타마미술대학, 도쿄, 일본
2009 경계,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2008 하치오지, 하치오지 View tower, 도쿄
2008 6 Young Artists of Artforum Newgate, 아트포럼뉴게이트, 서울
2008 五美大展, 국립신미술관, 도쿄, 일본
2006 Defensive Measure, 1/3 gallery, 도쿄, 일본
2006 Discovery 2006, key gallery, 도쿄, 일본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것인가.
이진명 (큐레이터)
작가 손종준의 이력은 우리에게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작가 작업의 위세를 느낄 때마다 앞으로의 귀추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될 만큼 확신 가는 부분이 많다. 손종준은 알루미늄이라는 금속성 물질을 인체와 결합시키는 이채로운 조각 작품을 선보여왔다. 작가의 작품은 인체라는 대상이 반드시 선결조건으로 포함된다. 그의 작품은 인체를 방어하는 기제(機制)로서, 인체라는 주체를 보완하는 보족적 수단(complimentary mean)으로서, 그리고 주체를 방어하는 보호자로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작품은 하나의 상징이지 그 자체가 지시하는 미적 완결이라든지 미적 즐거움과 같은 형식과 효과는 차후의 문제가 된다. 작품을 제시하면서 작품 자체가 지닌 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유인적 기제(co-optive mechanism)라는 점이 다른 작가와 손종준 작가를 구별 짓게 하는 두드러진 특성이었다.
이러한 작품의 시리즈 이름은 근래 한국 미술계에 정통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데, 바로 '자위적 조치(defensive measure)'라는 시리즈였다. 자위적 조치란 말 그대로 군사적 용법을 떠올리게 한다. 적이나 타자로부터 나를 스스로 지킨다. 이 원칙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사전적 예방에 있다. 상존하는 위험으로부터 나를 구제하기 위해 위험 요소를 제거하려는 경향을 가리켜 '자위적 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게르만의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갈릴리 원정을 택한 것이나 시황제가 시행했던 만리장성의 축조, 현대 미국의 테러 국가 지목은 대표적인 자위적 조치의 비근한 예시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적 집단적 규모가 아니라 각각의 개인 개체에서도 자위적 조치를 엄밀하게 작동시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작가의 관점이다. 근대와 동시대를 구분 짓는 특이성, 더 나아가 모든 과거와 현재를 구분 짓는 특이성, 현대 문명의 특이성은 통일된 전체성으로부터 개체를 더욱더 독립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이 현대 문명의 그것이라는 작가의 관찰에 우리의 감각을 집중시켜야 한다.
서구화나 현대화라는 말은 지고의 선인 것마냥 우리 뇌리에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지 이미 오래다. 서구화, 현대화는 우리로 하여금 과학을 숭상하고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인식시키는 데 있어서 지대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반대급부의 대가도 지불해야 했는데, 그것은 황금주의, 기회주의, 물신(物神), 개인주의적 이기심,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 등으로 나타났다. 서로를 잇는 전체적 통일성의 상실이야말로 현대라는 시대가 앞으로 갚아가야 할 영원한 정신적 채무인 셈이다. 전체적 통일성(total integrity)이 상실된 시대는 개인의 치밀한 자기 방어만이 유일한 삶의 형식이 된다. 손종준은 이 부분을 못내 아쉬워한 것이다. 은빛의 눈부심이 외부로 찬연히 산란되지 못하고 안으로 갇혀버리는 알루미늄의 투박함은 자기 방어를 가까스로 해내는 우리의 불안함을 증폭시켜 표현해준다. 솟아오른 볼트와 너트의 결합은 마치 장미 가시처럼 애처로운 자기 방어를 연상시킨다. 작가의 심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캔디드 카메라(candid camera)라는 미덕을 송두리 채 버리면서까지 연출사진의 자기 표현을 극단적으로 감행했다. 사진에 등장하는 모델의 삶과 미래로의 예측까지 무시하면서까지 배우가 아닌 일반인에게 자기 주관의 극한의 구석까지 대신해서 표현하라고 요구한 셈인데, 그것은 작가 자신의 이 세계 해석의 확신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우리는 '자위적 조치'가 어째서 탄생했는지에 대해서 비교적 간략하게만 생각하고 지금부터 신작이 어떠한 경위로 태어났는지 검토해야 한다. 작가의 2013년 신작은 미디어가 지니는 위세의 속성이 무엇인지 강렬하게 돌파하려는 작가의 실험이 돋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두 개의 작품이 메인 이벤트처럼 자리하게 된다. 첫 번째 작품은 다소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구동되는 작품으로서 키네틱 아트의 속성에 설치미술, 미디어 아트의 성격이 종합적으로 융합되어있다. 알루미늄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에서 첫째로 모터 동력이 원반을 회전시킨다. 원반에는 모스 부호(Morse Code), 즉 20세기 초에 최초로 사용되었던 군사적 전파 신호가 탑재되어있다. 이 작품의 외부로 TV 모니터가 설치되어있고 이 모니터에는 실시간 뉴스 방송이 상영된다. 이때 작가가 고안한 메시지인 모스 부호는 뉴스 방송을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방해하거나 혹은 모스 부호가 빛으로 변환되어 모니터 화면의 방송을 관람객의 감상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이탈시킨다.
두 번째 작품도 마찬가지 기제를 활용한다. 작가가 고안한 설치작품은 분명히 모니터의 화면을 관객에게 정확히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것이 맞는데, 이때 모니터 화면을 가로막는 불투명 유리가 화면 앞에서 전후를 반복적으로 운동하면서 관객의 시야에 정보를 제공하다가 일순 정보를 차단시킨다.
미디어는 20세기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미디어는 정보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근세의 회화나 근대 사진의 작품과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더군다나 그것이 옛날 회화이든지 요즈음의 미디어이든지 정보의 제공이라는 현상은 일방적 방향으로 무조건적으로 흐른다는 측면에서 정치적이다. 정보를 유출시켜 분산시키는 과정에서 제공자의 이득과 신념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요소이다. 그러나 현대 미디어가 과거에 비해서 위험한 것은 일반대중의 사실판단은 물론 가치판단까지도 아주 능숙하게 조절하고 조장할 수 있는 파워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주체의 실존적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중한 세계관의 형성을 저해한다. 또한 대중의 원하는 방향이 미디어에 작용되는 일도 실로 요원하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더욱 안 좋은 것인데 현대의 매체, 즉 미디어가 지니는 몰입성은 개인의 사회에 대한 관계형성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대화나 교류를 통해서 주고받는 관계성이야말로 사람을 성숙시키는 끝없는 인생의 과정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기본적 인간 조건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체계로 단축화시키고 편익화시키는 것이 미디어가 파생시킨 현대 인간의 비극이기도 하다. 작가는 정보의 일방적 통행, 심각한 개인주의화, 이로 인한 개인의 미성숙의 연속적인 사회역사적 흐름을 중차대한 문제의식으로 삼은 것이다.
일본어 중에 '히키코모리'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은둔형 외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심각한 사회문제이고 서구를 비롯한 세계로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 원인을 단연코 핵가족화, 정보통신의 발달, 취업문제 등 도시화와 현대화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그것은 상실감과 자기모멸을 극대화시킨다고 한다. 피부와 피부, 손과 손, 정서와 정서의 직접적 교감이 점점 귀해지고 드물어지는 시대이기도 하거니와 TV나 온갖 미디어의 현란한 속도감과 스펙터클한 감각은 휴머니즘의 가치를 너무도 손쉽게 망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작업이 유쾌하거나 경쾌하다 못해 유머러스한 발상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작가의 고민은 사실 진중하기만 하다. 현대 그 자체를 상징화하고 있는 미디어의 화면에 최소한의 개입과 중재를 통해서 작가가 우리에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한 전광판의 직접적 메시지를 반투명 유리로 흐릿하게 처리하면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수많은 해석과 반응이 따를 것이다.
물음에 대한 대답을 나는 이렇게 본다. 우리는 도시화와 현대화까지 받아들였다. 그것이 좋고 싫고의 가치판단도 보류한다. 그것까지 받아들인다. 그리고 양극화와 세대, 지역, 종교, 인종 간의 격차와 괴리는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것까지도 받아들이자.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이란 것은 있다. 작가로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예술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이다. 작가는 모든 사회현상의 문제를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재단하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바라볼 때조차 버릴 수 없는 한가지는 예술은 포스트 휴머니즘을 위한 마지막 메시지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예술이라는 인문적이며 미적인 장르 자체도 제도와 권력의 기호에 맞게 일방적 통행을 강요 받을 수밖에 없는 요즘이다. 특히 우리처럼 과거와의 단절을 감행하고 서구의 스탠다드를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사회에서는 예술과 예술가의 태도마저 서구의 그것을 닮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현재에 대화를 거는 태도 하나만은 우리의 총체적 문제와 발단을 되짚어내는 지향성을 지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작가의 생각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장기적 합목적성을 지닌다고 한다. 쉽게 이야기 해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결국은 좋게 작용하는 순행의 법칙을 이어온다는 낙관적 믿음이다. 이 말은 부정에는 희망이 없다는 말과도 맥락을 함께 한다. 다만 장기적 합목적성이라는 말의 전제는 현재를 끝없이 좋게 수정해가려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작가는 부정적 비판보다는 긍정적 개선을 원한다. 따라서 작가의 세계는 소통과 교류, 인간적 휴먼 터치의 활성화를 작품으로 개진시키려는 사고의 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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