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면서 보여지고 있었다’.
박수진(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서울시립미술관 신진작가 전시프로그램에 선정된 하대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젊은 작가답지 않게 일상적인 삶과 연관된 재치 있는 아이디어를 갈구하지 않고, 전통적인 재료를 가지고 인간이라는 화두(話頭)를 통해 자아를 투영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 이 작가를 이토록 무겁게 하는 걸까.
하대준은 2006년 첫 개인전, 《닭을 만났다》전을 개최했다. 반지하방 창문을 통해 우연히 마주친 닭과의 실제 경험을 형상화한 것이다. 깃털을 세밀하게, 닭의 눈을 예리하게 묘사함으로써 닭은 거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에게 ‘닭’은 어떤 존재인가? 전시제목에서의 ‘만났다’와 ‘닭’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어느 날 눈떠보니 닭 한 마리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닭을 본다
닭은 나를 본다
나는 내가 닭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닭은 자기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닭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닭은 닭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런 닭을 보고 있었고
닭도 그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보면서 보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지하방은 아주 낯선 곳이 되어 버렸다.”
그는 닭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치 하나의 정물을 대하듯 디테일한 묘사는 신비감을 더하여 닭의 존재감을 강화시킨다. 마치 내가 네 안에 투영되어있는 듯 네가 내 안에 투영되어 있는 듯 그 느낌은 강렬하다. 이러한 자아의 투영은 2회전인 2007년《하얀숲》전시에서도 나타난다.
“지난 여름 차를 타고 가다가 혹은 길을 걷다가 숲을 보게 된다.
온통 나뭇잎으로 뒤덮인 숲은 땅 모양을 따라 마치 끓어오르기라도 하는 양 푸름으로 일렁인다.....
그러한 산의 덩어리를 보고 있으면 무엇인가 꿈틀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마치 어느 거대한 동물의 호흡처럼 느리게 아주 느리게...”
숲이라 명명한 작품은 검은 바탕을 배경으로 나무 또는 깃털로 뒤덮여 있는 듯한 덩어리감을 표현함으로써 신비롭고 비밀스러움을 자아낸다. 작가는 그 거대한 생명체가 닭이라는 존재와 통한다고 언급한다. 작가는 이렇듯 숲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자신의 감정이 닭으로 그리고 숲으로 투사되며, 닭에서 느끼는 꿈틀거리는 유기적인 힘, 그 은밀함이 숲의 비밀스러움으로 투영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이렇듯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가 동시에 나타난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61)는 주체나 대상의 구별이 없이 보고 있는 나를 지각하는 나, 보여지는 것을 지각하는 화가를 언급한다. 인간의 존재는 대상과의 접촉에서 나를 인지하게 된다. 세계란 나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 단지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즉 세상을 본다는 것은 단지 눈으로만이 아니라 사유를 통해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 없이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의 시간구조는 축적과 회고를 통해 작동한다. 그는 현재 시점의 가시성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그 이전일수도 또는 그 배후일수도 있는 비가시성과 은밀한 관계에 주목한다.
하대준에게 닭이라는 대상은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식용을 목적으로 사육되는-자기 존재가치를 상실해버린 존재로써 작가의 유아기적 억눌린 욕구를 품고 있는 성인아이적 성향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닭의 시선에서 느꼈던 두려움은 어린시절 병아리의 사체에서 보았던 ‘눈이 없음’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잃어버린 눈을 회복한 완전함 때문에 닭은 두려움의 대상인 반면 작가에게 자아실현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작가는『인체와 닭을 통한 ‘두려움’의 심리 표현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두려움이란 피하고 싶은 것일 뿐 아니라 매달리고 싶어 하는 것이기도 하는 이중성을 지닌 감정으로 서술하고 있다.
2011년《사람들》과《인간적》라는 전시를 개최했다. 그가 생각하는 ‘사람들’, ‘인간적’이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인간이란 자신의 실체를 자각하며 도덕적 양심을 가지고 신을 인식하는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대준의 작품에 나타난 인간이미지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가진 존재로써 두려움의 대상인 닭의 강한 이미지와는 대조를 이룬다. <보칼리제>(2004)에서 한 인물은 왜곡된 긴 팔을 아래로 드리우고 있다. 하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땅을 향한 긴 팔의 제스춰는 기원과 염원이 아닌 숙명을 받아들이는 제스춰이다. 또한 (2006)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점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에서 ‘어머니’란 삶의 지난(至難)함을 겪으면서, 그 고통과 불완전함을 새로운 생명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신체의 한 지점을 향해 혼신을 다하고 있는, 거기에는 더 이상의 기운도, 욕망도 없는 절규의 몸짓만이 남아있다. <애기>(2011)에서는 얼굴 단면과 손동작이 먹으로 간략히 묘사되어 있는데, 방금 태중(胎中)을 벗어나 세상 밖에 나온 불안함에 아기는 잔뜩 웅크린 표정이다. 이 작품을 보는 순간 핏덩이를 바라보는 감동과 불안함이 교차한다. 인간은 언제부터 불안함을 가지게 되는 걸까. 처음 엄마 품을 떠나는 아이는 세상에 혼자 떨어진 것 같은 고립감과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어머니를 뜻하는 단어인 mother를 ‘(m)other'로 표기하는 것은 최초의 타자(他者)가 바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2009년부터 군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무수한 사람들이 줄을 지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천형을 받으러 가는 듯 그들은 스스로 운명의 길을 걷고 있다. 갈비뼈와 흉골이 드러난 인물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있는데, 추하고 야윈 몸, 힘없이 서 있는 모습은 한결같이 고달픈 생을 대변하는 듯 고통스러운 표정들이다. 종교적 도상들도 등장한다. 미켈란젤로의 <원죄와 낙원추방>, 마사치오의 <아담과 이브의 낙원에서의 추방> 등에서 빌려온 모티프들이 한 화면에 병치되어 있다. 시간적으로 다른 사건의 나열은 죄와 벌이라는 인과관계 뿐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의 근원을 밝히는 듯하다. 십자가에서 내림, 피에타, 와불(臥佛) 등의 소재가 등장하는 것은 작가가 인간의 개성보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감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왜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일까?
하대준은 소재와 표현방법 그리고 설치를 통해 인간의 강한 생명력과 실존상황을 이원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는 언제나 주체인 동시에 객체였다. 자신만만한 일면을 가진 반면 자신 없는 일면을 가진,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고 있다. 그의 자아 투시는 제 2의 자아 혹은 잠재의식 속의 자아로 나타나며 그것은 그의 편인 동시에 적대적인 존재로 표현된다. 예술가의 자아 몰두는 그만의 예술적 언어를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상에 따라 표현방법을 달리하고 있다. 두려움의 대상인 닭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털 하나하나까지 세필로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는 반면 인간을 다룬 작품은 풍부한 농담의 변화를 보여준다. 목탄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종이를 대고 물과 아교로 흔적을 남기고, 여러 차례 먹 작업으로 표현된 미묘한 농담 변화는 먹색만으로도 인간의 풍부한 표정과 깊이감을 드러낸다. 동양의 수묵은 검은색이기 때문에 단색인 수묵만으로도 그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은 바로 사실적인 재현성과는 동양화가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화는 보편성을 지향하며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관념을 통해 그 이상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관념성을 지향하는 동양화의 세계와 하대준의 작품은 맞닿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우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우울은 예술과 직결되어 있다. 자아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자신이 느끼는 실존의 깊이를 시각적인 상징으로, 예술의 언어로 승화시킨 하대준의 작품세계와 그 진지함은 분명히 평가될 만하다. 더불어 두려움의 상징적인 두 요소를 결합시킨 최근 작품이 보다 보편적인 관념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도록 작가의 냉정한 인식과 개성적 발현을 좀더 지켜보고 싶다.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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