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 부산출생
2003-2008 스튜트가르트 국립조형대학 도예과
1998 다마미술대학 대학원 판화과
1995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판화과
개인전
2012 -Fired White“, 인사미술공간, 서울
2011 -Sum in a Point of Time II“, 갤러리 압생트, 서울
2010 -Summe im Augenblick“, 벨뷔잘, 뷔스바덴 , 독일
Perron1, 델던, 네덜란드
2009 -Ableitung zum Fragment“ , 스튜트가르트 국립조형대학, 독일
2006 -To live on“,대안공간 반디, 부산
2002 타케야 갤러리, 카마쿠라, 일본
1999 라크기엔 갤러리, 동경, 일본
Art Box 갤러리, 동경, 일본
1997 Gallery Y's , 동경, 일본
1996 카린 스페이스, 동경, 일본
그룹전
2013 아이치 트리엔날레, 나고야, 일본
Home Works 6, 베이루트, 레바논
Another Chain Bridge, 한국문화원, 부다페스트, 헝가리
2012 도시의 숨, 열린 미술관 대흥동 부르스 III, 대전
2011 Root of Imagination,갤러리 압생트,서울
Velada Santa Lucia2011,마라카이보, 베네주엘라
Taehwa-river eco Art Festival, 울산
2010 Antigrav, 파로타 컨템포러리 아트, 스튜트가르트, 독일
2009 20-years anniversary쿤스틀러 도르프 쇼핑겐, 쇼핑겐, 독일
2008 Leinzell open 2008, 라인첼, 독일
2007 Und ewig lockt die Malerei 3, 갤러리 라이너베어, 스튜트가르트, 독일
수상
2008 DAAD Award, 독일
1999 21세기 판화전 -대상-, 동경, 일본
1997 Art Box 판화전, -후카자와 유키오싱-, 동경, 일본
레지던스
2012 고양창작 스튜디오
아르코 신진작가 전시지원
2011 세마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2010 벨뷔잘 레지던스, 뷔스바덴 , 독일
스튜트가르트 국립조형대학 스튜디오 장학금 , 스튜트가르트, 독일
2008 쿤스틀러 도르프 쇼핑겐, 쇼핑겐, 독일
서진석 전시 서문
The Remains
죽은 새들은 흙물로 봉인되고 고온의 화염에 그 몸은 내부에서 산화된다. 흙물은 죽은 새들의 형상을 간직한 채 새하얀 유약의 도자기로 재탄생된다.
죽음과 탄생은 많은 미술가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데미안 허스트는 죽은 동물을 포름알데히드용액에 담금으로서 소멸되지 않는 무한의 보존을 가능케 하여 죽은 생명체에 새 삶을 강제로 부여하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해체되었지만 이 역시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삶의 시작점을 무한으로 연장시킬 뿐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들에게 죽음이란 유한의 종착지이다. 생은 유한이지만 죽음은 무한을 의미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가늠할 수 없는 무한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창밖의 무한은 언제나 미지의 영역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 혹은 철학과 과학을 통하여 그 무한의 영역을 가늠하려했다. 수리 논리학자인 게오르크 칸토어는 수학적 논리로 무한의 영역을 들어다 보려 했다. 그는 무한의 등급과 무한을 세는 방법까지 발견했다. 불교와 힌두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무한영역을 카르마(윤회)를 통해 유한의 삶과 다시 연결 짓고 생과 사를 이원론적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로 바라보았다.
작가 서민정은 죽은 새들을 모아 도자물로 감싸고 화로에 넣어 고온의 열을 통해 기화시켜버린다. 새의 몸은 흙이 고온을 통해 새 하얀 도자기로 재 생성되는 과정에서 주형화되어 그 흔적을 남긴다. 과연 이 새는 진짜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하얀색 도자기로 변이된 것일까? 화덕 안에서는 사라짐과 생성 이 두 가지가 현상이 동시에 일어난다. 사라짐이 먼저도 아니고 생성이 다음도 아닌 이 두 물리적 현상이 순간의 동시에 일어난다. 유한의 영역에서는 모든 물리적 현상은 단계와 과정이라는 시간의 공간을 넘어설 수 없다. 유한에는 항상 시간의 출발점과 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한에서는 출발점과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민정은 작업에서 생과 사,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 시간의 동시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생성과 소멸의 시작점과 끝점을 일치시키고 유한과 무한의 구분을 해체시켜 일반적인 무한의 관념을 바꾸어버린다. 즉 그녀에게 끝없는 죽음은 두려운 존재가 아닌 또 다른 생성의 삶을 의미한다. 죽은 새는 새하얗고 빛이 나는 흙으로 변환되어 새로운 존재가 된다. 하얀 도자기에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 도자기는 아름답고 순결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녀의 작업에서 생명의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은 구분은 사라지고 하나의 아름다운 존재로 환원되고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하얀색의 죽음으로 부활되어진다.
순간의 총체 (SUM IN A POINT OF TIME)
하얀색의 집은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흩어진다. 파편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지해있다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서로 얽혀 언제든 다시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갈 듯하다.
서민정은 사회적 의미와 상징성을 가진 모든 대상들을 전시장 안으로 가지고와 무색의 재료로 재현한다. 실제의 사물들이 축소되어 사실적인 모형으로 재탄생된다. 하지만 그 사물은 곧 파괴되고 파편화 되어 공간에 흩뿌려진다. 그녀의 작업에서 보이는 이러한 창조, 유지, 파괴의 행위들은 아름다운 하나의 순환 과정이다. 파괴를 하기 위해 창조를 하고 파괴를 했기 때문에 창조를 한다. 창조는 선이고 파괴는 악이 아니다. 긍정과 부정의 이항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창조와 파괴는 유기적인 순환이고 합일논적 의미이다. 힌두교에서 창조의 신 브라만,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는 삼위일체(Trimuriti)인 하나의 존재이다. 즉 창조, 유지, 파괴는 순환의 의미를 넘어 상보적인 것이다.
사물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 형상은 그 사물의 상징적 정체성을 규정한다. 사물을 해체시켜 형상을 지우고 나면 그 사물들은 물질로만 존재한다. 여기서 형상을 벗어난 물질은 또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순간의 총체>작업 시리즈에서 사물들을 복제하고 재현하는데 있어서 하얀색의 폼을 사용한다. 시리즈 작업에서와 같이 색이 없는 무색의 재료를 사용한다. 하얀색은 순수한 백지를 의미하며 무념무상의 여백을 제공한다. 이 공간은 해체라는 폭력적 행위에 미를 침투시킬 수 있는 여분이 되고 파괴에 대해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그녀에겐 창조와 해체는 하나이다. 파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창조이다. 창조도 아름답지만 파괴도 아름답다. <순간의 총체>작업에서 폭발되어 분열된 사물의 파편들은 중심에서 일정한 거리의 한계를 유지하고 그 이상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파편들 간극의 중용은 그녀의 작업을 바라볼 때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의 작업이 폭발이 아닌 수축일 수도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폭발은 파괴이지만 수축은 또 다른 창조를 의미한다. 다양한 파편들이 퍼져있는 순간의 설치전경에는 생성과 소멸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며 그 구분이 모호해진다. 양자역학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은 시공간을 넘어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서로 얽혀있는 동시성의 합일 수도 있다. 창조, 유지 파괴는 순간의 총합으로 하나인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잡아함경
서민정에게 생성과 소멸, 창조와 파괴, 삶과 죽음은 하나이다. 합일논적 시점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주역에서 말하는 대대성(對待性)의 세계관이다. 선과 악, 밝고 어두움, 환희와 두려움의 구분은 사라진다. 서민정은 인간과 세상의 모든 것들의 의미를 그녀만의 방법으로 바라보고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관념적 정체성들을 해체시킨다. 유한의 영역을 무한의 영역과 연결시켜 생성과 소멸의 본질을 이해하려하고 있다.
AAAAAAAAAAAAAAAAAAAAAAAAAAA
죽은 새들은 흙물로 봉인되고 고온의 화염에 그 몸은 내부에서 산화된다. 흙물은 죽은 새들의 형상을 간직한 채 새하얀 유약의 도자기로 재탄생된다.
죽음과 탄생은 많은 미술가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데미안 허스트는 죽은 동물을 포름알데히드용액에 담금으로서 소멸되지 않는 무한의 보존을 가능케 하여 죽은 생명체에 새 삶을 강제로 부여하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해체되었지만 이 역시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삶의 시작점을 무한으로 연장시킬 뿐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들에게 죽음이란 유한의 종착지이다. 생은 유한이지만 죽음은 무한을 의미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가늠할 수 없는 무한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창밖의 무한은 언제나 미지의 영역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 혹은 철학과 과학을 통하여 그 무한의 영역을 가늠하려했다. 수리 논리학자인 게오르크 칸토어는 수학적 논리로 무한의 영역을 들어다 보려 했다. 그는아있는 생명체들에게 죽음이란 유한의 종착지이다. 생은 유한이지만 죽음은 무한을 의미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가늠할 수 없는 무한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창밖의 무한은 언제나 미지의 영역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 혹은 철학과 과학을 통하여 그 무한의 영역을 가늠하려했다. 수리 논리학자인 게오르크 칸토어는 수학적 논리로 무한의 영역을 들어다 보려 했다. 그는 무한의 등급과 무한을 세는 방법까지 발견했다. 불교와 힌두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무한영역을 카르마(윤회)를 통해 유한의 삶과 다시 연결 짓고 생과 사를 이원론적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로 바라보았다.
작가 서민정은 죽은 새들을 모아 도자물로 감싸고 화로에 넣어 고온의 열을 통해 기화시켜버린다. 새의 몸은 흙이 고온을 통해 새 하얀 도자기로 재 생성되는 과정에서 주형화되어 그 흔적을 남긴다. 과연 이 새는 진짜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하얀색 도자기로 변이된 것일까? 화덕 안에서는 사라짐과 생성 이 두 가지가 현상이 동시에 일어난다. 사라짐이 먼저도 아니고 생성이 다음도 아닌 이 두 물리적 현상이 순간의 동시에 일어난다. 유한의 영역에서는 모든 물리적 현상은 단계와 과정이라는 시간의 공간을 넘어설 수 없다. 유한에는 항상 시간의 출발점과 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한에서는 출발점과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민정은 작업에서 생과 사,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 시간의 동시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생성과 소멸의 시작점과 끝점을 일치시키고 유한과 무한의 구분을 해체시켜 일반적인 무한의 관념을 바꾸어버린다. 즉 그녀에게 끝없는 죽음은 두려운 존재가 아닌 또 다른 생성의 삶을 의미한다. 죽은 새는 새하얗고 빛이 나는 흙으로 변환되어 새로운 존재가 된다. 하얀 도자기에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 도자기는 아름답고 순결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녀의 작업에서 생명의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은 구분은 사라지고 하나의 아름다운 존재로 환원되고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하얀색의 죽음으로 부활되어진다.
순간의 총체 (SUM IN A POINT OF TIME)
하얀색의 집은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흩어진다. 파편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지해있다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서로 얽혀 언제든 다시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갈 듯하다.
서민정은 사회적 의미와 상징성을 가진 모든 대상들을 전시장 안으로 가지고와 무색의 재료로 재현한다. 실제의 사물들이 축소되어 사실적인 모형으로 재탄생된다. 하지만 그 사물은 곧 파괴되고 파편화 되어 공간에 흩뿌려진다. 그녀의 작업에서 보이는 이러한 창조, 유지, 파괴의 행위들은 아름다운 하나의 순환 과정이다. 파괴를 하기 위해 창조를 하고 파괴를 했기 때문에 창조를 한다. 창조는 선이고 파괴는 악이 아니다. 긍정과 부정의 이항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창조와 파괴는 유기적인 순환이고 합일논적 의미이다. 힌두교에서 창조의 신 브라만,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는 삼위일체(Trimuriti)인 하나의 존재이다. 즉 창조, 유지, 파괴는 순환의 의미를 넘어 상보적인 것이다.
사물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 형상은 그 사물의 상징적 정체성을 규정한다. 사물을 해체시켜 형상을 지우고 나면 그 사물들은 물질로만 존재한다. 여기서 형상을 벗어난 물질은 또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순간의 총체>작업 시리즈에서 사물들을 복제하고 재현하는데 있어서 하얀색의 폼을 사용한다. 시리즈 작업에서와 같이 색이 없는 무색의 재료를 사용한다. 하얀색은 순수한 백지를 의미하며 무념무상의 여백을 제공한다. 이 공간은 해체라는 폭력적 행위에 미를 침투시킬 수 있는 여분이 되고 파괴에 대해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그녀에겐 창조와 해체는 하나이다. 파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창조이다. 창조도 아름답지만 파괴도 아름답다. <순간의 총체>작업에서 폭발되어 분열된 사물의 파편들은 중심에서 일정한 거리의 한계를 유지하고 그 이상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파편들 간극의 중용은 그녀의 작업을 바라볼 때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의 작업이 폭발이 아닌 수축일 수도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폭발은 파괴이지만 수축은 또 다른 창조를 의미한다. 다양한 파편들이 퍼져있는 순간의 설치전경에는 생성과 소멸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며 그 구분이 모호해진다. 양자역학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은 시공간을 넘어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서로 얽혀있는 동시성의 합일 수도 있다. 창조, 유지 파괴는 순간의 총합으로 하나인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잡아함경
서민정에게 생성과 소멸, 창조와 파괴, 삶과 죽음은 하나이다. 합일논적 시점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주역에서 말하는 대대성(對待性)의 세계관이다. 선과 악, 밝고 어두움, 환희와 두려움의 구분은 사라진다. 서민정은 인간과 세상의 모든 것들의 의미를 그녀만의 방법으로 바라보고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관념적 정체성들을 해체시킨다. 유한의 영역을 무한의 영역과 연결시켜 생성과 소멸의 본질을 이해하려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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