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200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대학원 수료
1999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2013 “낯설게 상상하기” / 미디어극장 아이공 한국 서울
2012 'MASTER PIECE ' 걸작전 / 선컨템포러리 서울 한국
2011 “ SKIN ” / 노암 갤러리 서울 한국
2007 “당신 곁을 맴돕니다” / 라메르 서울 한국
1999 게이의 방 / 아트 팩토리 이천 한국
기획전
2013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현대미술특별전 (Light Box 베니스 )
2013 패션과 만난 예술 ( 63빌딩 스카이 아트 미술관 서울 한국 )
2013 G-Seoul 13 International Art Fair(그랜드 힐튼 서울 한국)
2013 제1회 ART MACAO Embrace Asia (Cotai strip Expo,HallA, 마카오)
2013 아트 베이징 Being Asia (Agricultural Exhibition Center 베이징 중국 )
2013 Contemporary Art from Korea (art lab aichi 나고야 일본)
2012 Neo Edition (contemporary Art Ruhr Essen 독일 )
2012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 (송원아트센터,서울 한국)
2012 Historical Parade : Images from elsewhere (카소 아트센터 오사카 일본)
2012 아트 광주12 (김대중 컨번션 센터)
2012 Historical Parade Images from elsewhere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관.서울 한국)
2012 Berlin Art 베릴린아트 Neo Edition (자작나무 갤러리 서울)
2012 사실주의 !? 모엔가르드 (난지 미술창작 갤러리 서울 한국)
2011 6th intro 난지오픈 스튜디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 한국)
2011 Passing Away 김두진 .김온 2인전 ( 서교실험센터,한국,서울)
2011 변화,변화, 변화 파주로가는 우회로( 메이크샵 아트스페이스,파주, 한국)
2011 한국뉴미디어아트의 십년-새로운 상상,새로운 쓰임(미디어극장 아이공,서울, 한국)
2011 ‘가족’ 5월의 작가 (해피윈도우 갤러리 ,아트센터나비)
2011 파주아트플랫폼 오픈스튜디오 (아트플랫폼)
2010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발‘한국의 대안영상 10선’(상상마당,미디어극장 아이공,,서울)
2010 Artist Charity Auction_Donor's Party (CSP111 아트스페이스, 서울 )
2010 전주국제영화제 <숨쉬는 환영- imagin in time> ( 전주영화제작소 기획전시실,전주)
2010 아르코 미술관 아카이브 ‘포토폴리오 서가 프로젝트’ (아르코미술관,서울)
2010 미디어 시즌 ( 아트팩토리. 헤이리, 파주 )
2010 순수거리-뛰어넘고흐리면서융합하기,파주 아트플랫 폼입주작가 기획전(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파주 )
2010 'Face to Face' (더 케이 갤러리,서울 )
2010 The more ,the better- 330 스타 작가전 개관 33주년 기념전 (선 갤러리,서울 )
2009 한국현대미술 중남미순회 귀국전 /회화,영상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09 미디어 -아카이브 프로젝트 (아르코 미술관, 서울 )
2009 아시아 실크로드 특별전< 한국의 대안영상 >( 미디어극장 아이공 ,홍콩비디오타지. Videotage 홍콩)
2008 IAS media Screening 2008 / 영상 ( 필름포름, 서울 )
2008 ‘박하사탕’한국현대미술전/회화,영상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미술관 ,아르헨티나)
2008 now! jump ! 백남준 아트센터 개관 기념전 / 회화, 영상 (백남준 아트센터, 용인 )
2008 마시멜로우 이야기 / 회화, 영상 (수원아트센터 , 수원)
2008 크로스 컬쳐 / 회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2008 서울 뉴미디어 페스티발 : 네마 작가 구애전/ 영상 (미디어극장 아이공 , 갤러리킹,서울 )
2008 애니메이션: 모션/ 이모션/ 영상 ( 바롬 갤러리, 서울)
2008 '컬러풀 컨버전스’ Colorful Convergence/ 영상 (경북대 미술관, 대구)
2007 ‘박하사탕’ 한국현대미술전/ 회화, 비디오 설치 (산티아노 현대미술관, 칠레)
2007 ‘Bubble Wrap’ 문예진흥원 기획 공모전 (예화랑, 서울)
2006 천사 전 / 사진 (갤러리 정, 서울)
2006 동행 - 소수자를 위한 축제 / 회화 (예술의전당, 의정부)
2005 코스모 코스메틱 / 비디오설치 (스페이스 C, 서울)
2005 ‘내일이 와도 당신은 날 사랑할 수 있나요?’ / 비디오설치 (여성사전시관, 서울)
2004 한국현대미술 1960 - 2004 ‘당신은 나의 태양‘ (토탈 미술관, 서울)
2004 Ongoing 프로젝트_Open Circuit / 회화 (상명미디어아트스페이스, 서울)
2004 충돌과 흐름, 미디어 아트 전시 / 싱글채널 비디오 (서대문 형무소, 서울)
2003 한국 현대 미술전 / 회화 (카사카타 갤러리, 벤쿠버, 캐나다)
2003 트루먼이 묵었던 2층 객실 (인사아트센터, 서울)
2003 전주 국제 영화제 JIFF MIND 2003 / 비디오 (전주영화제 기획전시실 ,전주)
2002 싱글 채널, 그 이후 / 비디오 (일주아트하우스, 서울)
2001 한국 신세대 작가 초대전 ‘불광불급’ / 회화 (경원대학교 미술전시실, 서울)
2001 한국현대미술 신세대 흐름전 / 회화 (아르코 미술관, 서울)
2001 ⓔ-미디어 아트 페스티발 / 비디오 (이화여대 야외전시장, 서울)
2001 <( )보다> / 사진 (국립서울맹아학교, 서울)
2000 대전 국제 미디어 아트전 / 비디오 설치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2000 공동묘지프로젝트 / 회화 (분당 공원묘지 효성원, 분당)
2000 불임 전 / 비디오 설치 (아르코 미술관, 서울)
2000 서양미술사 전 / 회화 (공평아트센터, 서울)
2000 미디어 아트 21 ‘virtually yours’ / 비디오 설치 (세종문화회관 갤러리, 서울)
1999 ‘게이의 방’ 공장 미술제 / 회화, 사진, 혼합매체, 비디오 (이천 갤러리, 이천)
1999 사이버 여성 문화제 / 혼합매체 (사이버 갤러리)
1997-99 로고스와 파토스 전 / 회화 (관훈 갤러리, 서울) 그 외 다수
수상 및 선정
2012 서울문화재단 시각예술분야 전시지원 작가선정
2011 난지창작스튜디오6기 작가선정
2011 고양 영상창작스튜디오 작가선정
2011 SEMA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지원 작가선정
2010 파주아트플랫폼 레시던스 입주 작가선정
2010 제3회 홍대앞 문화예술상 ‘국제뉴미디어 페스티발상’ 수상
2010 아르코 아카이브 ‘포토폴리오 서가 프로젝트’ 작가선정
2009~10 아르코미술관 미디어아카이브 작가선정
2008 한국영상자료원, 아르코미술관, 아이공 미디어배급 선정작가외 다수
참고 문헌
2012 Images from elsewhere 국제교류전 전시도록 pp24~31,서울시립미술관
2012 월간미술세계 11월호 ,zoom in artist /해골위에 핀푸른꽃 pp100~105,미술세계
2012 월간아트메거진 8월호,작가인터뷰/환상을심어주는자에대한형벌,pp66~67,취재부
2011 포토플러스12월호 beyond art/해골이 들려주는 인간의 본질,pp72~77
2011 김두진3회 개인전도록,김원방/김두진,그리고 죽음의성,pp1~50,서울시립미술관
2011 SeMa young artist ,,김종길/현의 세계에 핀 푸른꽃,pp10~17서울시립미술관
2010 순수거리,아트플랫폼도록, 김우임/ ‘깨지기쉬은 질서의 재배치’ pp26~33
2006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인 코리아 - 김두진 작가편 ’, 임근준, pp 96~113, 임프린트 갤리온 출판사,
2004 HAUTE 이정우, pp132~136, 3월호, ‘대중문화를 타고 넘는 분홍빛 상상력’
2001 월간미술 심상용, 5월호, ‘narrative painting’
2000 야후 창간호, 11월호, 아티스트 김두진
2000 아트 인 컬쳐 손희경, 10월호, ‘young artist 김두진 / 남자신데렐라가 사는 법'
2000 월간미술 김미진, 9월호, ‘sensibility of MTVkids -김두진’그 외 다수
작품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김두진 그리고 죽음의 性
김 원 방 (홍익대 교수)
1. 들어가는 말: 동성애-작품 동형론(HOMO-morphism)?
커밍아웃, 게이, Homosexual, 이반, 남자끼리의 섹스, Queer 그리고 AIDS라는 지구파멸의 공포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정상인이라고 굳게 믿는 '우리'에겐 ─ 이 허구적인 '우리'의 개념으로부터 소위 '그네들'이라는 타자의 담론(discourse of the Other)이 또 하나의 허구로서 구성된다 ─ 듣기만 해도 소름 돋을 이 표현들은 작가 김두진을 이야기할 때마다 곧바로 나열되고 심지어 작품해석의 지위까지 얼렁뚱땅 차지해 버리는 수사학적 키워드들이다(예를 들어 ""김두진의 작품 = 게이적인 작품""이라는 식으로 작품과 작가를 일치시키기). 사실 그런 자극적 키워드들은 포스트페미니즘(postfeminism),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 마이너리티, 중심과 주변의 담론, 자끄 라깡의 '성역할 이론' 등, 80년대 새로운 인문학 담론의 지원을 받으면서 오늘날 성적잉여자들 의 작품을 치장하는 수사학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예술계에서는 그러한 스캔들조차 얼마든지 성스러운 아우라로 받아들여진다(할 포스터Hal Foster가 강조하듯이 후기자본주의시대의 문화산업은 예술이 아니라 '예술의 아우라'를 사고 판다. 심지어 양자는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서두부터 김두진의 신상정보와 성적취향에 대해 언급하는 나의 의도는, 바로 그러한 '작가에 대한 담론'이 김두진의 '작품에 대한 담론'과 혼동되는 것을 우선적으로 피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일반 대중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미술전문인들조차도 자주 이 '인간-작품동형론' 에 의지하여 작품을 작가의 傳記(biography)와 일치시켜 설명하곤 한다. 그리고 김두진의 경우라면 ""그는 게이니까 유달리 그의 작품에는 동성애자의 생각이나 삶, 취향이 많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간단히 한정하는 방식일 것이다. 일종의 '동성애-작품 동형론'이라고나 할까? 물론 김두진의 작업이 그러한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전적으로 맞고 또 앞으로 이 글에서 길게 논증하려는 바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작품이라고 불리는 시각적 기표 덩어리에서 나오는 것이지, 김두진이란 인간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미셸 푸코와 롤랑 바르트의 문학비평 이후, '사람으로서의 저자'가 아닌 '텍스트로서의 저자'(author as text, 말하자면 기표의 연쇄에 불과한 구조주의적 저자)라는 표현이 익숙해진지 오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미술비평이나 전시리뷰들(학생들 리포트는 말할 것도 없고)이 작가 자신의 말이나 생애의 에피소드부터 조사하고 그것을 작품비평과 해석의 객관적 준거인 양 얼버무린다.
아직 젊은 작가로서 풍부한 비평문헌이 축적되었을 단계는 아니지만, 김두진 작업에 대한 기존의 논평들이나 비공식적 담론에서는 스캔들적인 작가 개인의 성애적 특징에 대한 담론이 작품 자체에 대한 담론을 상당 부분 대신하거나 그의 작업을 규정하는 편의주의적 수사학 정도로 활용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비평으로부터 멀어짐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든 물신화, 신비화, 몽매화로 이어지게 마련이고 이것은 결국 '작품의 소외'를 의미한다.
2. 재현을 차용하고 공격하기: 죽음과 비천함을 통해서
이 글은 2011년 10월 노암갤러리에서 SEMA 신진작가 지원으로 열린 그의 개인전을 주 대상으로 쓰는 글이지만, 나는 여기서 그가 지난 약 14년간 해 온 작업들을 우선 훑어 보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번에 새로 시도한 3D 디지털 작업의 맥락을 살펴 볼 것이다.
김두진은 주로 회화를 위주로 작업하면서 영상과 설치작업 등 다양한 매체실험을 함께 해 왔다. 따라서 그의 작업의 방법론과 특징을 한 두마디로 압축하기는 어렵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를 꼽자면, 미술사와 같은 고급문화에서부터 영화, 애니메이션 등 대중문화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상투화된 재현이미지들을 차용하고 그 배경에서 작동하는 성정치학적인 이데올로기를 노출하고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은 미술사적 계보를 따져볼 때 과거 80년대 서구 포스트모던 미술의 여러 조류들 중, 특히 서구문화 속에 나타난 '남근이성중심주의' 와 여성 이미지의 재현 메카니즘을 탐구한 소위 '재현비평'(critique of representation) 또는 '차용주의'(appropriationism)라 불리는 성향 과 일정 부분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김두진의 경우는 그가 주로 차용하는 이미지들은 대중문화 캐릭터, 영화 주인공, 그리고 상업 포르노에 이르기까지 성차(性差, gender)의 상투적 재현을 수반하는 이미지에 집중된다. 그 몇가지 예를 들면:
1) 마사치오의 작품 <낙원추방>(1427)에서 빌어온 아담과 이브(이들의 성기는 트랜스젠더처럼 혼란된 상태로 그려져 있다)
2) 미키마우스, 백설공주(그들은 얼굴이 삭제되거나 외눈박이 괴물같은 생김새로 변형된다)
3)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 그리고 그녀의 조력자들로서 유약하고 남근이 결여된, 즉 성차 확립에 실패한 남성 조연자들(사자, 양철로보트, 허수아비 등)
4) 포르노 장면들. 근육질 남성들의 몸(이들은 아주 마초적으로, 또는 반대로 호모섹스의 분위기로 그려진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성애(性愛,sexuality)와 성차에 대한 지배이데올로기가 투영되는 장이고, 김두진의 작업방법론의 핵심은 그것들을 빌어와서 그러한 이데올로기 구축을 실패한 양상으로 변형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로서 성차는 하나의 상상적이고 문화적인 축조물로서 나타나든가 또는 아직 미분화(未分化) 된 혼돈스런 양상으로 나타난다.
3. 해골: 의미를 살해하기 또는 '데팡스'
김두진이 그러한 성차의 재현을 공격하기 위해 특히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첫번째로 해골과 같이 죽음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두번째로는 성적 분화(성차 확립)에 실패한 몸, 달리 말해 '비천한(abject) 몸'의 이미지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해골과 비천한 몸의 이미지들은 특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김두진의 작업에서 신경증적 환상처럼 여기 저기 반복적으로 출현하면서 이를 통해 그의 작업 전체에서 '죽음충동'을 표출시키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우선 해골 이미지에 대해서 살펴 보자. 작품 <무제>(2003), <도로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2005), <눈먼 두 미키마우스는 낯선 행성에 도착하기 위해 VISA가 필요하다>(1998) 등에서 보면, 미키마우스, 백설공주,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 등 전형적인 이성애(異性愛, heterosexuality)를 상징하는 재현들 속에 해골의 형상이 끼어드는데, 여기서 해골은 그러한 재현적 코드의 작동을 교란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동적 천진난만함의 외양으로 포장된 재현의 질서 속에 죽음의 이미지를 삽입하는 행위는, 텍스트의 매끄러운 연결 속에 해석불가능한 빈 공백을 삽입하거나 나아가 그 텍스트 위에 오물을 투척하는 행위와 같다. 또 얼굴 부분이 지워져 성차가 사라져 버린 미키마우스나 미니마우스, 외눈박이 괴물로 변형된 백설공주(작품 ) 등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의미를 살해하기' 같은 난폭한 것이면서, 그와 동시에 일종의 폭력적 조롱과 웃음의 효과까지 수반한다. 그렇지 않아도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죽음, 폭력, 섹스, 희생 그리고 웃음을 같은 것으로 보지 않았는가. 이것들 모두의 본질이 그가 '소모'(Depense, Expenditure)라고 표현한 것, 즉 '인위적으로 감금된 존재의 힘은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재난처럼 격렬하게 분출한다'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4. 비천한 몸과 거세불안환상
해골에 이어, 김두진이 성차의 재현을 공격하기 위해 자주 활용하는 두번째 이미지, 즉 독립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몸, '비천한 몸'의 이미지에 대해 논해보자. 예를 들면, 더러운 벌레들, 역겨운 체액과 내장, 너저분한 혈관과 피 그리고 뼈다귀와 해골들로 채워진 화면, 한스 벨머(Hans Bellmer)의 작품에서처럼 기괴하게 재조립된 인형, 난잡한 성행위들... 그림 <당신 곁을 맴돕니다>(1999)에서 보면 그러한 비천한 몸의 소우주가 마치 파노라마적 정경처럼 펼쳐진다. 이들은 모두 사회화, 분리, 성별화(sexuation)가 되지 않은 몸의 이미지, 즉 자끄 라깡(Jacques Lacan)의 표현을 빌면 '상징계로의 진입에 실패한 몸'의 이미지들이다.
김두진의 경우는 바로 그 실패한 몸의 이미지가 일종의 外傷적인(traumatic) 환상으로 반복해 나타난다. 그것은 주체가 언제라도 다시 비천함 몸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 공포, 즉 거세불안를 강력히 환기시킨다. 그것은 '억압된 것의 필연적 귀환'(return of the repressed)이고 남근적 이성이라는 신화가 지닌 취약한 정신병리적 측면을 효과적으로 공략한다는 이유에서, 멀리는 한스 벨머 같은 초현실주의자가 그리고 가까이는 신디 셔먼 같은 작가가 포스트페미니즘적 전략으로 활용한 바 있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와 할 포스터(Hal Foster)는 한스 벨머의 괴기스런 몸들, 소위 거미나 메두사(Medusa) 같은 형태가 '남성으로 상정된 주체'에 대한 효과적 공격임을 강조했다. 크라우스는 할 포스터와 동조하며 논하기를, 메두사의 이미지나 한스 벨머식의 변형된 인형은 '파시스트적 주체'에 대한 강력한 위협이되, 정확히 말해 그것은 공격이라기보다는 '타자들의 침입'(invasion of others)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타자는 비록 약자이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언제든지 위협적으로 의식 속에 침입해 들어온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크라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한 '침입의 공포'는 파시스트적 또는 나치적 주체(Nazi subject)가 지닌 병리학적 측면인데, 그 공포감은 이제 '신체적 혼돈이라는 환상의 투사(projection)'로 나타나게 되고, 파시스트적 주체는 그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무장을 한다. 그는 금속처럼 단단히 무장된 몸을 찾게 되고 이것의 미학적 사례가 바로 단단한 형태로 통속화된 신고전주의 예술(Neoclassicism)인 것이다."" 벨머의 괴기스런 몸은 바로 그 파시스트적 자아를 분쇄시키는 환상이고, 이러한 환상은 '여성적 타자'(feminie other) ─ 타자는 性은 항상 '여성'이다 ─ 에 대한 폭력 속에서 그 공포를 극복하려 시도하는 파시스트적 주체를 전략적으로 끌어들이고 연루시킴으로써 그를 교란시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환기할 점은, 모든 주체가 이미 항상 성적 주체라는 점이다. 아이의 탄생 이후 어머니로부터 분화되고 사회적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단지 독립적 개체가 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주체가 성역할을 내재화 함으로써 성차화, 성별화 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 말은 우리의 실존은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존재들이 본질적으로 성적인 존재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사심없이 세계를 관조한다는 데카르트적 세계관과 자아관은 주체와 세계에 내재한 성적 특징을 철저히 삭제하고, 이로부터 남성으로 상정된 자아를 '보편적 자아'로서 상상적으로 구축해 낸 남근이성중심주의의 발명품에 불과하다. 라깡의 설명을 빌면, 아이가 어머니와 아버지로 구성된 3자 관계에 있어 아버지라는 외부 존재와의 마주침을 통해 어머니로부터 분리되고 이로부터 상징계 즉 타자들로 구성된 언어적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과정에는, 아이가 자신의 '성차적 위치'를 선택하는 과정이 그 핵심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말하는 '정상적이고 성차화 된 주체'란 것은 상징계라고 하는 아버지의 법이 이미 정신적 기제 속에 깊이 맵핑되어 있는 주체를 말한다. 반면 김두진이 보여준 비천한 몸들은 미분화 된 태고의 몸, 성적 역할이 결정되기 이전의 몸, 상징계 진입이 실패한 몸으로의 급격한 퇴행이라는 무의식적 불안을 되살리는 것이다.
5. 해골작업: 성차의 재현을 해체한다. 그러나 성차의 해체는 재현 될 수 없다.
이번에 김두진이 노암갤러리에서 전시한 신작들은 3D 프로그램을 사용한 디지털 작업인데, 일단 그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고전주의 풍의 명화들을 모방하여 패러디하되 등장인물들을 모두 해골들로 대체해 놓은 작업이다. 이제부터 부르기 쉽게 '해골 작업'이라고 칭하도록 하자. 해골 작업은 그 시각적 외양만 볼 경우 이전의 작업과 상당한 차이가 있어 보이나, 앞서 기술한 그의 기존 작업의 방법론을 생각해 보면 용이하게 그 연장선 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작업이다. 이번에 전시된 해골작업은 몇 점만 빼고는 모두 19세기 프랑스의 신고전주의풍 화가인 아돌프 윌리엄 부게로(Adolphe William Bouguereau, 1825~1905)의 작품들을 정밀하게 패러디 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모든 해골들의 세부를 3D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재구성 하였는데 그야말로 엄청난 노동과 정밀도를 요하는 작업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해골들은 푸르스름한 조명 속에서 저승과 악령의 세계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고, 얼음을 깎아놓은 것 같은 해골의 질감은 손이라도 닿을라치면 금새 살갗이 붙어버릴 것처럼 극사실적이고 촉각적이다. 여러 개의 작품들을 연이어 함께 바라보면 마치 일종의 죽음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관객은 비록 부게로라는 화가의 원작에 대해서 잘 모를지라도, 이 해골작업이 기존의 어떤 명화를 흉내낸 것이라는 사실을 용이하게 알아챌 수 있다. 여기서 이 '알아챈다'는 순간, 이 발견술적 순간이란 것은 달리 표현하면, 관람주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학습된 지식과 기억'으로 인해 '미끼'에 걸려드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미끼를 던지는 것이 사실 상 모든 차용주의적 작업의 개시 지점이다. 본래 부게로의 신고전주의풍 원작들은 '비너스의 탄생', '큐피드', '사튀로스와 요정들', '바쿠스' 등 신고전주의 회화의 상투적인 소재들로서 김두진의 해골들은 그러한 기존 회화의 장면들을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시뮬레이션 한다. 여기서 미끼의 의미는, 관객으로 하여금 미끼가 된 이미지 즉 시뮬레이션 된 원본을 '비판'하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동조하고 '공모'(共謀, complot)하도록 유도한다는 의미이다. ""본래는 어떤 명화의 한 장면임이 틀림없어!"" 또는 ""해골들이 '비너스 탄생'을 흉내내는구먼!""이라는 식의 '지적인 알아 챔'의 순간 관객은 곧 바로 공모한다. 바로 이러한 공모 속에서 관객은 해골이라는 이질적 요소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기존의 코드의 포착과 수용을 전제로 한 이중의 읽기, 즉 독서주체의 '분열'이 진행 됨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차용주의의 미끼가 전형적으로 해체주의적 전략인 이유이다. 이러한 해체주의적 분열은 달리 말해, 어떤 이미지의 의미화(signification) 및 그것의 독해과정이 일종의 아포리아적 함정에 빠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김두진의 경우는 정확히 무엇이 함정에 빠지는가?
매우 원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함정에 빠졌다는 원본 자체가 사실은 존재가 모호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함정에 빠졌다는 원본, 즉 그 '읽기의 원전(original text)' 자체가 해체론적 관점에서 보면 '항상 이미' 의미론적으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굳게 믿는 '원전'이라는 존재 자체가 실은 상상계의 허구적 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끄 데리다도, 기원은 텅 비어있으며 기원에는 오직 지연(delay)만이 있다고 거듭 말하지 않는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끼와 함정은 항상 잠정적, 타협적, 절충적인 요행수를 바라는 전략이고 이러한 '우연히 걸려들기를 노리기'는 모든 차용주의적 미학이 이미 알고 감수하는 전략적 허점이며, 그 허점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 전략의 최종 본질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김두진의 해골작업에서 '요행스럽게도' 잘 걸려드는 커다란 미끼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성애적 성차의 재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면이다. 그것이 바로 함정에 빠진다는 말이다. 특히 비너스 탄생, 바커스 축제 등 고대 신화의 에피소드를 상투적 정형으로 재현하는 신고전주의 미술은 등장인물의 역할과 젠더가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김두진은 부게로의 작품을 택한 것이다.
살이 모두 제거된 해골에는 성차적 특징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그들은 성차의 공백 위에서 남녀의 성적 역할을 흉내 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애를 비판한다'는 격한 저항의식에 추진된 나머지 그 어떤 해방의 정치적 프로퍼갠더나 계몽적 메시지를 심어놓은 것도 아니다. 그 해골들은 단지 원작이 포함한 이데올로기적 코드체제를 교란하려는 책략일 뿐, 그 어떤 새로운 주제의식도 고취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게이레스비어니즘이건 페미니즘이건 간에, 그 어떤 '새로운 의미', '새로운 재현'도 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해골작업에는 어떤 주제(theme)도 없다. '재현하고', '이데올로기적 목소리'를 내려는 욕망, 작품을 '또 다른 의미의 노예'로 만들려는 지적인 욕망, 바로 그 '상징의 권력을 향한 남근적 욕망'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그 해골들의 과제인 것이다. 성차의 삭제를 다시 재현하기, 그것을 선포하기, 부재를 시각적 형태로 표현하기, 바로 이러한 것들이 다름 아닌 '재현의 해체가 다시 빠지기 쉬운 재현주의적 함정'이며,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이미 80년대 재현비판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포스트페미니스트들이 전력으로 씨름했던 과제 아니었던가.
서론에서 말했지만, 김두진의 작업을 방법론에 대한 명확한 통찰없이 그저 편리하게 커밍아웃, 게이, 이성애 비판 같은 수사적 표현들을 대충 부여하는 담론들은, 마치 그의 작업이 그런 수사적 내용들을 주제로서 '재현한다'는 인식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이는 재현 자체에 저항함으로써 남근이성중심주의에 저항하려는 그의 작업의 지향점을 본질적으로 호도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핵심적인 점은 ""성차의 해체는 재현 될 수 없다""라는 점이다. '脫이성애적 미술'이란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이 첫번째 특징이어야 한다.
6. 反오이디푸스 혹은 '남성 되기'에 대한 저항
패러디나 시뮬레이션을 통한 해체는 '변증법적 부정'(dialectic negation) 또는 '오이디푸스적 저항'(Oedipal resistance)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변증법과는 달리 새로운 진리를 향한 '지양'(止揚, Aufheben)의 전망을 갖지 않는다. 대신 해체는 비판하고 저항하려는 대상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동시적으로 결합시키는 모순된 사유의 형식이다. 따라서 패러디와 시뮬레이션이라는 전략은 원본에 대한 기억을 선명히 유지하며 그것이 갖는 의미와 아우라를 잠시나마 전적으로 수용하는 위험, 즉 공모를 감수할 때에만 비로소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은 따라서 부정이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분열, 또는 바타이유와 푸코의 표현을 빌어 '위반'(transgression)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들은 위반이 혁명과 달리, 그 효과가 항상 불충분할 뿐이고 체제 내에 다시 갇히게 마련이며, 따라서 일종의 내파(implosion)의 형식 속에서 반복 실행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소위 전통적 맑시스트 비평이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비판적 거리'(critical distance)를 통해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저항을 잉태하되 죽은 채 '사산'(死産)하는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혁명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김두진의 패러디는 의미를 '잠시' 지연시키고 방출(데팡스) 시킬 뿐 안티테제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해골들을 물신화시킨 볼거리(spectacle)로 재전도(transposition) 될 수도 있다. 해골 이미지가 오늘날 여성들의 패션과 액세서리에조차 애용되는 마당에, 김두진의 근사한 해골들은 남근적 이성에 대한 강력한 전복이긴 커녕, 기껏해야 하나의 죽음의 유희하는 오락적 물신에 불과할 수 있다라고 비난해도 그리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마치 에펠탑 열쇠고리가 파리(Paris)라는 실재(實在)를 대신하는 물신이듯이 말이다. 이와 같이 차용의 방법론은 칼 끝을 자기 자신에게도 향하고 있다. 그것은 승리로서의 타살(他殺)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희생하는 공멸(共滅)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김두진은 '오이디푸스가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다. 해골작업은 反변증법적이고 '사산된 저항'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기모순의 반복을 통해서 오히려 그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즉 '남성 되기'에 저항한다. 그가 행하는 해체는 남근중심주의를 겨냥한 끊임없는 부친살해(patricide)와 같은 것인데, 이는 결코 부친의 성적 역할과 경쟁하고 부친과의 상상적 동일시로 이어지는 오이디푸스적 의미가 아니라, 아이-어머니-아버지로 구성되는 정신분석학적 3자관계 속에서의 자신의 '성적 역할'을 삭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남근 또는 부친의 상징적 권위 자체를 상상적 공허함으로 전락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남근의 상상적 허구성이 폭로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성차는 필연적으로 미분화(未分化)되고 지연된 상태로 남게 된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제 그러한 사산의 반복 속에서, 성차라는 절대적 차이는 완전히 축출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반복적인 부친살해의 장소가 될 뿐이다. 바로 이것이 김두진이 이성애에 거역하는 방식이다.
이 모든 과정을 추진하는 가장 중요한 내적 동기는 모든 상징적 질서를 끊임없이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무의식적 죽음충동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죽음충동은 작가 김두진의 정신병리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그건 당연히 모든 인간에게 내재한 충동이므로), 그의 작품 자체가 죽음충동을 시각화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상징에 대한 위반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해골 자체가 주는 친숙한 죽음의 상징성을 통해서(물론 이 후자는 물신주의에 빠진 즐거움이다).
7. 죽음의 음란한 쾌락, 기념비에 대한 환상
이번에 전시된 해골작업 중에는 명화 패러디가 아니라 조금 다른 방법에 의한 작품들이 몇 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 <영원한 가족>,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같은 작품들인데, 여기서는 여러 해골들이 서로 달라 붙어있는 듯한 상태로 화면 전체를 점유하고 있다. 이 작업에서 주목할 점은 의 경우 남성과 여성의 해골이라는 성차적 특징이, <영원한 가족>의 경우, 남녀노소를 구분하는 특징이 모호하게나마 남아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그 해골들은 이성애 이데올로기의 재현 ─ 가족 또한 이성애 이데올로기의 산물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이 삭제된 명백한 흔적인 것이고, 그런 점에서 이 작업들 역시 큰 맥락에서는 앞서의 부게로 작품 패러디와 유사한 방법론에 입각한 작업으로 볼 수 있다.
단 부게로 패러디와의 차이를 주목해 보자면, 이 작업에서는 죽음충동이 더욱 쾌락적인 느낌으로, 그리고 해골들은 일종의 반복적 환상의 분위기로 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해골들이 서로 녹아붙어 있다시피 한데, 이것은 생명적 개체로 분화되지 않은 상태, 즉 죽음과 물질이라는 기원적 상태로 되돌아가는 시간적 과정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다. 그것은 죽음의 상징인 해골들을 서로 화목하게 애무하는 자태로 보여줌으로써, 죽음충동을 거부할 수 없는 열렬한 쾌락으로 나타내 준다. 하지만 여기서 특히 강조할 점은 그러한 쾌락이 죽음과 결합되어 있는 쾌락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정의로움과 평화에 기여하는 쾌락이 아니라, 죽음을 지향하고 공포와 결합 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비사회적, 비도덕적이고 전복적인 쾌락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특히 '음란하고 성적인 쾌락'이다. 그 음란함이란 단순히 남녀 간의 생물학적 관계에서 생긴다기 보다는 더욱 근원적 관점에서는 상징계적 법이나 금기를 위반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며, 김두진의 쾌락주의적 해골들은 그 마지막 금기, 즉 죽음 자체를 즐기고 있기 때문에 음란한 것이다. 사실 모든 성행위는 그것이 남녀 간이든 남남 간이든 또는 여여 간이든 간에, 결국 나와 타자 사이에 있는 개체적 경계의 파열, 즉 죽음 자체를 즐기는 것 아니겠는가.
이제 이 작업의 특징으로 논할 마지막 특징은 '환상적 측면'에 대한 것이다. 그 해골들은 암흑의 공간 속에서 클로즈업되어 불쑥 떠오른 듯한 느낌으로 인해 마치 의식을 침범한 '신경증적 환상'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억압된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모든 신경증적 환상은 일반적으로, '극도로 상세한 디테일 또는 클로즈업 된 듯한 효과', '전체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온 듯한 이미지', '주변의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uncanny, Unheimlich) 출현', 마지막으로 '과도함'(시야 전체를 가득 채우거나 똑같은 이미지가 양적으로 과도하게 반복된 양상) 등을 특징으로 한다. 환상은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며 거대하고 기괴한 '기념비'처럼 형상화되어 상상의 공간 속에 떠오른다.
이런 환상적 이미지는 그렇지 않아도 김두진의 기존 회화작업에서 여러번 나온 바 있다. 예를 들어 <도로시는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에서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 해골의 실루엣, <당신 곁을 맴돕니다>에서 배경을 무중력 공간처럼 채우고 있는 체액과 장기들, <대칭공포증>(1997)에서의 남성들의 육체, (2003)에서 배경의 호모섹스 장면을 원환적 형태로 반복 연결시켜 일종의 기념비적 형태로 구성한 것 등이 그 전형적 예이다. 이제부터 나는 그러한 특징을 일종의 '기념비에 대한 환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렇지 않아도 현대미술에는 그러한 특징들을 보여주는 많은 선례가 있다. 첫번째로 떠올릴 만한 작가는 성행위와 마네킹의 이미지를 조합해 극단적인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보여준 초현실주의 화가 피에르 몰리니에(Pierre Molinier)를 들 수 있다. 평생을 변태적이고 일탈된 성행위 에 몰두하고 이러한 장면을 하나의 '환상의 시각적 표현형식'으로까지 정립하려 했던 몰리니에. 그의 작업을 구성하는 주요 이미지들은 여성의 다리, 항문, 포르노 스타일의 속옷, 하이힐, 야수처럼 날카로운 손발톱 등인데, 그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앞서 말한 신경증적 환상의 전형적 양상으로 보여준다. 이 중 특히 주목할 점은 여자의 다리를 반복 조합하여 거미 같은 기괴한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김두진의 작업과 흡사하게 배경은 공간감이 결핍된 어두운 공간이며, 그 신체덩어리들은 공포와 기괴함의 정서를 표출해낸다.
이러한 몰리니에의 작업과 김두진의 ,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영원한 가족>에 있어, 나는 앞서 말한 바 '신경증적 환상'이 출현하도록 유도하는 반복적 욕동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반복적 욕동은 무의식 속에 있는 어떤 근원적 결핍으로부터 결과하게 되는데 이러한 결핍은 결국 시각적 측면에서 하나의 과도한 신경증적 보상행위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김두진의 위의 3개의 작품은 그러한 특징들을 여러 개 예시한다. 그 해골들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떠오른 듯 하고, 마치 무중력 공간 가운데에 떠 있는 듯하다. 해골의 두상 만을 클로즈업 한 세부의 확대, 나아가 여러 개의 해골들이 연결, 조합되면서 기괴한 기념탑 같은 형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앞서 말한 '기념비에 대한 환상' 이 비록 몰리니에 만큼 극단적이진 않았지만 분명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8. 맺는 말: 죄의 향락, 그리고 김두진의 性
김두진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죄의식에 가득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김두진이 미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 가치, 법을 전복하기, 즉 '아버지에게 죄를 범하기'를 작업 출발점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실 신고전주의적인 美가 적절한 쾌적함을 추구하는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에 관련된 것이라면, 김두진의 해체는 상징에 거역하는 범죄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극단적이고 위험한 쾌락추구의 형태인 '향락'(jouissance)에 관련된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단순한 질문과 대답으로 결론을 갈음해 보자. 김두진이 그린 해골들, 그들은 성차로서의 생물학적 징표가 삭제된 존재들이다. 해골에는 자지나 보지, 젖가슴, 털이 없다. 그렇다면 죽음 자체의 성은 무엇인가? 그냥 모호하게 중성이라 말해야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상 앞서 여러 번 제시되었다. 상징계, 아버지에의 도전(해체), 이것이 문화적으로 결정된 '이 性'(this sex)에 도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필연적으로 그러한 아버지의 법에 도전하는 타자의 성은 '여성'일 수 밖에 없다. 즉 '김두진=타자=죽음'이라고 등치의 축이 가능해지면서 그들의 성은 모두 여성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성'은 이성애적으로 결정된 의미의 여성이 아님은 당연하다. 바로 라깡이 말했듯이 여자에게조차 여성은 자신의 성이 아닌 타자의 성이다. 우리는 '나'가 아닌 '타자'인 한에서만, '아직 여성으로 결정되지 않은 여성'인 한에서만 진정한 성을 말할 수 있고, 그 진정한 성이란 바로 여성인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독자가 잘못 착각하면 안되는 것 한가지. 김두진의 작업은 오직 이성애니, 동성애니 하는 협소한 문제에만 관련된 작업이고, 지금까지 읽은 이 긴 글 역시 그러한 면만 논한 글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글에서 나는 성애, 성차 같은 표현들을 유달리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될 점은, 본문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성애화(sexualize)되어 있지 않은 존재는 없다는 점, 성애의 측면이 바로 우리의 실존과 모든 존재의 본질 그 자체라는 점, 우리는 항상 자신도 모르게 성애적으로 사유하고 욕망하고 충동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성애의 문제는 우리의 존재 자체의 본질적 문제이다. 성을 '특수하고 개별적이고 잉여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 자체가 사실은 보편성과 객관성이라는 남근이성중심주의적 신화라는 점을 최종적으로 환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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