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신진미술인
소개

홍승표 개인전: Boundary Lab

이번 전시는 홍승표 작가가 8년간 런던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서 여는 첫 개인전이다. 이번 개인전 <바운더리 랩Boundary Lab>에서는 그간의 작품들을 정리하여, 에칭 작업과 라인 드로잉, 또한 이를 토대로 제작된 조형물을 소개한다.

홍승표는 청각 기관이나 시각 기관, 소화기관에 이르는 인간 장기를 대체하여 기능하는 기계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사람들을 그린다. 그림 속 인간은 차가운 철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러한 현실에 놀랄 만큼 어려움 없이 적응하며 신체의 일부로까지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작가는 기계와 결합된 인간의 모습들을 철판 위에 제작하며, 철이라는 매체의 물질성과 상징성을 가지고 기계와 예술, 기계와 인간의 사용목적과 생산성을 분석한다.

작가의 작품은 홍대 판화과 시절 시작된 에칭 기법에서 출발한다. 홍승표는 철판 위에 직접 라인 드로잉을 에칭 기법으로 음각하고, 그 위에 채색을 하는 방법으로 제작한다. 또한 종이에 제작된 라인 드로잉들은 기계의 블루프린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정확하며, 이는 기계를 설계하는 단계로서의 드로잉이자 하나의 완성품을 보여주는 기능을 수반하기도 한다.

전시의 제목인 <바운더리 랩 Boundary Lab>에 대해, 작가는 ‘경계를 연구하는 곳’ 이라고 소개한다. 과학과 예술이 만나는 경계와 사람과 기계가 만나는 경계를 고민하는 곳이라 한다.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문화를 지배한 이래, 인간의 삶과 환경은 빠른 변화를 겪어왔으며, 홍승표는 진화란 더 이상 자연의 선택이 아닌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선택이라고 믿으며, 이는 30년대 활발했던 기계미학에 관한 논의와 관계가 있다.

당시의 기계미학은 기계와 대량생산이라는 두 시대적 현상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원 한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기계가 생산해 내는 제품 없이는 살기 힘들어졌고, 도시의 일상은 대량생산된 제품들의 도움으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 등장한 바우하우스는 스스로를 ‘기계적인 합리주의’라 부르며, 기계의 논리를 디자인의 논리에 반영시켰다. 기계 및 대량생산에 맞게 디자인을 설계하여 일상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기능주의적이며, 그 디자인 대상에 대한 형식은 문제에 대한 상세한 합리적인 분석의 결과로서 합리주의 사고이다. 이는 대량생산과 소비에 의해 미래의 유토피아가 곧 도래하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

한국의 70-80년대는 기계미학이 태동한 서구의 20-30년대와 일치한다. 이 시기 한국에서는 대량생산 시스템이 개발되며, 많은 것들이 표준화 또는 규격화 되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인간의 생활환경 또한 표준화시켰고, 대량생산 시스템은 인간 생활의 외부적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 또한 변화시켰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보여주듯, 하루 종일 나사못을 돌리다가, 공장을 나와서도 계속 나사못을 돌리는 채플린의 모습에서처럼, 대량생산이라는 기계적인 체계는 인간의 신체에 적합한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가 대량생산 시스템에 맞추어야 한다는 모순을 나았다.


생명체는 자연 환경 속에서 삶을 지속하기 위해 진화해 왔다. 인간 또한 자연환경 속에서 삶의 존속을 위해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자연환경은 인간에 의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진화 중이다. 변화된 자연 환경 속에서 인간은 삶의 연속성을 진행하기 위해 진화할 것이다. 인간이 만든 환경으로 대변되는 기계들은 인체의 기관처럼 유기적이면서 필연적이다. 시계 안의 기계부속들이 어느 하나 불필요한 것 없이 설계된 것처럼 정교하다. 하지만 기계의 기능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각 기능들이 합쳐져 생명체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는 기관들임을 눈치챌 수 있다.
- 작가노트 중에서

홍승표는 80년대 아버지가 운영하던 금형 가게의 기억들을 작품세계와 연결한다. 아버지가 공장 기계 제작을 위해 각종 동물 모양의 지우개 금형틀의 설계도를 그리던 모습은 작가의 작품 속에서 공장의 기계들이 인간의 장기가 된 모습들로서 나타난다. 홍승표는 인간의 신체의 일부가 된 기계들에 대해 찰스 다윈의 진화론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청동기 시대를 거쳐 여전히 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더 진화하는 길은 철과 육체의 결합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네덜란드의 미술가인 유프 판 리스하우트 Joep van Lieshout 이 <노예도시 Slave City (2005~)>에서 보여주던 이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리스하우트는 건물들, 건강 센터, 미술관, 마을과 대학까지 약 2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창조도시를 재현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모토로 전혀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구조로 설계되었다는 이 도시는, 그 제목 자체에서 명백히 드러나듯 기계화된 사람과 진화된 세계에 대해 비평적 입장을 관철한다.

반면, 홍승표의 세계는 조금 더 기계 친화적이다. 기계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일상생활 속에 존재한다. 놀이 공원에서 기계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과 아기를 유모차를 태워 커다란 시각장치 기계와 함께 걸어가는 부부의 모습에서 보듯, 작가는 기계적 유기성과 기계의 부품으로 된 인간의 장기들을 사람들이 사는 공간에 자연스럽게 자리하며 환경으로서 존재하게 한다. 문화 혹은 생물학적 ‘진화’가 사람이 만든 환경 속에서 진행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의 80년대 산업화와 기계화가 가져온 빠른 부富는 단순한 비평의 대상만은 아니라는 작가의 입장은 신선하다. 작가는 대량생산한 기계 장치들이 우리의 생활을 도와주는 경지를 넘어서 신체의 일부가 됨을 ‘진화’라 부른다. 디자인된 기계들은 사람들과 영향을 미치며 사람들의 생활을 디자인해간다.

글: 양지윤, 코너아트스페이스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