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운
2006 The Slade school of Fine Art, MFA in Fine Art, 런던대 졸업
2002 중앙대학교 조소학과 졸업
개인전
2012 ‘The Title Match’ TV12갤러리, 서울
2011 ‘Vertical Sea-red’ 홍은예술창작센터, 서울
2010 ‘사색하는 긴장’ 관훈갤러리, 서울
2009 ‘Super Rainbow’ 진천종박물관, 진천
2008 ‘고요한 긴장’ KIMI ART, 서울
단체전 및 기획전
2013 ‘결합의 마술’ Space CAN Seoul, 서울
‘미술, 바람을 품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서울
‘Can Can CHINA!’ Space CAN Beijing, 북경
‘NAS 2013’ 나무 모던&컨템포러리 아트, 서울
‘중력과 시간’ 소마미술관, 서울
2012 ‘페스티벌 오!광주 미디어아트 2012’ 5.18민주광장, 광주
‘코리안아이2012’ 사치갤러리, 런던
‘EXTERIOR’ 아트라운지디방, 서울
‘INTERIOR’ 예술의전당, 서울
‘Hybrid’ 창원아시아미술제, 창원
‘Nasi Campur’ 탁슈 갤러리, 싱가포르
2011 ‘no-map’ 홍은예술창작센터, 서울
‘파라테크놀로지-이상하고도 이로운 기술들’ 포항시립미술관, 포항
‘빛의 신세계’ 모란미술관, 남양주
‘해인아트프로젝트’ 해인사 성보박물관, 합천
‘몹쓸낭만주의’ 아르코미술관, 서울
‘사라지는 것이 살아지는 것이다’ 최종운, 한지석 2인전, 이온갤러리, 서울
‘지구 The Earth’ 성북구립미술관, 서울
‘움직이는 미술전’ 예술의전당, 서울
‘가제는 게 편이다’ 공아트스페이스, 서울
‘제10회 송은미술대상전’ 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2010 ‘Lack of Electricity II’ 스페이스 캔, 서울
‘21세기의 첫 10년’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 서울
‘NEO SENSE-일루젼에서 3D까지’ 사비나미술관, 서울
‘이코노텍스트’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2009 ‘No... ’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조각적인 것에 대한 저항’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갤러리 킹, 서울
‘스팩트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서울
‘스틸랜드: 문래동 팩션 프로젝트’ FUTURE TEXT, 서울
‘Propose 7 (vol.4)’ 금호미술관, 서울
‘VISTAS’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발(INDAF09), 인천
‘TWO+ 최종운, 변재언 2인전’ 이브갤러리, 서울
‘신나는 미술관: 키넥트 아트를 만나다’ 경남도립미술관, 창원
‘인정게임’ 서교육십, 상상마당, 서울
2008 ‘4482’ Barge House, 런던
‘생의 매력’ 갤러리 LVS, 서울
‘최종운, 김영식 2인전’ SUPEX Hall, KAIST, 서울
2007 ‘Heavenly Garden’ KIMI ART, 서울
‘HOT’ Collyer Bristow Gallery, 런던
‘The Open’ Korean Contemporary Art, Kingspark Studio, 런던
‘LOST & FOUND’ Saatchi ‘Your Gallery’ Exhibition, The Brick Lane Gallery, 런던
수상
2012 SeMA 신진작가전시지원, 서울시립미술관
2012 송은미술대상전, 송은문화재단
2010 송은미술대상전, 송은문화재단
2009 NArT 젊은예술가지원기금, 서울문화재단
2008 문예진흥기금, 신진작가지원
레지던시
2013 P.S. Beijing 17th Artist
2011 홍은예술창작센터 1기 입주작가 (장기)
2009-2010 서울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4기 입주작가 (장기)
2008-2009 국립고양미술창작스튜디어 5기 입주작가 (장기)
작품소장
서울시립미술관
해인사 성보박물관
인천 경제청
Marcy Mccall Macbain Collection, 런던
최종운의 데스매치, 인디애나와 허스트의 한판 싸움
백 곤(미학, 한빛미디어갤러리 전시팀장)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화두는 무엇일까? 바로 존재(being)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역사의 수많은 시간동안 철학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그리하여 사유하고 있는 그 순간을 감각으로 직관해야하는 숙명적 물음, 바로 “존재”이다. 이 물음은 어떤 답을 내놓았는가? 나의 존재와 타자의 존재, 혹은 개념의 “존재들”이 아로새겨진 사유의 끝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음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으로서 사유할 것이 없다는 것,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은 정지, 곧 죽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은 또한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죽음과 삶, 삶과 죽음은 하나의 순환고리처럼 끊임없이 윤회한다. 그리고 또한 대립한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죽음의 이야기? 삶의 이야기? 존재는 단지 각각의 순간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아주 잠깐 인간의 기억에 각인시킬 뿐이다. 마치 반짝이다 사라지는 빛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의 화두는 무엇인가? 역시 “존재”개념을 빼놓을 순 없다. 예술은 존재개념을 어떻게 수용, 표현하였는가? 여기 두 명의 유명한 예술가가 있다. 바로 로버트 인디애나와 데미안 허스트이다. 로버트 인디애나는 1960년대 기하학적 추상을 통한 미니멀리즘, 혹은 팝아트적인 요소를 통해 전 세계에 사랑 바이러스를 퍼트렸고, 데미안 허스트는 1980년대 yba를 이끌면서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하여 수많은 해골들을 선보였다. 인디애나의 사랑과 허스트의 해골은 우리들로 하여금 존재의 개념에 즉각적으로 직면하게 만든다. 최종운은 바로 이 두 예술가의 존재개념에 주목하였다. 그는 미국현대미술, 특히 모더니즘적 가치를 추구하는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LOVE”와 영국현대미술, 포스트모더니즘의 극한점을 보여주는 작품 “(일명)상어”(<살아있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불가능한 물리적 죽음 The physical impossibil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 더 나아가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아니 고상하게 그 의미들을 찾는다기보다는 치열하게 그 의미를 획득하기를 원한다. 조금 더 거칠게 말하면 최종운은 이 두 예술가에게 서로 격렬하게 한판 붙어보라고 말한다. 바로 권투경기장의 링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라는 것이다. 그의 타이틀매치는 이렇게 시작된다. ‘존재’의 개념을 우리들에게 가장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챔피언 타이틀을 누가 획득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누구의 편을 들것인가? 그의 위험하면서도 짜릿한 승부는 지금부터이다.
1라운드. 형태의 한계를 넘어
인디애나 대 허스트, 허스트 대 인디애나 박빙의 승부를 펼칠 두 선수 입장한다. 인디애나의 와 허스트의 <(일명)상어>가 자신들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서로 신경전을 벌인다. 우선 청 코너의 부터 살펴보자. 사랑의 관념을 즉물적인 글자로 표현한 는 이미지화된 언어로 사람들의 관념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그 언어는 사람들의 뇌리에 꽂혀있는,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하는 순간 그 감성이 지나가 따뜻한 어떤 느낌만을 남겨주는 “사랑”이 된다. 사랑을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가? 때론 부드럽게 녹아들고, 달콤하게 다가와 살며시 입 맞추고 가는 그 가슴 설레이는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하는가? 고정된 형상의 조각으로 결코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머릿속, 가슴속에 피어나는 관념의 언어인 사랑을 인디애나는 언어적 형태를 통해 사랑의 감정을 읽어내게 한다. 반면 홍 코너의 허스트는 어떠한가? 허스트는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바다의 맹수 상어를 가져온다. 바다의 최고 포식자인 상어의 등장은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죽음으로 내몰 것같이 강렬하다. 그의 전략은 상어의 미메시스가 아닌 상어 그 자체의 형상을 가져오는 것에 있다. 실제 죽은 상어를 네모난 틀에 넣고 포름알데히드를 붓는다. 그리하여 죽은 상어를 영원히 박제시켜 죽음의 의미를 고정시킨다. 그러나 그는 상어 속 기계장치를 작동시켜 상어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만든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죽음의 의미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만든다. 여기까지 이 두 작가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이 둘은 각각 사랑(삶)과 죽음을 형상화하였다. 인디애나의 전략은 문자 그대로를 드러낸 것이고, 허스트는 형태 그대로를 가져온 것이다. 어느 것이 더욱더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가? 이를 실험하기 위해 최종운은 외형상으로 이 둘의 작품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그의 전략은 두 작품의 형식 그대로를 가져와 서로 대립되게 매칭시키되 동일한 매체로 변환시키는 것에 있다. 그는 이사할 때 주로 사용하는 플라스틱 박스인 ‘단프라박스’로 두 작품을 형상화하였다. 또한 파란색을 불투명 흰색으로 바꾸고, 벽돌크기의 네모난 큐브와 4단계로 분할한 큐브를 사용하여 각 형태를 마치 픽셀들의 집합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 큐브는 하나의 셀이 되어 거대한 형태를 만들어내되, 언제나 다시 개개별의 셀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이는 디지털화된 픽셀을 상징한다. 두 작품의 외형적 형상은 그러므로 그것이 관념적이든, 사실적이든 간에 단지 네모난 픽셀덩어리로 채워진다. 1라운드 무승부.
2라운드. 의미의 함몰
자. 이제 형태는 그렇다고 치고, 각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를 확인해보자. 최종운은 인디애나의 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여 사랑의 감성을 이끌어내기에 잔잔하고, 고요한 주먹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 주먹은 사랑이라는 이데아를 상징하면서 하나의 실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 실은 강력하지 않아 흔들거리지만 단단한 결속력을 보여준다. 그는 각 큐브들을 접착하지 않고 케이블타이로 서로를 연결하였다. 그래서 LOVE는 살짝살짝 틈을 보여준다. 반면 허스트의 <상어>는 접착제를 사용하여 강력하게 각각의 큐브들을 붙잡고 있게 만들었다. 최종운은 허스트의 죽어있는 상어가 자신의 죽음을 강렬하게 부정하며 죽음의 정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동치는 존재로 보았다. 긴박하고 신경질적인 상어의 움직임은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힘든 순간인지를 지각하게 한다. 삶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혹은 죽어서까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영혼 없는 움직임을 강요당하는 상어의 애처로움을 애도라도 하듯 각 큐브들은 단단하게 서로를 끌어안는다. 와 <상어>는 이제 서로를 향해 한방의 펀치를 날릴 준비가 되었다. 이에 최종운은 두 작가에게 튼튼한 권투장갑을 권해준다. 바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속성들을 훌쩍 뛰어넘어 미래를 향한 강력한 예술의 권투장갑인 “전자적 빛”이 그것이다. 이 빛을 머금은 두 선수가 의미의 펀치를 날린다. 는 하얀색 빛을 조용히 내뿜다가 천천히 선분홍색 빛으로 바뀐다. 그러면서 차분하게 사랑의 의미, 혹은 인디애나의 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반면 <상어>는 미친 듯이 질주하며 순식간에 빛의 색을 바꿔버린다. 최종운의 전략은 삶의 생동감을 조용히 정지시키는 것에, 반대로 죽음의 정지는 활발하게 요동치게 하는 것에 있다. 원래 인디애나와 허스트의 의도 그대로 말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관념과 형상의 틀을 원본에서 고스란히 차용하여 원본처럼 읽히게 하는 복사본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가? 최종운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역사적 예술의 권위와 가치의 기대를 함몰시켜,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낸 예술작품을 다시 현재로 끄집어 당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빛은 단지 그 빛이 켜지는 순간 모든 것을 의미로 물들이고 다시 어둠속의 잠재된 빛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빛은 형태의 외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형태의 내적 구성 원리이자,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그 존재론적 개념이 형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유출되어 형상이 가지고 있는 참 의미, 곧 정신에 도달하게 된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로티노스의 말이다. 빛은 반짝였다가 사라지지만 형상이 가진 관념, 이데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힌트를 준다. 하지만 최종운은 우리가 그 힌트에 다가가려는 순간, 그것으로부터 발목이 잡힐 수 있다고 말한다. 바로 관념과 편견의 발목이 그의 작품을 인디애나와 허스트에 머물러 있게 만든다. 또한 관객들을 붙잡는다. 존재의 개념은 관념이 아니라 실체 속에서 인식할 수 있다. 최종운의 작품은 인디애나와 허스트를 통한 삶과 죽음의 타이틀매치가 아니라, 두 개념이 서로 연합하여 다시 인디애나와 허스트의 심장을 노리고(미술사적 이해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고), 또한 이 둘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옆구리에 강한 펀치를 날린다(의미해석의 자의성을 비판한다). 존재의 개념은 어디로 갔는가? 과연 승자는 누구인가?
최종라운드. 데스매치의 승자
인디애나와 허스트는 단지 사랑(삶)과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선과 악, 잔잔함과 요동침, 가상과 실재의 대립되는 개념 모두를 끌어안는다. 상자를 꾸린다는 박싱(boxing)과 복싱(boxing)은 동음어로 텅 비어있는 박스이자 끊임없는 대결을 의미한다. 그는 5,000여개의 단프라박스를 가지고 견고한 집을 짓는 벽돌과도 같이 각각의 개념들을 하나씩 쌓아올린다. 그리고 한방 펀치로 그 쌓아올린 개념들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이사가 끝난 박스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이다. 토사구팽의 미덕은 예술을 더 이상 예술로 인정하지 않을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그러나 최종운은 텅 비어 있는 네모난 박스를 전자적 빛으로 가득 채우고 자신이 필요 없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작품이 가진 존재 의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디애나와 허스트의 역사적 가치들이 여전히 실재속에서 의미화 되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관념을 끊임없이 복제하면서 존재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디애나의 작품이 사랑의 관념을 실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끌고 들어와 실체화 시키고, 허스트의 상어시체가 실체적 죽음이 아니라 그것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에 최종운의 작품은 단지 재현물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가치인가? 애초 그가 이 두 대가의 작품을 선정한 지점으로 돌아가 보자. 그가 애초에 상정했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립은 어쩌면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대립의 끝에는 반드시 시작이 있다. 삶의 이야기가 곧 죽음의 이야기이듯이 예술의 의미는 특정한 관념에 머무르지 않으며 유유히 이동한다. 빛이 어둠속에서 반짝이듯이 죽음은 삶속에서 가치를 생성한다. 그렇다면 그가 내놓은 작품의 존재의미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그것은 두 대립 항을 대립의 순간 속에 그대로 놔두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화해를 요구하지 않고 대립의 순간을 지속시키는 것, 이 순간이 바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최종운의 타이틀 매치는 바로 삶과 죽음의 과정을 의미한다. 거기엔 승자도, 패자도 없다. 단지 상징적인 죽음과 삶이 있을 때까지, 인간의 사유가 넘치거나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싸움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규칙만이 있을 뿐이다. 권투 경기장의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예술에 대해 싸울 비물질적인 타이틀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존재” 개념이자 자신을 증명하는 예술의 위대한 한방 펀치인 것이다. 최종운은 이를 위해 싸움을 건다. 자신의 직관이 예술의 존재와 의미의 존재를 증명해 줄 때까지, 그리고 고정화된 형상의 유연한 사유를 가져올 때 까지, 자신의 관념들과 긴 싸움을 다시 시작한다.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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