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010 MFA, Slade School of Fine Art, University College London, 런던, 영국
2007-2008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동양화 전공 중 도英
2001-2007 이화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 동양화 전공 졸업
개인전
2012 Seeing the Unseen, 아트스페이스H, 서울시립미술관 SeMA 선정작가전, 서울, 한국
단체전
2013 영앤영: 4차원적 세계, 영은미술관, 경기도, 한국
2012 선감, 경기창작센터 전시실, 경기도, 한국
Formation, Arbeit Gallery, 런던, 영국
Rising Stars, New Ashgate Gallery, 써리, 영국
Boundaries, C99 Art Project, 런던, 영국
2011 Air I Breathe, A Foundation, Rochelle School, 런던, 영국
2010 Art Mosh, A Foundation, Rochelle School, 런던, 영국
Art in Woodstock, Methodist Church, 옥스포드, 영국
Quick, Before We Come to Our Senses(London Art Award), 3Bedfordbury Gallery, 런던, 영국
100 Artists for Pride, Twilight Gallery, 브라이튼, 영국
No espere mas, Here Today Gone Tomorrow Pop-up Gallery, 런던, 영국
Degree show, Slade School of Fine Art, 런던, 영국
Flower, Imperial College Healthcare Charity Arts Committee, Charing Cross Hospital, 런던, 영국
Foire Internationale Dessins du 21e siecle (International Drawing Fair), Loft Marquardt, 파리, 프랑스
Sasapari (Korean Contemporary Artists), Oxo Tower Barge House, 런던, 영국
Face Me and You, 스페이스 홀 앤 코너, 서울, 한국
2009 Research Images as Art, Art Images as Research, North Cloisters, 런던, 영국
Interim Show, Woburn Place, 런던, 영국
Anger Management, Will Alsop Architecture Studio, 런던, 영국
수상 및 선정
201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해외레지던스프로그램 참가 지원
2012 서울시립미술관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서울, 한국
Salon Art Prize, 런던, 영국 (Finalist)
2010 London Art Award, 런던, 영국 (Finalist)
레지던시
2013 The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 Vytlacil Residency, 뉴욕, 미국
2012 경기창작센터, 경기도미술관, 경기도, 한국
2009 Poznan Academy, 스코키, 폴란드
출판
2010 Speed, Light, Time / Colour, Scale, Space: Graduate Research, Slade School of Fine Art, UCL, 런던, 영국
2009 Anger Management, Will Alsop Architecture Studio, 런던, 영국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한 무대- 이선영(미술평론가)
정윤진에게 화이트 큐브는 ‘Seeing the Unseen’라는 전시부제가 의미하듯,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지각의 실험실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요소가 갖는 중요성을 관객들에게 자극하여 일깨워 줌으로서 관객들과 소통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보이게 만들고 그것을 분절화, 코드화 시켜 하나하나 가격을 매기며, 이러한 그물망에 포착되지 않은 것들은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생산과 소비의 시대에 역행한다. 정윤진에게 이러한 역행은 공간을 가득 메우곤 하는 지상의 잡다한 것들을 치우는 일부터 시작된다. 전시장 보다 더 순도 높게 만들어진 화이트 큐브 안의 또 하나의 화이트 큐브는 은은한 반사광으로 가득 차 있으며, 지각의 실험을 위해 새로이 좌표축이 설정된 이 공간에서는 명암과 형태의 미세한 변화도 적지 않은 파장과 울림을 낳는다. 빠르게 변화하는 화려한 스펙터클로 지나치게 자극되어 있는 현대인의 시각에, 일견 볼만한 것이 없는 이 백색 공간에서 무엇을 어떻게 봐야할지 몰라 당황할지도 모른다.
하얀 사각 공간 속에서 서서히 돌아가는 하얀 원은 마치 만다라를 입체로 구현시킨 듯,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간접조명이 밑에서 위로 비추기 때문에 대상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아, 백색공간 안에서 서서히 회전하는 지름 110cm, 두께 2mm의 백색 후프는 물질성이 최소화되어 있다. 원근법적 공간에서 공중에 매달린 후프가 제자리에서 돌면서, 형태는 공간 저편으로 조금씩 사라지는 듯이 보이며, 어느 순간 직선이 되어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진 듯하다가 다시 둥근 형태로 자라난다. 하나의 형태는 관찰자의 위치와 시간대에 따라 원, 타원, 직선 등의 방식으로 변형되며, 마치 일식이나 월식, 특히 금환식(金環蝕) 같은 천체 현상처럼 나타남과 사라짐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정윤진의 작품은 태양이나 이데아와도 같은 실체적 존재가 있지만, 상황에 따라 보임과 보이지 않음이 연출된다. 3층은 천정에 와이어로 매단 삼각형 판을 가로지르게 하여 공간 자체를 변형시킨다. 이 공간에서의 움직임은 이상하게 변형된 공간을 탐사할 관객의 움직임만이 유일하다.
천정을 이루는 이등변 삼각형 꼭짓점이 저편의 바닥에 닿기에 실제 공간에 소실점이 만들어지고, 공간 입구 쪽에 간접 광을 비추어 관객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어두워진다. 그래서 말 그대로 소실점(vanishing point)이 소실되도록 연출한다. 무엇인가를 잘 보이도록 만들어진 원근법적 공간은 역설적으로 비가시적인 것을 위한 무대가 된다. 이 작품은 원근법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차지하는 위상을 드러내려 한다. ‘Seeing the Unseen’이라는 전시부제이자 주제이자 작품제목의 출발이 된 것은 하늘이다. 작가에게 하늘은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선 은유로 다가오며, 그녀의 영문 논문은 다각도로 이루어진 하늘에 대한 연구로 가득하다. 정윤진은 ‘그리드에 맞게 주어진 규격 안에서 고안되어야 했던’ 디자인의 한계를 느끼고 잠시 동양화를 전공하면서 느꼈던 자유를 하늘과도 비교될 수 있는 여백을 통해 표현한다. 동양화가들은 하늘을 그리지 않는다. 동양화에서 하늘은 그냥 여백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영국에의 작업들 중, 실크로 여백의 미를 살린 작품들은 얇고 예민한 실크의 물성을 이용하였다. 그것은 전체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설치 형식을 통해 자연의 비가시성을 은은하게 표현하였다. 그녀에게 하늘은 현실의 답답함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인간은 지상적 삶에 얽매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머리 위의 하늘도 바라볼 줄 아는 특별한 동물이다. 여러 매체를 통해 여러 공간에 실험한 작품들은 하늘에 원형을 둔 다양한 변주들이 발견된다. 심지어는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빛으로 가득한 하늘은 무한함, 신비함, 신성함이라는 상징을 포함한다. 정윤진의 실험대상은 ‘비가시성, 빛, 반영, 공기와 수증기’이다. 단지 빈 공간이 아니라 빛으로 가득한 공간이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한 공간의 묘사와 연출에서, 아예 공간 자체를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필연적이다. 공간 속에 편재해 빛을 보다 민감하게 감지하기 위해, 공간에 설치된 최소한의 기하학적 도형 같은 실험적 장치들 자체가 작품이 된 경우가 많았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처럼 현실의 축소모델인 작은 무대를 만들어 놓고 빛과 형태의 관계를 살펴보기도 했다.
빛에 의해 정의되는 공간은 작은 박스에서 큰 방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이번 전시 역시, 가시적인 요소로 비가시적인 것을, 비가시적인 요소로 가시적인 것을 다루어왔던 그 간 작업의 연장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정윤진에게 화이트 큐브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실험의 장이다. 이러한 지각의 무대를 통하여 관객에게 하나의 세계가 열린다. 메를로-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지각이 열어 제치는 세계에 대한 비유를, 마치 외과의사가 환자의 몸을 절개하여 자신이 만든 창을 통해 기능 과정의 기관들을 한창 활동하는 중에 포착하여 바라보는 것과 비교한다. 그러한 임상의학적인 시각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윤진은 나와 세계를 연결시키는 지각이라는 현상을 작품의 중심에 놓는다. 공간 한가운데에서 돌아가는 원은 존재를 나머지는 무(無)로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정윤진의 작품은 존재와 무 사이의 중간에 사유를 위치시킨다.
현상학자 메를로-퐁티는 표면상의 운동, 정지, 거리, 크기 등은 나를 사물자체에서 분리시키는 투명 매질의 다양한 굴절 지표들일 뿐이며, 존재가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었다 하는 응집성 있는 팽창의 다양한 표현들이라고 말한다. 지각의 현상학에 의하면, 깊이를 가진 공간에서 일어나는 교차는 나와 타자 사이의 교환일 뿐만 아니라. 나와 세계 사이의 교환, 지각하는 것과 지각된 것 사이의 교환이기도 하다. 정윤진의 작품에서 지각의 실험무대를 결정적으로 완결 짓는 것은 빛이다. 형태와 배경, 또는 공간이 온통 하얀색 일색인 것은 색 그 자체의 상징적 의미보다는 ‘빛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색채학자 에바 헬러에 의하면 [성경]에는 ‘빛처럼 희다’는 표현이 있다. 다른 색의 혼합으로 만들 수 없는 흰 색은 순수할수록 완벽하며, 다른 것이 첨가되면 그 완벽함이 떨어진다. 흰색은 빛의 모든 색을 합한 것으로, 물리학적, 광학적 의미에서 단순한 색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흰색은 시작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 제일 먼저 명령 ‘빛이 있으라’고 했듯이, 흰색의 상징은 빛의 연상으로 시작된다. 많은 언어에서 흰색과 검정은 밝음과 어두움, 낮과 밤을 구별하기 위해 가장 먼저 생겨난 이름이다. 정윤진의 작품에서 빛으로 가득한 공간은 시작의 공간이라는 상징성이 있다. 그러나 오랜 상징주의를 벗어나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흰색은 무균의 실험실이 그러한 것처럼 실험 대상의 기능과 작동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렇게 차분하고 중성적이고 투명하게 조건화된 공간 속에서, 보다 집중적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에 대한 지각의 현상학을 탐색할 수 있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사물들은 나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나의 시선은 사물들을 어루만지며, 사물의 윤곽과 굴곡과 결합한다고 말한다. 그는 시선과 사물들 사이에서 어떤 공모성을 본다.
그러나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일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는 서로 엇갈리며 상호 침범하고 교차하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사물은 결코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우리가 사물자체에의 접근을 기술하는데 성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투명성과 깊이의 한가운데서일 것이라고 말한다. 완벽하게 연출된 지각의 실험 무대는 역설적으로 완벽하게 관찰 가능한 사물이란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히려 감각 가능한 것, 보이는 것은 무(無)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정윤진의 작품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보이는 것 안에 감싸여 있다. 작가의 역할은 막스 에른스트가 말하듯이, ‘자신의 내부에서 보이는 것의 윤곽을 그리고 투영하는데’ 있다. 이 하얀 실험 무대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향하는 예술 언어의 총체적 운동과 그 흔적이다.
3층 작품은 시각이라는 국한된 감각의 중심으로 설정되곤 하는 원근법적 공간을 관객의 몸 전체가 반응하는 지각의 무대로 변화시킨다. 안 쉬르제의 [서양 연극의 무대장식 기술]에 의하면, 르네상스시기에 무대장식 기술이란 용어는 원근법을 따라 공간을 재현하거나 구성하는 기술을 지칭하였다. 재현의 역사는 무대장치의 역사이기도 했다. 재현 공간으로서의 원근법적 공간은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서 상징적이다. 정윤진의 작품에서 모방의 대상은 눈으로 확인되는 대상이 아니다. 이 무대 장치에서의 모방 대상은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원근법적 공간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신비로운 환영의 장소가 되었고, 중세 시대에는 성경 말씀이 현현하는 장소가 되었다. 인간을 신의 관점과 일치시키는 근대의 신인동성동형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근법적 공간에서 환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관객은 움직이지 않고 정해진 곳에 머물러야 하지만, 정윤진의 무대에서 관객은 간접 조명이 시작되는 무대 틀로 들어갈 수 있다.
안 쉬르제에 의하면 원근법은 인간의 정신적이자 자의적인 구축에 의해서 관찰자의 시선 앞에서 그의 눈과 수평으로 무한대의 주요 방향을 특화한다. 정윤진이 강조하는 것은 소실점이다. 소실점은 무한을 상징한다. 르네상스인들은 원근법을 통해 이 세상이 유한한 것이 아니라 무한하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세계 탐험의 시대를 열었다. 소실점 맞은편에는 환영을 위한 가장 유력한 자리가 마련된다. 원근법적 공간은 단순히 시각적인 질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질서인 것이다. 건축이나 무대장식 기술을 중개로 관객이 스스로를 위해 구축하는 것은 정신적이고 내적이고 영적인 이미지이다. 건너편의 어둠속에서 사라지는 듯한 소실점은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가 [인간 현상]에서 말하는 수렴하는 우주, 곧 오메가 포인트를 연상시킨다. 그의 수렴하는 우주는 눈앞에 펼쳐지는 감각적 대상의 다양성을 꿰뚫고 세계의 궁극적이며 총체적인 단일성을 예감하는 것, 즉 단일성에 대한 우주적 감각이다. 이영성(spirituality)의 철학자가 말하는 우주의 최고 축이 곧 오메가 포인트이다. 샤르댕에 의하면 세계는 엔트로피를 넘어서 오메가로 향한다.
루돌프 아른하임의 [예술과 엔트로피]에 의하면, 엔트로피는 한 체계 안에 존재하는 무질서의 정도에 관한 양적인 척도이다. 열역학 제 2법칙은 물질계가 질서 상태에서 끊임없이 무질서가 증가하는 상태로 옮겨간다는 의미와, 그리고 우주의 최후의 상황은 최대의 무질서상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무질서에 대항하는 큰 정신을 믿는 이들에게 오메가 포인트는 세계의 모든 사건의 축이요, 마침이며 모든 상승력이 모이는 신비한 지점이다. 우주의 중심인 오메가 점은 전능한 존재와 융합하고 일체화한다. 우리를 창조하고 우리를 보호하면서 우리들을 감싸 안고 우리들에게 침투하는 신성한 분위기, 혹은 환경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샤르댕은 자신의 내면에 자신보다 위대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한다. 또한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어떤 것을 믿는다. 이러한 믿음에 의하면 세계는 원초적으로 정신적이다. 정윤진이 텅 빈 공간에 연출하는 원의 회전이나 무한 소실점은 전락과 분리 이전에 존재했을 일체화를 향해 움직인다.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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