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력
2012 독일 함부르크 미술대학(Hochschule fur bidene Kunste Hamburg) / 순수미술(Freie Kunst) /
미디어-시간예술학과(Zeitbezogene Medien) 디플롬 학위(Diplom) 졸업
2005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 서양화과 / 학사졸업
전 시 경 력 (개인전)
2012 Good Morning Miss Lilli! (SeMA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 복합문화공간 꿀&꿀풀 / 서울,
Korea
전 시 경 력 (단체전)
2013 종합극장: Interspace Dialogue / 서울시립미술관 / 서울, Korea
2013 Let’s Hang Whatever You Can Carry / 스페이스 오뉴월 / 서울, Korea
2013 Move on Asia - Video Art in Asia 2002-2012 / ZKM / Karlsruhe, Germany
2013 Move on Asia - Towards a New Art Network 2004-2013 / City Gallery Wellington / Wellington,
New Zealand
2012 Earth calling:Thinking Otherweis /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 안산, Korea
2012 Move on Asia - Oriental Metaphor / 대안공간 루프 / 서울, Korea
2011 Machine-RAUM 2011 / Vejle Art Museum / Vejle, Denmark
2011 Move on Asia - the End of Video Art / Casa Asia / Barcelona, Spain
2011 이웃 / UdN(Universitat der Nachbarschaften) / Hamburg, Germany
2010 80시간의 세계일주 2010 / 수원 미술 전시관 / 수원, Korea
2010 Contemporary Art Ruhr(C.A.R.)2010 , Forum and Media-Art Fair / Zollverein / Essen, Germany
2010 Kyo-Cha-Ro (Kreuzung) / Gallery Westwerk / Hamburg, Germany
2010 산으로 간 팽귄 / 백남준 아트센터 / 용인, Korea
2010 Move on Asia 2010 / 대안공간 루프 / 서울, Korea
2010 Move on Asia 2010 / Para Site Art Space / Hong Kong
2010 Digifesta - 2010 Media Art Festival /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 광주, Korea
2008 Pilze und Bananen / Gallery SKAM / Hamburg, Germany
2007 In Between - Asien- Pazifik-Wochen Berlin 2007 / 주독 대한민국대사관 한국문화원 / Berlin,
Germany
2006 Tiger im Lowenpalais / Gallery Lowenpalais / Berlin, Germany
2005 자몽(自夢) / 스페이스 셀 / 서울, Korea
2004 외침과 속삭임 / 사루비아 다방 / 서울, Korea
2004 SPACE coordinate / 신사동 모빌딩 / 서울, Korea
페스티벌 영상, 퍼포먼스, 음악
2013 2013 BYOB Seoul / 스페이스 오뉴월 / 서울, Korea
2013 Media Ice Art Festival /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축제 2013 / 화천, Korea
2012 Hot Summer Vacation Festival /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 안산, Korea
2011 obPHON'11 - Mobile Klange / Music-Festival in Kirschau, Germany
2010 Fast-Food Konzert / Burger King Radefeld / Leipzig, Germany
2010 Korean American Film Festival New York(KAFFNY) Urban / New York, U.S.A.
2010 No Soul For Sale - A Festival of Independents / Tate Modern / London, UK
2009 My Favourite Tune / Gallery LINDA / Hamburg, Germany
2009 My Favourite Tune / Gallery POW / Hamburg, Germany
레 지 던 시
2012 리트머스 국제 레지던시 /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 안산, Korea
동물-되기; 어느 역행(involution)에의 유혹과 시도.
- 박승원 작가의 < 000 >전시 서문
백용성(철학자, 평론가)
자브라스키 포인트에 자리하기
낯선 곳에서 누군가는 일시적으로 자유롭거나, 향수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곳은 친숙한 어떤 것도 없는 어쩌면 비인간적인 풍경이 잔뜩 부풀어 오른 그러한 곳일지도 모른다. 카프카의 <<성 城>>이 보여주는 모호한 낯설음, 심지어 프로이트가 말하는 기이한 느낌(uncanny)도 아마 그와 유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처 없음의 사태에 직면하여 예술가가 늘 귀향만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박승원 작가의 작업들은 바로 이러한 경험이나 느낌에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현대의 도시에서 정처 없음은 순식간에 치명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회사와 집 사이, 학교와 집 사이, 작업실과 집 사이, 심지어 여행 중에도 ‘정처 없음’의 사태가 우리를 엄습한다. 나는 이를 <비동일성의 느낌>이라 부를 것이다.
더 이상 집으로 회귀하고 싶지도 않고 더 이상 사무실, 작업실에 머무르고 싶지도 않고 더 이상 아는 누군가를 지겹게 만나기도 싫어지는 낯선 상태들이 일상화되는 도시생활은 예전처럼 추방, 포로, 감금, 강제된 난민의 상태와 달리 부드럽게 개인들을 정처 없게 만든다. 그 원인은 개인마다 다양할 것이다. 급작스런 이별, 해고, 알 수 없는 기분, 삶을 옥죄는 항구적 불안들…. 우리는 여기서 즉각적으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이자 실제 장소인 <자브라스키 포인트Zabriskie Point>의 소금사막을 떠올릴 수 있다. 억압의 기제에 순응해 일상의 회로를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이탈의 궤도를 긋는 것, 그리하여 하나의 제로 포인트의 내포적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 - 이것이 예술가의 방식이다. 이미 다다와 요셉보이스 이후 예술은 삶의 방식과 분리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고, 박승원 작가는 단숨에 그 세계에 대한 직관을 터득한다.
따라서 박승원의 작품들에 실존의 외로움이나 쓸쓸함 따위가 보이지 않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느끼는 낯설음들은 -그는 독일에 7년 동안 있었다 - 그에게서 창조적 공간 즉 시작점으로서의 사막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날짜를 정확히 정할 수는 없지만 그는 아마도 이러한 사막의 존재를 경험하면서 붓을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삶의 개별화와 사막화의 과정에 대한 사막으로 가기라는 유쾌한 결별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때 사막은 위험하지만 진정한 모험의 세계가 된다.
동물-되기와 역행의 시도
과연 박승원의 작업들은 ‘동물-되기’의 강렬한 시도들로 가득 차있다. 이란 작품에서 릴리와 함께 한 그의 시도들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침팬지와의 소통의 과정인데, 먼저 그는 자기 몸의 조련을 시작한다. 구부러지고 엉거주춤한 허리의 운동, 두 팔을 내려뜨려 좌우로 움직이고 가슴을 치는 동작, 이와 동시에 따라가는 굽은 다리의 운동들... 한 순간 그는 진정 침팬지-되기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다가 작가와 릴리는 서로를 모방하면서 상호 소통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후에 볼 것처럼 우리는 그의 흉내 내기나, 모방, 혹은 동일화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알듯이 우리는 결코 침팬지나 다른 동물이 될 수 없다. 그리고 흉내 내기의 성공 경험 자체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동물-되기가 가능한가를 아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했드, 정말이지 동물-되기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막이 실제적 공간이 될 수 있는 것만큼이나 실제적인데, 다만 우리의 관념들이 파르메니데스적인 사고방식 즉 사물을 고정된 상태들로만 바라보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혹은 사막을 보면서 단지 빈 공간만을 보려는 경향 때문에 실재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즉 실재적이 되는 차원은 우리가 고정됐다고 인지하는 개체 이전의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일종의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소수의 사고방식이며, 도가(道家)의 사고방식이다. 어떤 건물이나 풍경이 없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사막이 이미 자신의 끝없는 힘의 변이들과 바람과 바람, 모래와 모래 등의 마주침들과 상호촉발들로 변화하는 것만큼이나, 동물-되기는 하나의 본능적 무리되기들, 어떤 떼거리의 움직임들, 기호의 코드들로 분할되고 구획된 언어이전의 몸짓들의 세계들이다. <비동일성의 느낌>이 적극화되는 시점이다.
그것은 공감능력(sympathy)에 기초하고 있으며 거기에서는 이글거리는 차이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이 끊임없이 상호 침투하는 지속들의 운동들이 자리하고 있다. 거기엔 고정된 자아가 있을 자리가 없을뿐더러, 단지 개체화되고 따라서 고정된 ‘닮음’으로 유사하다고 말할 침팬지의 자리도 없다. 오직 사막에서 알몸으로 뒤엉키고자 하는 <자브라스키 포인트>의 영화장면들처럼 양자(量子)적인 얽힘의 시도들이 의 장면들을 구성한다. 우리가 그 작품을 보면서 웃거나 끄덕일 수 있는 것 또한 우리가 이미 그러한 얽힘, 공감, 상호침투의 차원과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흉내 내기를 통해서 침팬지 되기가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어떤 것의 결과이거나 효과이지 참된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원인이 되는 것은 작가의 노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소통에의 갈망 자체이다. 그는 릴리와의 혹은 다른 동물들과의 소통가능성에 대해 자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내가 혹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소통의 바람 즉 언어 이전에 수행되는 그 어떠한 감정의 교류를 통한 소통의 갈망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감정의 교류가 바로 내가 릴리와 경험했다고 생각했던 원초적 소통은 아닐까? 하지만 그것이 릴리에게도 똑같이 느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의 자문은 좀 더 오래 지속될 것이고, 따라서 실험은 계속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보아야 할 것들은 그가 창조해내는 몸짓-언어이다. 그것은 이미 말했듯이 코드화된 언어-기호이전의 것이면서도 몸-흐름들의 몇몇 특질들을 표현한다. 그것은 확실히 외관상 모방의 몸짓언어이다. 그러나 릴리를 포함해 작가가 행하는 말없음의 몸짓, 일종의 동물의 몸짓은 어떤 표현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가?
우리는 아감벤의 제스처 언어에 관한 몇 몇 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상의 말없음의 상태는 세 가지 차원으로 나타난다. 1) 수수께끼. 더 많은 걸 말하려고 할수록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없게 되는... 2) 비밀; 수수께끼에서 말해지지 않은 채 남은 것 그리고 그들이 언어의 진실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의 존재외에 다른 것이 아닌 그러한 비밀 3)신비: 이러한 비밀의 수행으로서의 신비. 종국에 시인은 언어 속에서 말없이 남아있는 자로서, 기호의 진실을 위해 죽어가는 자로 나타난다. 확실히 이러한 이유로 인해, 몸짓은 항상 언어 안에서 유실된 것으로 있음의 몸짓이다.”
이러한 분석은 아마도 예술 일반에 적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없음의 상태는 항상 “언어 안에서 유실된 것”으로 있지만 그 언어를 떠받치고 거기에서 언어-기호가 종종 자신의 질서로서 포획하는, 바탕 자체로의 역동적인 진입 자체이다. <멋지게 울부짓는 사자여!>에서 사자-되기의 표면상의 실패는 이러한 역동적인 진입의 노력으로 인해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물론 그것은 매우 코믹하다. 그것이 주는 웃음은 단지 헛된 시도에 대한 웃음이 아니라면 - 바로 이 바탕의 몸짓되기에서 나오는 일종의 간지러움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통의 성공이나 실패는 모방의 외관상의 성공이 아니라, 순전히 몸의 변이능력과 그 표현력에 달려있다. 다른 몸이 되는 능력, 그것은 들뢰즈가 말한 역행(involution)이다. 역행은 퇴행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라 안으로(in) 말리는, 혹은 펼치는(volution) 전개체적인 장의 생성(되기)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위험하지만 매우 매력적이며 유혹적인 행위이다.
그렇지만 동물-되기는 의 경우에서처럼 항구적으로 ‘흉내 내기’의 차원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왜냐하면 동물-되기는 그러니까 친숙한 동물들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질감을 주지만, 사람들이 거기에서 친밀함만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하나의 재밌는 이벤트로서 즐거워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는 친숙한 원숭이흉내의 이벤트일 뿐일까? 그것은 상업적 이벤트의 공간과 예술의 공간의 구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닫힌 문제가 아니라 열린 문제이기 때문에 참여자의 느낌과 성찰에 따라 즉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지만, 늘 거리는 그 자체로 코드화되었기 때문에 그 코드들을 바꾸는 행위는 진지하고도 유쾌한 실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몸의 수련과 불가능한 공동체
몸의 수련은 동물의 조련만큼이나 유목민에게서 유래한다. 그것은 사막에, 마법사에, 미친 과학자에, 따라서 예술가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장인의 ‘수련’과 기계공의 기능적‘훈련’은 대립된다. 더 나아가 수련은 장인의 그것을 넘어서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무기-되기 같은 무사의 수련이면서도, 명상과 같은 불꽃-되기의 수련이기도 하다.
이러한 몸-만들기의 과정은 몸의 물질성 혹은 판에 박힌 반복성(습관)의 신경에 상당한 자극을 가해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잠재적 몸-만들기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니 박 작가가 되고자 하는 몸의 수련은 그가 소통하고자 하는 침팬지, 사자와 공명하는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보고자 하는 침팬지, 사자의 몸은 그저 우리에 갇혀 일상화되고 지루해진 몸이 아니라 거기에 잠재적으로 배어있는 포효하는 몸, 도약하는 몸, 할퀴기의 날렵한 몸, 따라서 열대우림의 몸........의 에너지 자체가 아닐까? 그것이 무리의 양태들로서 동물의 매혹들, 즉 단순히 가족적인 가축들의 친숙하고 귀엽고 알려진 몸짓이 아니라 수련된 몸이 발산하는 잠재력 자체가 아닐까?
요셉보이스가 마법사로서 이러한 불가능한 몸들, 동물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보이고자 했다면 박승원 작가의 경우는 그 ‘몸짓’자체의 역동성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하나의 공동체이다. 거기에 어떤 기(氣), 어떤 도(道)가 끊임없이 변주하면서 자신의 역능들을 펼치고 상호 관통하고 있다. 빛의 공동체만큼이나 파동의 공동체만큼이나 생명의 공동체, 그 흐름들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은 그 모든 빛, 파동, 생명의 흐름들에서 한시적으로 결집된 주름들이다. 하지만 주름은 펼쳐지거나 운동하지 않으면 현현하지 않는다. 그가 몸으로 어떤 비 규칙적인 박자들, 음들을 만들어내려는 노력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몸, 몸인 욕망, 몸인 정신, 몸인 에너지는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가고자 고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짓의 가시화를 넘어서 시도되는 청각화, 소리-되기의 장면들은 하나의 반복할 수 없는 ‘축제’처럼 고유의 시공간을 창조한다.
아직 그의 예술 언어는 거칠다. 거칠기 때문에 그의 예술언어를 정의내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갈 것이고, 그의 몸들이 주파하는 시공에 가시화된 무엇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의 작업을 ‘행위 중에 있는 예술(art in actio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로젠버그가 주장한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의 본질적 의미와도 통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작품들이 고정되고 견고하기 때문에 오래가며 교환 가능한 예술대상(object)이길 포기하는 순간, 그것들은 그 자신 하나의 흐름(flux)이 되길 욕망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후기 자본주의의 비물질화되어가는 상품사회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창조적 응답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서울시립미술관(Seoul Museum of Art. SeMA)은 2008년부터 역량있는 신진작가들에게 전시장 대관료, 홍보 및 인쇄비, 작품 재료비, 전시컨설팅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2016년부터는 유망기획자까지 지원의 폭을 확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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