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순은 현실에 대한 시각과 인식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표현해온 작가다. 그는 1980년대 초반 실천문학과
리얼리즘 미학에 영향받아 정치‧사회적 현실을 작품에 담았다. 1980년대 중반에는 여성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면서 ‘여성 해방’을 위한 실천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여성 및 노동 현실에 천착한 작업을 진행하던
중 1990년 제4회 《여성과 현실》 주제였던 ‘모성’을 탐구하며 노동자로서의 어머니가 보여주는 힘을 형상화했다. 이후 1990년대 중반에는 ‘모성’ 개념을 자연과 연관시키며 생명을 길러내는 어머니의 강인한 생명력을 그려나갔다. 그는 <뿌리> 시리즈로 ‘대지’와 ‘나무’ ‘뿌리’에서 발견한 여성의 생명력을 구현했고, 나아가 땅과 함께 숨쉬는 야생화에도 관심을 두며 생명의 질서를 예찬했다. 2008년부터는 여성의 생명력을 우주 에너지로 확장해 <태몽> 시리즈에 담아냈다. ‘태몽’은 생명의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과거와 미래의 시공간을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전통 신화 및 전설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1927-2014)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 Cienañosde soledad』(1967)에 영향받은 김인순은 민화와 탱화, 오방색 등 민족적인 형식을 바탕으로 현실과 신화를 결합하며 초월적 생명력을 그려낸다. <태몽> 시리즈의 야생화와 자유롭게 춤추는 무용수는 여성의 생명력과 건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다양한 민화 도상과 신화적 존재들은 길조와 상서로움을 뜻한다. 작업 초기부터 민화를 수집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담은 미 형식을 고민해왔던 김인순은 <태몽> 시리즈에서 여성의 건강한 아름다움을 민족적 조형 언어로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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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몽 09-3>(2009)은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새로 탄생할 생명의 희망찬 미래를 염원한 작품이다. 탱화의 군도식 구도와 민화의 대칭구도를 결합하여 화면을 구성한 균형미가 돋보인다. 당산나무처럼 신성하고 영험한 기운을 뿜어내는 나무는 땅 밑으로 수많은 뿌리를 내려 대지를 지탱하고, 땅 위의 짙은 녹음은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며 우주적인 생명력을 보여준다. 나무뿌리와 함께 누워 있는 여성 형상은 자궁 형상과 만물을 생성하는 어머니인 대지의 근원적 힘을 상기시키며, 1990년대 후반부터 이어온 대지와 뿌리, 여성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반영한다. 화면 하단에는 <
태몽 08-3>(2008)에 그린 고대 중국 모계신화의 창조신인 복희와 여와가 재등장한다. 두 신 가운데에는 민속의례에서 액막이용으로 사용되는 쌀이 표현되어 있다. 여성의 몸을 통해 태어나는 생명의 액운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하늘의 해와 달은 음양의 조화로운 기운을, 주변의 나비와 새, 구름 도상은 길상적 의미를 전달한다.
김인순은 1941년 서울에서 출생해 1962년 이화여자대학교 생활미술과를 졸업했다. 1982년 작업을 재개해 1984년 첫 개인전을 열며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1985년 시월모임을 결성했다. 이후 여성미술연구회 대표, 그림패 둥지 대표, 노동미술위원회 위원장,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민족미술인협회 공동회장을 역임하면서 민중미술 계열의 미술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문화위원,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이사, 여성문화예술기획 이사를 역임하며 여성단체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84년 첫 개인전 《김인순전》(관훈미술관, 서울)을 시작으로 1995년 《여성·인간·예술정신》(복합문화공간 21세기, 서울), 2005년 《느린 걸음으로》(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17년 《김인순 초대전》(지앤갤러리, 울산) 등 7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1986년 《40대 22인전》(그림마당 민, 서울), 제2회 시월모임 《반에서 하나로》(그림마당 민, 서울), 1987-1994년 《여성과 현실》 연례전(그림마당 민, 서울), 1989년 《89통일염원미술전》(그림마당 민, 서울), 1991년 《한국의 여성미술: 그 변속의 양상전》(한원갤러리, 서울), 1992년 《이동미술관: 우리들의 만남》(그림마당 민, 서울, 현대자동차 사업장, 울산 등 순회), 1993년 《코리아 통일미술전 コリア統一美術展》(도쿄 센트럴미술관, 오사카 현대미술센터, 일본), 1994년 《민중미술 15년: 1980-1994》(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97년 《97광주통일미술제》(국립5·18민주묘지, 광주), 1999년 제1회 《99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예술의전당, 서울),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광주비엔날레전시관, 광주), 2008년 《언니가 돌아왔다》(경기도미술관, 안산), 2019년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등 12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3년 예술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1997년부터 경기도 양평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