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인 닫기 검색분류 제목 내용 검색 검색 김정헌 컬렉션 연구조사 가이드 글 | 이솔(미술사학, 뉴욕주립 스토니브룩 대학 부교수)연구보조 | 이민정(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작성일 | 2023.12.21 1. 사전 정보 화가, 미술운동가, 미술교육자, 그리고 예술행정가로서 김정헌(金正憲, Kim Jung Heun, b.1946-)은 1980년대부터 예술과 사회,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던진 작가이다. 1946년 평양에서 태어나 6·25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며, 그 후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72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수학하고, 1977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0년대 단체전 및 개인전 활동에서는 반추상적 회화 실험을 추구했으며, 1980년부터 현재까지 ‘비판적 리얼리즘’, ‘비판적 사실주의’, ‘신구상주의’라고 불린 회화를 제작하며 잡지 광고와 신문 등의 대중매체를 이미지나 재료로 사용했다. 주로 다룬 주제는 농민, 민중, 땅, 역사, 분단 등이 있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약 30년 동안 공주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로 재직했고, 1980년대 민중미술의 발전을 주도한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1979, 이하 ‘현발’)과 전국단체 ‘민족미술협의회’(1985, 이하 ‘민미협’)의 창립에 기여한 대표적인 민중미술가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초 ‘큰 그림’이란 개념을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발전시키고, 2019년까지 회화 작업을 지속했다. 김정헌,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민중미술과 함께 한 40년』, 2021작가의 ‘해방둥이’ 시절부터 민중미술가로서 40여 년의 활동에 대한 회고록이다.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에서는 작가의 자전적 생애를, 2부에서는 작가의 한겨레 기고문을 통한 그의 예술관을 살펴볼 수 있다. 김정헌의 생애와 그가 참여한 민중미술의 역사, 작가의 가치관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김정헌, 「미술과 소유: ‘큰 미술’을 위한 제안」, 『현실과 발언: 1980년대의 새로운 미술을 위하여』, 1985미술의 소유와 소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담은 글이다. 작가는 미술이 물건으로서 소비되는 세태와 이를 둘러싼 제도를 비판하며, 작가와 관객이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미술인 ‘큰 그림’을 제안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큰 그림’이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그림’으로, “실질적인 삶의 이야기, 소유관계로부터 해방되어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야기, 분리와 억압으로부터 삶의 주체자가 된 이야기”를 의미한다. 작가는 실천으로서의 ‘큰 미술’을 제안하는 동시에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미술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민미협 결성 즈음 창작에서 나아가 예술실천으로 확장되는 작가의 현실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김정헌, 「환경적 컴뮤니케숀」, 『그림과 말: ’82 행복의 모습전 글모음 자료』, 1982액자미술과 거리미술을 서로 반대의 개념으로 상정하고, 벽화에 대중성, 익명성, 현장의 사회적 의미, 그리고 ‘메시지의 전달’인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부여하는 글이다. 주로 전후(戰後) 영미권의 벽화와 20세기 초 멕시코 벽화운동을 참고하고 있다. 예술은 ‘삶을 공통인수로 한 다른 모습의 사회’라는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의 글을 인용하며, 도시환경이 ‘우리의 삶의 총체’라고 명명한다. 김정헌은 문학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꾸준한 독자로서 하우저의 『예술과 사회』를 일찍 접했다.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기념비적인 벽화를 포함한 큰 스케일의 대중예술 찬사로 이어지는 점을 볼 수 있다. 『월간미술』 1989년 8월호, 「오늘의 작가연구: 김정헌」『월간미술』 1989년 8월호에 수록된 김정헌 특집이다. 작가의 작품을 ‘비판적 농민회화’의 전형으로 살펴볼 것을 제안하며 〈농부〉(1980), 〈마을을 지키는 김씨〉(1988) 등 농민과 농촌을 주제로 한 작품을 위주로 소개한다. 유홍준과의 대담과 미술평론가 심광현(b.1956-)의 비평이 수록되어 있다. 심광현의 글 「민중의 심성을 파고드는 그림」에서는 김정헌을 비롯한 현발 작가들이 추구했던 대중성의 의미와 이에 따른 주제의식, 민미협 결성 후 ‘큰 그림’의 논리를 제기하며 심화된 작가의 현실인식 등을 설명하고 있다. 김정헌은 같은 호에서 민중성과 서민성에 집중한 민화에 대한 기획특집과 더불어 민화적 모티프를 수용한 한국 현대미술 작가 14인 중 한 명으로도 소개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민중미술15년 1980~1994』 전시도록, 1994민중미술운동 최초의 회고전으로, 국공립미술관이 기획한 최초의 민중미술 전시이다. 당시 김정헌이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민중미술운동의 흐름 속 작가의 작품활동 외에도 기획가 및 행정가로서의 실천을 살펴볼 수 있다. 김정헌, 신정훈, 「김정헌, 미술을 통해 세상을 보다」, 『민중미술, 역사를 듣는다 1』, 2017 2015년 민미협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책으로, 민중미술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8명의 평론가들이 8명의 원로 작가들과 진행한 대담을 엮어 출간되었다. 책에 수록된 김정헌과 미술사학자 신정훈(b.1975-)의 대담에서 김정헌은 그의 생애를 자전적으로 회고한다. 작가가 1970년대 주변부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며 그린 〈잡초〉 연작부터 현발 시절 도시와 산업화를 주제로 한 그림, 그리고 이 같은 관심사가 ‘농민’이라는 주제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이 구술되어 있다. 경기라키비움, 「김정헌: 소위 잡초에 대하여」, 2022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참여자로서 주로 민중미술 단체전 위주로 소개되었던 작가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 나아가 1970년대 초기 작업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아카이브전 《김정헌: 소위 잡초에 대하여》(경기라키비움, 안산)의 리플릿이다. 미술사학자 이솔의 글 「소위 잡초에 대하여: 큰 그림 시대 이전 전통에 대한 다의적 실험」은 김정헌 작품세계의 형성기에 그가 가진 다양한 관심 분야와 주제들이 반추상 형식으로 나타난 회화를 분석한다. 삶과 예술, 문학에 대한 작가의 다양한 관심사는 1970년대부터 관찰된다. 이는 리플릿에 함께 실린 2020년 한겨레 기고문 「예술의 ‘잡(雜)’에 대하여」에서 김정헌이 자신의 그림을 ‘잡다(雜多)’하다고 명명한 태도와도 일치한다. 윤난지, 「혼성공간으로서의 민중미술」, 『현대미술사연구』 22, 2007 민중미술을 그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낸 ‘시각문화(visual culture)’로써 접근하며 그 주요 모태 그룹이었던 ‘현실과 발언’에서 전자인 ‘현실’에 주목한 글이다. 저자는 호미 바바(Homi Bhabha, b. 1949-)의 ‘제3의 공간’ 개념을 통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격동기였던 1980년대 민중미술에 투영된 한국 사회의 혼성성(hybridity)을 분석한다. 이에 따라 김정헌의 〈서울의 찬가〉(1981)와 〈풍요로운 생활을 창조하는–럭키모노륨〉(1981)은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며 서로 이질적인 대립항들이 혼재하는 당대 도시의 시공간적 가소성의 지표로 해석된다. 신정훈, 「산업사회, 대중문화, 도시에 대한 ‘현실과 발언’의 양가적 태도」, 『미술이론과 현장』 16, 2013민중미술을 당대의 ‘시각문화’로 접근하는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현발 형성기인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대중문화(Mass Culture) 이론의 수입과 맞물린 이들의 양가적 태도에 주목한 연구이다. 급변하는 산업화시대 속 대중문화에 대한 이론적 탐색기였던 이 시기, 최민(1944-2018)과 성완경(1944-2022)을 위시한 현발의 평론가들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와해하는 대중문화의 힘에 주목했다. 저자는 현발 초기 김정헌 역시 이 같은 대중문화에 대한 양가적 태도를 담지했다고 해석하며, 작가의 저술과 광고 이미지를 차용한 〈풍요로운 생활을 창조하는–럭키모노륨〉(1981)을 그 예로 제시한다. 민중미술 초기 대중매체 및 파생 이미지에 대한 현발 작가들의 복합적 해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오송희, 「1980년대 민중미술에서 분단의 형상화: 사진이미지 차용을 중심으로」, 『미술사학보』 54, 20201980년대 민중미술 작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사진이미지의 차용’ 기법이 형식뿐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도 민중미술의 주제의식인 분단체제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고찰한 연구이다. 《제5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 6.25》(1984)에 출품된 김정헌의 〈핑크색은 식욕을 돋군다〉(1984)는 얄타회담 장면 사진을 직접 인용하는 형식을 보인다. 민미협이 개최한 제5회 《통일전》(1990)에 출품한 〈4·19와 5·16–독재의 총구와 통일〉(1990) 또한 사진이미지와 당대 유행했던 현장미술 양식인 걸개그림을 절충함으로써 분단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민중미술운동에서 현장미술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형식적 절충을 모색한 김정헌의 작품 변화상을 읽을 수 있다. 2. 이해를 위한 배경정보 반추상 회화 ‘잡초’ 시리즈김정헌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미술대학에서 추상 위주의 교육을 받으면서도 1966년에 창간된 『창작과비평』을 읽으며 사회비판적 태도를 품고 있었다. 1970년대 느슨한 동인 활동과 1977년 견지화랑에서의 개인전에서 보인 ‘잡초’와 ‘백제 전돌’, ‘민화’에 대한 관심은 각각의 모티프가 흰색과 옅은 색상이 어우러진 다변적 추상의 언어로 위치와 맥락에 따라 의미화되는 반추상 회화로 발전한다. 작가는 잡초에 대한 이론을 주류에 속하지 못한 주변부의 미술, 즉 군소미술(minor art)로 상정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등장하는 ‘산동네’의 주제도 반추상 시기에 처음 등장한다. 미술 아카이브에 소장된 다수의 스케치북과 노트를 통해 작업 초기에 나타난 작가의 치열한 고민의 과정을 알 수 있다. ‘현실과 발언’ 활동과 민중미술운동김정헌은 1979년 겨울에 창립된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창립 구성원으로 《제1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1980), 《제2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 도시와 시각》(1981), 《제3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 행복의 모습》(1982), 《제5회 현실과 발언 동인전: 6.25》(1984) 등 다수의 주제전에 출품을 한다. 출품작들은 1970년대 잡초 시리즈와는 달리 밝고 화려한 원색에 가까운 회화가 주를 이루며, 잡지 광고와 상품 로고를 바탕으로 농부와 가족의 형상 또한 새롭게 등장한다. 작가는 잡지면을 직접 회화에 부착하기도 하고 광고문구를 작품의 제목으로 직접적으로 차용하기도 하며, 회화의 구상 단계에서 잡지 광고와 신문 위에 그린 에스키스(esquisse)를 제작했다. 이는 현발의 주요 이론가였던 최민과 성완경이 제시했던 산업사회와 미술의 관계를 시각화한 현발 초기 이론적 방향과 맥을 같이한다. 김정헌은 미술을 통한 현실 참여와 대중과의 소통 문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민중미술운동의 참여자로서 작업을 이어간다. 특히 한 그림 안에 최소 두 겹의 화면이 중첩되며 다수의 시점과 원근법이 동시에 등장하는 독특한 회화론을 고안해 냈다. 그 결과, 김정헌의 회화는 한 화면 안에 여러 가지 그림 방식이 공존하게 된다. 공주사대(현 공주대학교)에 부임한 뒤 학생들과 함께 첫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꿈과 기도〉(1985)를 공주교도소 담장에 완성한다. ‘땅’과 ‘흙’에 대한 탐구로 확장된 회화민중미술운동이 말기에 접어들자 김정헌은 민중미술의 역사화와 1990년대 한국미술의 세계화의 중심에 서게 된다. 민미협의 초대 구성원으로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민중미술15년 1980~1994》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기획에 참여했으며, 이후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한다. 김정헌은 다수의 화면이 중첩되는 회화적 방법론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1987년부터 1995년경까지 황토색의 땅과 흙을 주된 배경과 소재로 하는 작품을 제작한다. 농부의 형상 또한 지속해서 나타난다. 작가는 1994년 천호역 조형물, 1995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설치미술을 짧게 시도한 바 있다. 그 후 다시 회화로 복귀하여 1995년부터 여러 개의 캔버스를 수평 혹은 수직으로 배치해 회화적 평면을 구성하는 매체적 실험을 2000년대까지 행하였다. 미술운동의 확장으로서의 예술행정1980년대 말부터 김정헌은 민미협 대표(1989-1990)와 전국민족미술인연합 공동의장(1998)을 시작으로 다양한 전시회 및 프로젝트, 사업을 추진하고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며 미술활동의 범위를 ‘문화운동’으로 넓힌다. 1986년 민미협의 첫 해외교류전인 《JAALA: 제3세계와 아시아의 민중전》(도쿄도미술관, 도쿄)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작품 운송을 담당하며 예술행정 및 운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문화개혁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1999-2003)을 역임한 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2005-2007),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2005-2007),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2007-2010),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 대표(2009-2012), 서울문화재단 이사장(2012-2015), 4·16재단 이사장(2019-2021) 등 예술행정직을 역임했다. 3. 관련 키워드 민중미술, 큰 그림, 벽화, 공공미술, 잡초, 군소미술(minor art), 농민회화, 민화, 대중문화, 산업사회, 시각문화, 현실과 발언, 민족미술협의회, 예술행정, 사실주의, 리얼리즘, 비판적 사실주의, 비판적 리얼리즘, 창작과 비평, 최민, 성완경, 오윤, 유홍준, 광주비엔날레,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 JAALA, 미술교육 작성일2023.12.21 임동식 컬렉션 연구조사 가이드 글 | 김종길(한국현대미술, 미술평론가)작성일 | 2023.12.21 1. 사전 정보 임동식(林東植, Rim Dong Sik, b.1945- )은 자연을 ‘스스로’ 발견함으로써 예술이란 본래 있는 그대로 존재해 왔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저절로’ 드러내기 위해 수행해 온 자연미술가다. 그는 본래 있어온 그것을 ‘자연미술’이라 불렀고, ‘야투(野投, YATOO)’라 이름 지었다. ‘들(野)=자연’에서 ‘던지다(投)=표현하다’는 이 말의 뜻은 이후 자연미술을 수행하는 미학의 핵심이 되었다.1975년, 그는 서해의 안면도 ‘꽃지해변’에 커다란 알 형상 30개를 설치함으로써 자연에서의 ‘야외현장미술’을 시작했다. 1980년에는 대전과 공주지역의 선후배 동료 작가들과 더불어 금강 백사장에서 《제1회 금강현대미술제》를 기획하였다. 그리고 1981년 8월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를 주도적으로 창립하였다. ‘야투-야외현장미술’은 1983년부터 내부 논의를 거쳐 1985년에 ‘야투-자연미술연구회’로 전환되었고, 1987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발간되는 『미술소식(Kunstnachrichten)』에 ‘야투’가 특집으로 보도되면서 ‘자연미술’이란 용어와 개념이 독일권 국가에 처음 소개되었다. 1991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전》을 시작으로 1990년대를 자연미술의 국제 연대와 확산을 위해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미술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공주시 근방의 원골이란 마을에 ‘띠집(茅屋)’을 짓고 들어가 살았는데, 그래서 그의 자연미술 미학은 더욱 웅숭깊어졌다. 2000년 이후 그는 자신을 자연에 완전히 동화시켜 거의 ‘들사람(野生人)’으로 돌아갔던 삶을 뒤로한 채 ‘화가’로서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 그의 첫 회화는 흥미롭게도 그가 20년 넘게 자연이라는 ‘들(野生)’에서 펼쳤던 온갖 자연미술 행위를 집요하게 그려내는 것이었다. 회화로서 이 재현은 그가 오롯이 자연미술을 수행해 온 삶을 돌이켜 떠올리는 ‘감응(感應)’의 재현이면서, 동시에 성찰하는 ‘붓의 수양(修養)’으로도 읽힌다. 그는 회화를 오래 두고 보면서 그가 자연과 교감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자연미술의 미학을 회화에 심기 위해 그 ‘정신의 현현’을 재사유하는 것이다. 그의 자연미술 회화는 그래서 대지의 뭍 생명과, 사람이라는 낱 생명이 ‘감흥(感興)’하는 순간의 세계를 우주적 차원으로 해석하는 놀라운 회화적 경지를 제시한다. 그는 자연과 인간이 합일된 여여(如如)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오랫동안 화농(畵農)을 일궈왔다. 그것은 그가 원골에서 ‘예즉농(藝卽農) 농즉예(農卽藝)’의 미학을 선언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세계와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는 주요 참고자료는 다음과 같다. dtc 갤러리, 『임동식-80년대 함부르크 시절 드로잉부터 2018 오늘까지』, 20182018년 7월 13일부터 9월 30일까지 dtc 갤러리에서 진행된 《임동식-80년대 함부르크 시절 드로잉부터 2018 오늘까지》의 도록이다. 1980년대 독일 함부르크 유학시절의 드로잉부터 2018년까지의 대표작을 볼 수 있다. 특히 오브제 드로잉, 오브제 콜라주 등 200여 점의 드로잉은 임동식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아르코미술관, 『아르코미술관 주제기획전: 드로잉 에너지』, 20062006년 11월 3일부터 12월 14일까지 아르코미술관에서 진행된 《아르코미술관 주제기획전: 드로잉 에너지》의 전시 도록이다. 74~85쪽에 임동식의 작품 〈드로잉 1985〉, 그리고 이와 관련된 김형미의 작가론을 비롯해 작품 설명이 있고, 175쪽에 임동식의 약력이 실려 있다. “드로잉은 출발이고, 과정이고, 문제제기를 뜻한다.”는 기획취지와 다른 작가들과의 비교를 통해 임동식이 추구해 온 자연미술에서 ‘드로잉’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원골마을, 『예술과 마을』, 20002000년 8월 18일부터 8월 31일까지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동원1구 원골마을에서 진행된 《예술과 마을》의 전시 도록이다. 전시에는 총 73인의 농업종사주민, 60인의 국내 초대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도록은 제1부, 제2부, 제3부-2000 예술과 마을 도록(작가와 명제), 제4부-원골 마을 관련 자료, 제5부(참고자료)-1993 예술과 원골, 제6부-2000 예술과 마을을 도와주신 분들 명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84~253쪽에 임동식의 글 「예즉농(藝卽農) 농즉예(農卽藝)」와 466~467쪽에 임동식의 작품 〈흙으로 송편을 빗어 굽다〉가 수록되어 있다. ‘예즉농 농즉예’는 임동식의 자연미술로 들어가는 가장 진실한 문이다. 임동식의 글을 통해 그가 추구하는 자연미술의 고갱이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생산자 미상, 『Kunstproben』, 19871987년 11월 5일부터 1988년 1월 15일까지 독일 함부르크 바티그(BATIG) 갤러리에서 진행된 전시 《Kunstproben》 도록이다. 이 전시에는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 재학 시절 지도 교수인 클라우스 뵈믈러(Claus Böhmler)와 임동식을 포함한 재학생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제작된 도록의 표지에는 당시 참여자들의 모습이 촬영된 사진이 사용되었으나, 촬영 당일에 함께하지 못한 임동식을 대신하여, 거북이를 등에 업은 퍼포먼스를 하는 임동식의 사진이 앞줄에 배치되어 있다. 당시 임동식이 출품한 작업은 각을 이루어 만든 좌대 위에 여러 가지 색의 전깃줄과 스피커를 사용하여 만든 부처 형상의 오브제를 올려두고 좌대를 둘러싼 천정에서부터 내려오는 흰 천의 중앙을 잘라 앞부분만 보이게 디스플레이한 것이다. 스피커로 만든 부처의 귀에서는 임동식이 직접 녹음한 〈음의 윤회(Tonkreis)〉 사운드 작업이 설치되었다. 이 도록은 유학시절에 무르익은 ‘교감’하고, ‘감응’하며, ‘감흥’을 틔우려는 세계관의 큰 실마리를 제공하는 책이다. 무엇보다 ‘수행성’의 태도에서 불교가 품고 있는 화엄우주론이 어떻게 임동식의 세계와 잇닿아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 임동식, 『임동식-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20052005년 10월 28일부터 11월 24일까지 아르코미술관에서 진행된 《임동식-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의 도록이다. 책의 표지는 〈어느 少年(소년)의 꿈을 위한 작업〉이고, 뒤표지는〈거북과 고목〉으로 디자인되었다. 도록에는 홍명섭의 평론 「동방소년 사유상-임 선배를 떠올리며」가 실려 있다. 도록의 구성은 1975년부터 2005년까지의 작업이 역순으로 전개된다. 임동식과 《금강현대미술제》,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를 함께 기획했던 홍명섭의 글은 회고담에 기대서 ‘예술하는 인간학’으로서의 ‘임동식’을 면밀히 살핀다. 가장 가깝고, 또 먼 거리에서 그린 ‘임동식 초상’이다. 갤러리 세솜, 『임동식-자연예술가와 화가』, 20142014년 2월 26일부터 3월 27일까지 갤러리 세솜에서 진행된 《임동식-자연예술가와 화가》의 도록이다. 이 도록은 김종길의 평론 「화농畵農, 미의 최소화를 위한 자기 수행-임동식의 자연미술과 회화적 상징」, 작품 사진, 작가 약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3년에 그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반대하며 홀로 자연미술가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그 뒤로 그는 10년 동안 ‘그림농사(畵農)’에 매진했다. 그 결과를 볼 수 있는 도록이다. 임동식, 『1964 보릿고개로부터!...』, 20152015년 4월 15일부터 4월 28일까지 스페이스몸미술관에서 진행된 홍익대학교 회화과 64학번 동기생들의 전시 《1964 보릿고개로부터!...》 도록이다. 238쪽에 임동식의 작품 〈친구가 권유한 검바위 고목-동서남북 4방향〉, 〈친구가 권유한 방흥리 할아버지 고목 나무 여덟 방향〉이 실려 있다. 책을 책임 편집한 임동식은 이들의 작품 경향을 비원파 사실주의, 청관파 수채화, 구상, 추상, 백색주의, 극사실 회화, 설치적 회화, 구상과 추상의 융합, 표현주의, 색채중심 밝은 그림, 신앙적 회화, 세계여행과 그림, 일상적 일로서 그림, 민중미술, 현장주의 풍경, 센티멘탈-로맨틱 리얼리즘, 야투-자연미술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윤희의 평론 「예술과 인생」, 김종길의 평론 「청춘예찬, 미의 수행자들」이 실려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일어나 올라가 임동식』, 20202020년 8월 19일부터 12월 31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 《일어나 올라가 임동식》 도록이다. 이 전시는 1970년대 초기작부터 40여 년간의 작업을 총망라한 아카이브 전시였다. 전시 제목은 1981년 여름 공주 금강에서 열린 야외현장미술 ‘야투(野投)’ 첫 모임에서 선보인 두 퍼포먼스의 제목에 가져온 것으로, 그 이후 줄곧 ‘임동식’만의 길을 걸어온 작가의 미술세계를 만다라처럼 펼쳐냈다. 전시는 크게 ‘몸짓’, ‘몰입’, ‘마을’, ‘시상’ 4개의 주제로 나누어 구성했다. 이 도록에는 전시를 기획한 김호정, 송고운 큐레이터의 「임동식의 말: 사유의 기록」을 비롯해, 김종길의 평론 「미의 한 긋, 오롯한 얼나-임동식이 궁리한 생생지리 미학」, 백승한의 평론 「자연문화와 함께 하기」가 실려 있다. 임동식이 펼쳐온 자연미술의 세계 전반을 아카이브, 작품, 평론으로 집대성한 ‘아카이브북’ 성격의 도록이다. 연구자들이 가장 먼저 살펴야 할 자료라 생각한다. 2. 이해를 위한 배경정보 임동식의 삶1945년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출생하였다. 196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했고, 1974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한국미술청년작가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몇 년 후에 고향인 충남 공주로 돌아가 홍명섭, 유근영 등과 함께 《제1회 금강현대미술제》를 기획하였다. 《제1회 금강현대미술제》의 경험을 바로 이어서 이듬해인 1981년에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그가 내세운 ‘야외현장미술’은 기존의 미술 행위를 벗어난 새로운 방법론이었다. 그것은 자연으로 들어가 자연과 예술이 교감하는 미술이었다. 1982년에 독일로 유학을 간 그는 공주의 후배들과 ‘사계절연구회’를 쉬지 않고 지속하였다. 우편을 통해 한국과 독일에서 자연미술을 연결한 것이다. 또 독일에 자연미술을 소개하며 자연미술을 세계로 알리는 토대를 만들기도 했다. 1989년에 귀국하여 공주 원골마을에 자리를 잡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일상적 삶에서 행하는 미술 행위의 실천 가능성을 탐색하는 《예술과 마을》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2005, 아르코미술관), 《임동식_동방소년 탐문기》(2016, 대전시립미술관), 《일어나 올라가 임동식》(2020, 서울시립미술관)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수많은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현재, 그는 공주 작업실에서 예전의 자연미술 행위를 회화로 재해석하기도 하고. 그의 어린 시절 친구인 자연미술가 우평남과 함께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제1회 금강현대미술제》공주 금강 변에서 펼친 대규모 야외현장미술 전시였다. 1980년 11월 16일부터 22일까지 6박 7일 동안 지역에 연고를 둔 2030 작가들이 주축이었다. 이듬해엔 대전문화원에서 1981년 4월 18일부터 23일까지 《입체전》을 열었고, 4월 24일부터 30일까지 《평면전》을 열었다. 그는 ‘한국청년미술작가회’ 활동을 토대로 공주·대전과 충청지역의 젊은 작가들을 대거 발굴하고 참여시켰다. 홍명섭, 유근영 등과 함께 기획한 이 전시는 야외현장미술을 알리는 본격적인 신호탄이 되었다. 중력, 시간, 불과 온도, 물의 흐름, 빛 등을 작품에 사용했으며, 평면과 이벤트 등 토탈아트 성향의 작품들도 제시되었다. 1981년 두 번째 《금강현대미술제 실내전》을 마치고, 그해 6월에 공주문화원에서 공주 연고의 임동식, 지석철, 유동조, 고승현, 허진권이 ‘오오五悟(다섯이 진리를 깨닫는다)’를 주제로 전시를 열기도 하였다. 야투-자연미술(野投-自然美術)임동식과 홍명섭, 유근영, 백준기 등이 활동했던 1970년대 후반기를 거쳐 1980년에 이르는 동안 ‘자연미술’은 초기 단계의 선행적 개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야외현장미술’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한 예로 1975년 여름 ‘한국미술청년작가회’는 안면도 꽃지해변에서 ‘야외작업’을 겸한 캠핑을 가졌다. ‘청년작가회’는 이어 경기도 광릉 숲, 미사리 강변, 비인 반도의 도둔리 해변 등 수차례에 걸쳐 회원 수련회를 겸하여 ‘야외작품’을 발표했다. 1976년 광릉 숲의 기록에 의하면,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 자연물로 한정 지어진 공간, 숲으로 차단된 좁은 시공간이 이용되고 있다. 이 한정 지어진 공간을 매개로 하여 주어진 환경을 일변시켜 보려는 것이 그들의 작업 의도”였으며, “협소한 화랑 구석에서 채울 수 없었던 창조적 열망이 넓은 자연공간 속에서 펼쳐”졌고, “자연의 재발견 혹은 변용, 하여튼 자연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인 채 거기에 다소 인공적인 손질이 가해짐으로써 특수한 어떤 국면으로까지 인도되어 우리에게 전혀 생소한 지각과 관념을 일깨운” 전시였다. 그리고 1980년 11월 《제1회 금강현대미술제》가 개최되었을 때는 ‘야외현장미술’이라는 말이 사용되었고, 이 명칭은 이듬해부터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가 이어받아 그들의 야외작업을 일컫는 이름으로 채택하였던 것이다. 1982년 여름, 그간 ‘야투-야외현장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지속해 오던 명칭을 ‘자연과의 긴밀한 관계가 없이는 작품을 이룰 수 없다’는 시각이 있어 ‘야투-자연미술’로 명칭을 바꾸자는 야투 내부의 발의가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오히려 ‘자연에만 얽매이게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으로 유보되었다가, 1985년 야투 도록 발간 시 ‘야투-자연미술연구회’로 바꾸어 사용하게 된다. 그 후 1988년 《야투 실내에서의 자연미술전》, 《야투 세 곳의 섬으로부터…》 등 야외에서 이룬 작업들을 실내설치 유형으로 전이시켜 발표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었으며, 1989년 《한국으로부터의 야투 자연미술가들의 전시회(Yatoo Natunstler Gruppe Aus Korea)》를 통하여 독일 주요 미술계에 도록으로 전파되었다. 이에 앞서 1987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발간되는 『미술소식(Kunstnachrichten)』지에 야투가 특집으로 보도되면서 사용되었고, 1991년 여름 야투가 개최한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전》에 이어 1995년과 1998년, 그 후속행사에 사용되었다. 이들 행사는 그간 서양에서는 실제 사용하지 않았던 ‘자연미술’이란 어휘의 사용을 불러일으켜 현재는 자연현장에서 자연물을 사용하여 자연을 지향하는 성향의 크고 작은 미술전에 ‘자연미술전’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1981년 8월 공주시와 금강 유역을 근거로 활동하던 젊은 미술가들인 고승현·유동조·임동식·지석철·허진권 등이 중심이 되어 ‘야외현장미술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별칭인 ‘야투(野投)’는 임동식이 발의한 것으로 ‘작가의 생각을 자연 속에 표현한다’는 뜻이다. 1983년부터 내부 논의를 거쳐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는 1985년에 ‘야투-자연미술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1995년에는 바깥미술회와 함께 ‘한국자연미술가협회’를 창립하였으나, 현재는 ‘한국자연미술가협회 야투’로 사용 중이다. 야투-사계절연구회1981년 창립 이래 ‘사계절연구회’라는 내부 연구모임을 통해 ‘자연미술’에 대한 연구 활동을 지속시켜 ‘자연미술’의 미학적 연구와 이론적 체계를 확립하였다. 1991년 공주에서 개최한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전》은 국제 자연미술 운동으로 확대되었으며, 20여 차례의 국제 교류를 통해 세계 미술계에 그 기반을 구축하였다. 특히 1981년부터 1991년까지 38회에 걸쳐 진행된 사계절연구회 도록과 아카이브는 ‘자연미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어 가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왜 그들이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를 ‘야투-자연미술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예즉농(藝卽農) 농즉예(農卽藝)1981년부터 10년간의 독일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임동식은 충청남도 공주에서 삶의 터전을 다시 세운다. 원골마을에 정착하고 여러 해가 지나면서 임동식은 자연과 교감하며 체험하는 삶을 살아간다. 농경주의에 바탕을 둔 시골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서 ‘공동체미술’의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그들과 함께 《예술과 마을》 프로젝트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예즉농 농즉예’라는 개념이었다. 그것은 ‘예술이 곧 농사요, 농사가 곧 예술’이라는 뜻이다. 예술과 마을1993년 봄에 원골로 입주했을 때 그는 “감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터에 맨손으로 손수 지은 작업장 25평. 터 잡기부터 시작해 건물골조-지붕공사, 벽면처리, 내장공사, 배수로-화단공사, 뱀이나 쥐에 대한 신경 쓰기-여름에 모기, 파리 대책, 겨울의 온돌방에 매일 군불 때기, 즉 인간생존의 1차 문제를 공부”한다고 생활일기를 남겼다. 그는 「농경문화와 예술문화의 합생 ‘마을과 예술’ 새로운 예술이념」이라는 글에 그런 그의 삶과 예술의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다. 그가 작성한 《예술과 마을Ⅰ》의 선언문에는 이런 글이 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왔으며, 자연 가운데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예로부터의 사상을 재확인하며, 예술에 있어서 농경문화와 자연미술을 합생시키려는 노력의 큰 서장을 연다. 즉,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며, 농사가 예술이며 예술이 곧 농사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수천, 수백 년 이래 산과 물 등 풍수조화에 적응하여 터를 일구어 이루어진 ‘농촌마을’을 살아있는 자연예술로 확인하며 그 인간적 분위기를 예찬한다. 또한 농민들에 의해 전래되어 온 풍습 등 문화적 사항, 즉 미술, 음악, 무용 등 주민들의 숨은 예술적 소양에 대한 발표의 장을 마련하여 사라져 가는 마을문화를 복원시키며, 주민 스스로가 자연미술 출품작가로 나서 그들 자신이 이미 자연미술가였음을 확인하는 대장을 연다.” 3. 관련 키워드 한국미술청년작가회, 꽃지해변, 자연미술, 자연미술가, 교감, 감응, 감흥, 야투(野投, YATOO), 금강 백사장, 금강현대미술제,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 야투-자연미술연구회, 사계절연구회, 원골마을,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전》,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예즉농 농즉예, 예술과 마을, 공주, 한국자연미술가협회, 농경주의, 농경문화, 마을문화 작성일2023.12.21 강홍구 컬렉션 연구조사 가이드 글 | 박영선(사진·매체미학, 독립연구자)작성일 | 2022.12.201. 사전 정보 현대미술가 강홍구(姜洪求, Kang Hong Goo, b.1956- )는 한국사회가 후기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디지털기술의 영향 아래 급변하기 시작하던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 미술계에서 컴퓨터와 디지털매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작가가 드물던 당시에, 강홍구는 대중매체가 생산한 각종 시각이미지들을 컴퓨터와 스캐너 등의 디지털 장치를 써서 재조직한 키치적인 합성사진 연작들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끌었다. 이후 현재까지 약30년간 디지털사진을 주 표현매체로 하고 회화, 영상, 입체, 집필 등 다양한 예술 매체를 중첩적으로 활용하며 왕성하게 작업 중이다.강홍구 작가 연구에서는 세 가지 점이 기본적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다. 첫째, 강홍구가 창작 활동 초기에 스스로를 ‘B급작가’라고 호명한 점이다. ‘B급작가’라는 표현에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조건과 개인적 현실에 발 디딘 ‘변방’의 작가로서 자신의 길을 가보겠다는 강홍구의 미학적·정치적 입장과 전략이 함축되어 있다. 이 전략은 이후 30년간 그가 수행한 도전적인 여러 작업들을 관류한다. 둘째, 강홍구의 예술실천에서 디지털사진이 중요해지는 맥락이다. 강홍구는, 디지털사진 매체가 글로벌한 차원에서 당대성(contemporariness)을 생산하는 1차적이고 결정적인 ‘대중’시각매체임에 주목했다. 서양미술사가 신화화한 고급미술의 문법으로부터 탈주해서 변방으로부터의 미학적·정치적 발화를 시도할 여지가 많음을 간파하고 디지털사진을 주 매체로 선택했다. 셋째, 강홍구는 자본주의・대중문화・일상성・공간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감각적 사유와 발상, 그리고 현실 비평과 작업 개념이 담긴 다량의 밀도 있고 빼어난 글들을 집필해왔다는 점이다. 그는 사회현실-현대미술-일상-시각이미지-디지털사진 등의 관계를 탐구한 10권의 단독 저서(작가 표현으로는 “대중적인 미술 소개서”)를 비롯한 다수의 단행본를 출간했고, 자신의 모든 개인전 도록 서문을 직접 쓸 만큼 지적 탐구심과 독립성을 지닌 작가이다. 이 저작들은 그가 30년간 생산해온 시각이미지 작품들과 교직되어 강홍구 예술실천의 독특한 장을 이룬다.강홍구의 예술실천은 완성된 과거형이 아니라 변화·전개 중인 현재진행형이다. 때문에 작가 연구에서 대표작 위주의 접근 방식은 권하지 않는다. 강홍구의 창작 주제와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에 따라 생성되고 변하는지를 검토하고, 그 변화의 저변을 관류하는 작가적 태도와 사회정치적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30년간 생산된 작품과 저작들을 교차시키며 전체적으로 개관하는 것이 1차적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이 가이드에서 ‘4. 작가의 저작 목록’을 별도로 작성했다. 이런 맥락에서 주된 참고 자료는 다음과 같다. 강홍구, 『강홍구 1996-2010』, 원앤제이갤러리, 20102010년 원앤제이갤러리에서 개최한 개인전 《그 집》에 맞추어 발간된 도록이다. 1996년부터 2010년까지 발표된 작품 도판들을 선별 수록했다. 대중시각이미지와 스캔이미지를 합성한 〈불〉, 〈나는 누구인가〉, 〈도망자〉 등 초기 연작들에서부터 디지털사진기로 직접 촬영한 이미지를 재구성한 〈그린벨트〉, 〈한강시민공원〉, 〈드라마세트〉, 〈바다〉, 〈부산〉, 〈생선이 있는 풍경〉 연작, 도시재개발 풍경을 다룬 〈오쇠리 풍경〉, 〈수련자/미키네 집〉, 〈사라지다〉 연작, 그리고 사진을 기반으로 한 페인팅과 드로잉 이미지 연작인 〈그 집〉에 이르기까지 15년간의 작업 흐름을 개관할 수 있다.강홍구, 『강홍구』, 한국현대미술선 036, 헥사곤, 20172017년 원앤제이갤러리에서 개최한 개인전 《안개와 서리》에 맞추어 발간된 도록이다. 10년간 촬영한 고양신도시 개발풍경 사진을 재구성한 《안개와 서리》 연작 외에 2012년 이후 발표된 사진을 기반으로 한 페인팅과 드로잉 이미지 형식의 《녹색연구》, 《서울산경》, 《언더프린트》 연작의 작품도판들을 선별 수록했다. 강홍구, 『집, 꽃, 마을—은평 뉴타운의 기억 강홍구 사진전』, 은평역사한옥박물관, 20212021년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개최된 개인전 《집, 꽃, 마을···》의 전시도록이다. 작가가 2002년부터 2020년까지 은평뉴타운 재개발 과정을 촬영한 사진들을 선별·수록했다. 사진들은 2000년 초 당시 촌락 중심으로 이루어진 농경사회의 공간적 구조가 남아있던 도시 변두리 마을들이 철거되고 고층아파트단지가 세워진 2020년까지 약 20년간의 풍경의 변화를 보여준다. 수록된 모든 사진은, 〈그 집〉 연작에서처럼 사진 파일을 가공하고 그 위에 페인팅과 드로잉을 덧입히기 ‘이전’의 즉 작품화되기 이전의 이미지이다. 이 도록은 디지털사진 자체가 지닌 ‘기이한’ 기록성, 생활공간의 급격한 변화를 야기하는 배후 요인, 공간과 인간의 관계 등에 대한 건축학적·사회학적 질문들을 담고 있다. 강홍구, 「포스트모더니즘 연구―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기초이론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석사학위논문, 1990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회에 수입되어 현저한 영향을 미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연구한 강홍구의 석사학위논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발생, 개념, 인식론적 근거, 이데올로기적 성향 등을 모더니즘과의 관련 속에서 조망하고, 이질적 역사발전 단계들이 중첩되어 있는 한국의 특수한 현실에 입각한 비판적 검토를 시도하고 있다. 1980-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 속에서 강홍구가 모색한 작가적 대응의 단초를 찾을 수 있는 저작이다. 2. 이해를 위한 배경정보 강홍구의 삶1957년 전남 신안군 지도읍에 속한 작은 섬 어의도의 소농 집안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냈다. 이후 목포중고와 목포교육대를 졸업하고 6년간 교사 생활을 한 뒤 홍익대 서양화과에 다시 입학했다. 35세에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문으로 홍익대 서양화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스스로를 ‘B급작가’로 호명하며 대중문화에서 소비되는 시각이미지들을 재조직한 합성사진 연작을 발표했다. 이후 현재까지 21세기 한국사회의 대중문화와 일상성, 도시화에 따른 생활공간 변화를 다층적으로 탐구한 디지털사진 기반 이미지 연작들을 왕성하게 발표 중이다. 포스트모더니즘 강홍구는 1988년 홍익대 대학원 재학 시절,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의 본격적 발현’으로 평가되는 ‘뮤지엄’ 그룹의 《U.A.O.》 전에 참여했고, 1990년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연구한 석사학위논문을, 1995년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작가인 앤디 워홀에 대한 소개서 『앤디 워홀―거울을 가진 마술사의 신화』를 발간했다. 강홍구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1980-90년대 한국사회에서 소비자본주의가 본격화하던 격변기에 기존 모더니즘 미술제도에 저항할 정치적·미학적 전략을 만들어가는 데 참조할 ‘대안의 한 가능성’으로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주요사항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과 실천은, 강홍구 작업의 축인(‘B급작가’로 언명된) 의도적 비속성, 진리의 일원성에 대한 불신에서 나오는 유희적·양가적·다층적·탈주적 태도, 현대의 일상성에 대한 집요한 관심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 1차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좋다. B급작가강홍구는 1996년부터 제작한 〈나는 누구인가〉, 〈도망자〉 등의 합성사진 연작들을 발표하는 두 번째 개인전 《위치, 속물, 가짜》를 1999년 금호미술관에서 개최했다. 전시 리플릿에 쓴 글 「펄프 픽처」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A급 미술이 아니라 B 아니면 C급 미술이다.” 강홍구는 스스로를 B급미술을 하는 ‘B급작가’라고 불렀다. ‘B급작가’라는 자기호명에는, 서구중심 예술사에서 설정한 소수의 천재적 창조자 즉 ‘A급작가’ 신화와 모더니즘적 고급미술의 문법에서 탈주하여, 시각이미지 생산자 또는 시각정보의 재조직자로서 자신의 길을 가보겠다는 강홍구의 작가적 태도와 정치적·미학적 전략이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B급’의 전략은, 그가 자본주의 상품논리에 따라 쉽게 사라져버리는 광고사진과 영화스틸을 비롯한 포르노이미지·만화·낙서 등 비속한 시각이미지들과 시각정보를 재조직하거나, 대중의 평범한 일상을 둘러싼 생활공간의 변화에 관심 갖고 디지털 사진을 주매체로 삼아 탐구해온 전체 작업 과정을 관류한다. 일상, 일상성강홍구의 30여년 간의 작업과정에서 소재와 사용매체, 형식 면에서의 새로운 시도는 자주 발견된다. 하지만 초기 합성사진 연작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전체 작업에서 집요하게 다루어지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상생활’ 또는 ‘일상성’이라 할 수 있다. 앙리 르페브르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현대 세계를 ‘소비 조작의 관료사회’로 정의한다. 국가와 자본이 결탁한 익명의 관료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현대인의 일상은 노동 시간과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여가 시간으로 분리되고,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로 분열되며, 이 양자는 시스템에 의해 엄격하게 관리되고 최대한으로 상품화된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의 배후는 거의 의식되지 못한다. 정치적·상업적 광고가 선택의 자유와 행복이라는 환상을 부추기며 대중의 소비욕구를 조작하는 장이 바로 현대인의 일상이자 현대세계의 일상성이다. 그런데 일상은, 그것을 비일상적으로(총체적으로) 접근할 경우 은폐된 국가-자본 권력관계의 역학이 폭로될 수 있는 변혁가능성의 장이 되기도 한다. 강홍구는 이러한 일상의 양면성을 간파하고 일상 읽기와 일상 뒤집기를 다층적으로 시도해왔다. 그의 일상성 탐구는 도시재개발과 인간-공간 관계 탐구를 통해 심화된다. 디지털사진강홍구에게 디지털사진은 세계에 대한 파편적 시각정보를 산출하고 그 파편적 정보를 수월하게 재조직할 수 있는 매체로서 기능한다. 즉 중성적인 그러나 믿을 수 없는 대중 영상이미지에 후반작업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개인적 시선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개입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를 실행하기 위해 디지털사진을 선택했다. 따라서 그에게 디지털사진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사진을 뜻하지 않는다. 2003년 개인전 《드라마 세트》 전시 도록에서 그는 “사진을 찍고, 사진에 약간의 조작을 가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현실 자체의 죽음, 그러나 죽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느껴지는 무엇이었다.”고 말한다. 이 죽음 아닌 다른 무엇은 자본주의적 교환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이미지화된 사물 즉 사용가치의 구체적 맥락이 제거된 파편적이고 추상적인 상품 형식과 관련된다. 작가는 자신이 제작한 사진이미지가 “파편화된 세계를 파편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위장”일 뿐이며, 이 위장은 사진의 인증력을 비롯한 사진에 기반을 둔 모든 시각매체들이 제공하는 정보에 대한 불신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작가는 영향력 있는 대중매체와, 그것을 불신하는 자신의 개인적 시선을 최대한 충돌시키기 위해 디지털사진을 그 수단으로 선택했다. 강홍구의 이러한 매체적 입장은 후기자본주의 대중사회에서 ‘창조’가 아니라 ‘검색’, ‘재조직’, ‘충돌’, ‘쐐기박기’를 수행하는 ‘B급작가’의 미학적·정치적 전략에서 비롯된다. 도시재개발한국에서 도시재개발은 1976년 박정희 유신시대에 도시계획법과 별개로 추진법이 제정되어 그 강력한 법적 지지대를 갖게 되었고, 2000년대 들어 수도권 변두리를 비롯해서 전국 군소도시에서 광범위한 도시재개발이 진행된다. 강홍구는 2000년 전후부터 주로 서울 변두리 지역에 거주해오면서 도시화로 인한 도시 변두리 생활공간의 폐허화와 폭력적인 도시재개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이 경험은, 〈오쇠리 풍경〉, 〈미키네 집〉, 〈수련자〉, 〈사라지다―은평 뉴타운에 대한 어떤 기록〉, 〈그 집〉, 〈안개와 서리〉 연작으로 이어지는, 방법적 차이는 있지만 공간 파괴와 변화를 기록/기억하고 그 기이한 풍경의 배후를 탐구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애초에는 전통적인 사진의 기록성에 기댄 작업을 할 생각이 없었으나, 원주민들이 지켜오던 농경문화의 공간 감각과 구조를 지닌 변두리 마을들이 도시재개발사업에 의해 순식간에 파괴되고, 원주민들은 세간조차 챙기지 못한 채 대부분 어디론가 쫓겨나가고, 그 대신 외지인들로 채워지는 비싼 고층아파트단지가 세워지는 충격적 풍경을 목도하면서 일단은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강홍구는 지금도 진행 중인 은평뉴타운 재개발 과정을 2002년부터 2021년까지 기록한 사진들을 구역별로 정리하여 2021년 개인전 《집 꽃 마을···》에서 발표했다. 전시된 작품들은, 강홍구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정보 재조직 작업을 거의 하지 않고 분절된 프레임들을 붙이는 정도로만 최소한으로 손질된 사진들이었다(「은평뉴타운 2002-2021」, 《집 꽃 마을···》 전시도록). 은평구 도시재개발은 강홍구의 30여 년의 작업 과정에서 주제와 형식 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 중 하나로 추정된다. 이후 강홍구의 예술실천에서 ‘우리 삶을 둘러싼 공간 탐구’가 큰 축을 이루게 된다. 〈그 집〉 2010년 원앤제이갤러리에서 개최된 동명의 개인전에 발표된 연작의 이름이다. 강홍구의 전체 작업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형식적 변화를 보여준다. 강홍구는 이 연작에서, 전국 각지의 재개발 현장에서 촬영한 디지털 컬러사진 파일을 흑백으로 전환하고 프레임을 이어 붙여 출력한 흑백사진 바탕 위에 사진이미지를 따라서-지우면서, 포개면서-어긋나게 물감으로 색칠하고 그림을 덧그리는 방법을 썼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사진을 기반으로 한 페인팅과 드로잉 이미지” 연작이다. 강홍구의 일관된 미학적 전략은, 통치의 장치 또는 지배이데올로기라는 배후에 의해 작동되는 사진 기반 대중시각이미지의 공식적 사실성에 작가의 개인적·주관적 시선과 기억을 최대한 충돌시키려는 것이다. 〈그 집〉에서는 이 전략이 합성사진·디지털사진 연작들에서처럼 디지털 이미지와 정보의 재조직이 아니라, 사진과 회화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형식적 시도를 통해 발현된다. 이 이미지들은 사진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제3의 이미지로서, 사진과 회화의 매체적 특성들을 교차시키고 한편으로 그 틈새를 증폭시키면서 탈주의 여백 또는 실마리를 남겨둔다. 〈그 집〉 연작에서 발표된 이 형식은 현재까지 10여 년간 〈녹색연구 1, 2〉, 〈언더프린트〉, 〈서울산경〉, 〈신안바다〉 연작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프록세믹스(proxemics)‘공간사용법’, ‘공간학’이라고 번역된다. 강홍구가 도시재개발을 다룬 일련의 연작들에 이어 인간의 생활공간 자체에 대한 진지하고 지속적 탐구를 수행하는 데 영향을 미친 개념으로,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이 저서 『숨겨진 차원』에서 제안했다. 홀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은 문화의 핵심이며 삶 그 자체인데, 서로 다른 문화는 노력하면 공유되거나 비슷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가 다른 개인이나 집단은 동일한 감각자극에 대해 서로 다른 감각적 경험을 하게 되며, 인간이 만드는 건축물과 도시환경은 문화의 이러한 선택적 여과과정이 표현된 결과물이다. 따라서 문화가 다르면 공간이 달라지고, 다른 공간은 다른 사람을 만들어낸다. 문화-공간-경험-사람 간의 순환적 상호작용 때문에 획일적 도시재개발이나 문화통합은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자신의 문화적 패턴에 맞는 적절한 공간을 지키려는 욕구가 있는데, 도시건설과 재개발이 이 근본 욕구를 무시한 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강홍구는 2013년 개최된 《사람의 집―프로세믹스 부산》 전시 도록에서 사람의 집을 찍는다는 것은 “마을을 이루는 집들이 가지는 건축적 원초성, 혹은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잘 찍은 멋진 사진이 아니라 “기록적 측면과 집과 길들이 가지는 개별적인 존재감이 섞여 다큐와 개인적인 시선 사이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2016년 개인전 《청주―일곱 마을의 도시》에서 청주라는 하나의 대도시를 ‘문화가 다른 일곱 개의 시골마을’로 기술·묘사하는 독특한 방법들, 그리고 2022년 1부가 발표된 〈신안 바다〉 연작의 전체 구성이 총체성을 띠는 측면 등을 프록세믹스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신안 바다〉강홍구가 2005년부터 17년간 진행 중인 연작으로, 그 1부는 2022년 서울 원앤제이갤러리, 신안 저녁노을미술관과 암태창고미술관에서 발표되었다. 이 연작에서 강홍구는 자신이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신안의 변모한 풍경을 비롯해서 해양 생물들의 삶과 죽음, 마을, 사람, 일 등 삶의 총체적 변화상을 자신의 개인적 기억과 충돌/중첩시키며 탐구한다. 신안군의 섬 지도 그림, 디지털 풍경사진, 사진 기반 드로잉과 콜라주 이미지, 영상 작품들로 구성된다. 3. 관련 키워드 B급작가, 변방,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던 리얼리즘, 포럼A, 이미지와 정보의 재조직, 자본주의, 소비사회, 대중매체, 대중문화, 일상생활, 일상성, 대중시각이미지, 합성사진, 디지털사진, 유희성/양가성/충돌/탈주, 농경문화, 풍경, 공간, 도시재개발, 포스트모던 사회학, 프록세믹스(proxemics), 사진적 기록, 개인적 기억, 회상, 〈그 집〉, 〈신안 바다〉 작성일2023.12.21 정정엽 컬렉션 연구조사 가이드 글 | 양정애(민중미술, 독립연구자)작성일 | 2022.12.201. 사전 정보 정정엽(鄭貞葉, Jung Jungyeob, b.1962- )은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미술가로 여성의 현실, 노동과 생태 문제를 자신의 삶과 작품세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 오고 있다. 1980년대부터 여성주의, 생태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회화뿐 아니라 드로잉, 설치, 퍼포먼스 등을 넘나들며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대표작 ‘곡식’ 시리즈는 팥과 콩, 나물 등을 주요 소재로 익명화된 여성의 삶과 보이지 않는 노동을 대변하고, 멸종 위기에 처한 동 ·식물들을 통해 소수에 대한 성찰을, 벌레와 나방 등 인간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소외되고 연약한 존재들을 통해 생명력의 가치를 탐색한다. 여성들의 일상과 살림의 미학에 공감하고 반응하는 작업에서 나아가, 삶을 여행하며 길 위에서 만난 여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여성들의 연대와 우정, 환대를 작품 안에서 보여준다. 이러한 정정엽의 예술가로서의 작품 세계는 주요 개인전과 함께 출간된 작품집들에 잘 정리되어 있다.정정엽의 예술 작업의 근간에는 페미니스트이자 민중미술가로 호명되어온 삶의 궤적이 있다. 1980~90년대에는 미술 동인 ‘두렁’과 인천 지역 문화 소모임 ‘일손나눔’, ‘갯꽃’ 등을 병행하며 노동 현장 지향의 민중미술 및 문화운동에 몸담았으며, 동시에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동문 그룹 ‘터’와 ‘여성미술연구회’(여미연),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프로젝트 그룹 ‘입김’ 등의 활동도 병행하며 여성미술운동을 이끌었다. 따라서 정정엽의 예술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브제로서의 예술작품뿐 아니라, 이러한 ‘노동’, ‘여성’, ‘생태’ 등을 키워드로 사회참여적 작업을 해온 활동가로서의 면모까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는 주요 참고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헥사곤, 『한국현대미술선 002: 정정엽』, 20112011년 갤러리스페이프(서울)에서 개최한 개인전 《Off Bean》에 맞추어 발간된 작품집으로, 90년대에서 2000년 초반에 이르는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Off bean〉, 〈Red bean〉, 〈곡식(Grain)〉 시리즈의 주요 작품 이미지와 김윤경(「날 것의 아름다움」, 강수미(「내 이마 위의 붉은 팥」), 임민희(「정정엽의 ‘콩’ – 길을 찾는 그림, 길들여지지 않은 삶」)의 평론 등이 수록되어 있다. 헥사곤, 『나의 작업실 변천사 1985~2017』, 20182018년 이상원미술관(춘천)에서 개최한 개인전 《나의 작업실 변천사 1985~2017》에서 진행한 ‘#쓸데없이 아이처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된 드로잉 작품집으로, 1985년에서 2017년까지 1년을 한 장의 글과 그림으로 압축한 33점의 드로잉이 실려 있다. 1985년 졸업과 동시에 서울 혜화동에 마련한 첫 작업실을 시작으로 2017년 안성 미리내 작업실에 이르기까지 15여 차례 이사를 다니는 동안 다양한 여건의 작업실 변화상이 드로잉 안에 담겨 있다. 정정엽 작가의 작품 세계의 변화 과정 외에도 작가의 개인사와 얽힌 사회적 사건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에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한 실천적인 그리기 작업(걸개그림, 판화 등)과 그룹 활동을 통해 미술운동을 전개했던 시기를 살펴볼 수 있는 드로잉들도 포함되어 있다. 32년에 걸친 작가의 작업실 변천사를 따라가며 한 여성 예술가가 우리 사회 속에서 어떻게 고군분투하며 작업을 이어 갔는지를 추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 『(제4회 고암미술상 수상작가) 정정엽: 최초의 만찬』, 20192019년 제4회 고암미술상 수상작가 기념전으로 개최한 《정정엽: 최초의 만찬》 전시도록이다. 전시에서 30여 년에 이르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망라한 만큼, 도록을 통해 1980년대 초기 목판화 시리즈부터 근작 〈최초의 만찬〉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선별된 대표작들을 살펴볼 수 있다. 작품 이미지와 함께 수록된 미술평론가 이윤희의 글 ― 「정정엽의 〈최초의 만찬〉에 대하여」 ― 은 정정엽의 시기별 대표작들을 그가 걸어온 길과 함께 엮어 소개하면서, 〈최초의 만찬〉 시리즈에 대한 충실한 해제를 담고 있다. 이 외에도 이병희의 평론 「정동의 전환기, 정정엽의 호흡–여자와 여성성의 긴장과 운동」과 김혜순의 시 「물구나무 팥」 등이 실려 있다. 서울식물원, 『조용한 소란』, 20212021년 서울식물원 초대로 개최한 개인전 《정정엽: 조용한 소란》 도록으로, 1990년대부터 2021년까지 약 30여 년간 다양하게 변주된 작품들 중 ‘생명’과 ‘생명력’을 다룬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주제 ‘살림의 미학’에서는 〈봄나물〉 시리즈를 포함한 여성주의적 시각이 깃든 작품들을, 두 번째 주제 ‘생명의 씨앗’에서는 대표작 〈곡식〉 시리즈를, 세번째 주제 ‘공존이라는 문제’에서는 〈벌레〉 시리즈를 포함하여 환경과 공존에 대해 다룬 작품들을 싣고 있다. 작품 이미지, 작가 약력과 함께 실린 기획자 정수미의 글 ― 「정정엽: 조용한 소란」 ― 과 평론가 이병희의 글 ― 「식물정동 – 예술과 동맹하는 식물의 정동정치」 ― 이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걷는 달』, 20212021년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초대로 개최한 20번째 개인전 《정정엽: 걷는 달》 도록으로, 동시대를 살면서 작가와 교감해온 ‘여성의 초상’을 중심으로 한 작품들을 주로 살펴볼 수 있다. ‘걷는 달’, ‘얼굴 풍경 2: 11명의 초상’, ‘붉은 드로잉’, ‘낱말놀이’ 시리즈들이 주요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기획자 강성은의 글 ― 「죽은 새로부터」 ― 과 정정엽과 장파의 대화 「그리는 사람들」이 실려 있다. 현실문화A, 『민중미술, 역사를 듣는다 2』, 20211985년 민족미술협의회 결성을 전후한 소집단 미술운동의 활동 양상과 민중미술운동의 진행 상황에 대해 정정엽을 포함한 10명의 작가가 매칭된 연구자들과 함께 진행한 대담이 담긴 비평서이다. 이 중, 정정엽과 연구자 양정애가 나눈 대담이 「정정엽, 살아온 내력이 작품 되기의 당연함」이라는 소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미술동인 두렁’ 활동을 비롯하여,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문화 소모임 ‘일손나눔’을 거쳐 인천 미술패 ‘갯꽃’, 이화여대 ‘터’ 그룹, ‘여성미술연구회’, ‘입김’ 등의 활동을 병행하면서 민중미술의 경향으로부터 여성의 노동, 여성의 정체성에 집중하며 작품 활동을 해온 과정을 작가의 육성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김현주,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그룹 ‘입김’의 개입으로서 연대와 예술실천」, 『미술사논단』, 2016정정엽이 활동한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그룹 ‘입김’의 다양한 프로젝트의 의미를 한국현대미술 특히 한국의 페미니즘미술과 글로벌 시대 미술의 맥락에서 학술적으로 분석한 논문이다. ‘입김’ 결성 과정부터 그룹의 성격과 미학을 살펴볼 수 있으며, ‘입김’의 주요 활동 중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 ‘사라지는 여자들 프로젝트’, ‘섬-생존자 프로젝트’ 등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박은빈, 「정정엽 여성미술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9작가 정정엽에 대해 ‘여성미술’ 관점에서 조명한 학위논문으로, 정정엽의 전반적인 삶과 가장 최근의 전시 및 작품까지 다룬 첫 번째 단독 연구이다.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혀낸 작품의 의미와 제작 과정 등을 수록하고 있으며, 특히 2010년 이후 진행한 〈거울〉 시리즈와 〈광장〉 시리즈 등 최근 작업들도 아우르며 학술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2. 이해를 위한 배경정보 정정엽의 삶1962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한 정정엽은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에 진학하여 1985년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현장 지향 민중미술 그룹 ‘두렁’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86년 부평공단에 취업, 이후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문화 소모임 ‘일손나눔’을 거쳐, 인천 미술패 ‘갯꽃’ 활동을 하며 다수의 현장 작업 ― 걸개그림, 깃발그림, 벽화, 판화, 삽화 등 ― 을 남겼다. 여성미술가로서의 현실참여를 모색하는 입장에서 정정엽은 이화여자대학교 동문그룹 ‘터’, 민족미술협의회 여성미술분과 모임(1988년 ‘여성미술연구회’로 명칭 변경),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프로젝트 그룹 ‘입김’ 등의 그룹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1990년대에 접어들어 개인 작업에 집중하면서, 1995년 21세기화랑에서 첫 개인전《생명을 아우르는 살림》을 열었다. 이를 시작으로 이후 20여 회 이상의 개인전과 다양한 기획전을 통해 여성의 현실과 노동, 생태 문제를 작업의 주요 주제로 다룬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1998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붉은 팥과 곡식 작업들을 발표했다. 2006년 아르코미술관 기획초대전 《지워지다》에서는 아시아의 익명화된 여성들,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 등 소수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었다. 2016년 《벌레》(갤러리스케이프)전에서는 그동안의 씨앗들이 발아하듯 인간과 공존하고 있는 생명들을 탐색하였다. 2019년 개인전 《최초의 만찬》에서는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을 화두로 던진 인물들과 그녀가 만난 주변의 인물들을 만찬 자리에 초대하는 작업으로, 노동과 행위 주체를 전면으로 불러내었다. 정정엽은 이러한 왕성한 개인작업 사이에도 단체활동을 유기적으로 왕복하며, 사회 속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현장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제 역할을 해오고 있다. 1998년부터 2016년까지 참여한 《황해미술제》 활동, 예술점거 프로젝트(스쾃)를 통해 새로운 예술운동을 제안한 ‘오아시스 프로젝트’와의 협업, 탈핵 작가 모임 ‘핵몽’ 활동, 연안환경미술행동 등도 그러한 실천의 일부이다.1980년대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한국 사회의 모순이 분출하는 현장에서 개인 작업과 공동 작업을 진행하며 미시 담론과 거대 담론을 아우르는 예술적 실천을 보여주는 작가로 평가되면서, 2001년 문예진흥원 ‘올해의 한국미술선’ 선정, 2018년 ‘제4회 고암미술상’, 2020년 ‘양성평등문화인상’, 2022년 ‘제34회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였다.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아르코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수원시립미술관 등에 주요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미술동인 ‘두렁’1983년 《창립예행전》(애오개소극장)을, 1984년 《창립전》(경인미술관)을 펼치며 출범한 미술동인 ‘두렁’은 80년대 노동조합들과의 연계 속에서 문화운동을 펼친 대표적인 민중미술 그룹 중 하나이다. 1987년 ‘밭두렁’, ‘논두렁’으로 분화된 뒤 이후 각 지역 및 부분 미술운동으로 산개하였다. 정정엽은 1983년 ‘두렁’의 《창립예행전》을 관람하고, 2년간의 고민 끝에 대학을 졸업하던 1985년부터 공식적으로 ‘두렁’에 가입하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7년 ‘두렁’이 ‘밭두렁’(노동운동 현장)과 ‘논두렁’(서울에서의 지원)으로 산개할 때, 정정엽은 노동운동 현장을 맡아 인천 부평공단 공장에 취업하여 10개월간 노동현장 활동을 하였다. 일손나눔1987년 결성된 ’일손나눔’(1987-1988)은 노동조합의 문화적 지원을 목표로 한 인천의 노동자문화 기획 조직으로, 정정엽은 미술 부분을 맡았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에 문화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조합 설립을 지원하는 미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88년 4월, 한광대 산하, 갯꽃 등으로 조직을 합치면서 이후 ‘우리문화사랑회’로 발전하였다. 갯꽃 ‘갯꽃’(1987-1992)은 ‘갯벌에 피는 꽃’을 줄인 말로, 인천을 상징하는 갯벌이자 척박한 맨땅에 문화라는 꽃을 피우자는 의미를 담아 출발한 인천의 미술패이다. 1986년 노동운동을 지원하던 민중문화 단체 ‘일 그림 동인’이 모태이며, 1987년 ‘일손나눔’의 정정엽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갯꽃’ 활동이 시작되었다. 노동자 투쟁대회 등에 필요한 걸개그림, 판화, 깃발그림 등을 제작하고, 파업기간 중 현장에 필요한 노동조합의 문화 프로그램을 지원했다. ‘갯꽃’의 정정엽과 ‘가는패’의 이성강이 밑그림을 노동자들과 함께 채색하는 방식으로 부평공단 공장 외벽에 공동창작한 〈한독민주노조〉(1988) 벽화는 인천 최초의 노동벽화로 기록되고 있다. 터‘터’ 그룹(1985-1992)은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가 81학번 동기 정정엽, 구선회, 김민희, 신가영, 이경미, 최경숙으로 구성된 여성미술가 그룹으로, 여성의 삶을 기반으로 한 주체적인 미술 활동을 위해 결성되었다. 1985년 이화갤러리에서 《창립전》을 연 이후, 1992년까지 총 4회까지 동인전을 개최했다. 동인전과 더불어 여성미술연구회, 여성단체연합과 결합, 《여성과 현실》전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여성미술연구회 여성미술연구회(1986-1994)는 1986년 ‘시월모임’(김인순, 김진숙, 윤석남)과 ‘터’ 그룹이 결성한 민족미술협의회 산하의 여성미술분과에서 시작된 단체로, 미술을 통해 여성문제를 탐구한다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 1988년 ‘여성미술연구회’(여미연)로 개칭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여성과 현실》 연례전(1987-1994)과 전국 순회전을 펼치며 작품 창작 활동을 선보였으며, 동시에 ‘여미연’ 소그룹 그림패 ‘둥지’(1987)와 만화패 ‘미얄’(1988)과 여성사회운동 현장지원 작업에 협력하며 여성노동자, 여성농민들의 교육 자료를 만들어 지원하였다. 김인순, 윤석남, 박영숙, 김종례, 민혜숙, 정정엽, 류준화, 곽은숙 등 다수의 회원들이 활동하였다. 대표 공동작업으로 〈해방의 햇새벽이 떠오를 때까지 하나되어 나아가세〉(1987)가 있다. 입김 한국의 여성문화 운동이 고조되던 1997년 결성된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그룹 ‘입김’(1997-)은 2000년대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내걸고 성 평등을 위한 예술적 실천을 전개하였다. ‘입김’은 세상의 문제를 고민하는 여성들이 모여 사회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어 변화에 일조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붙인 이름으로, 1997년 10월 정정엽을 비롯하여 곽은숙, 김명진, 류준화, 우신희, 윤희수, 제미란, 하인선 등 당시 30대였던 여성작가 8명에 의해 결성되었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2000년, 가부장제의 상징인 종묘 앞을 여성 미술 축제의 장으로 전복함으로써 유교적 엄숙주의에 반기를 든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를 비롯하여, ‘사라지는 여성들’, ‘우리 안의 여신’을 들 수 있다. 3. 관련 키워드 살림, 집사람, 곡식, 팥, 콩, 벌레, 생명, 거울, 광장, 촛불, 축제, 봇물, 얼굴 풍경, 나의 작업실 변천사, 최초의 만찬, 낱말놀이, 쓰개치마 퍼포먼스, 여성미술, 여성주의,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터(터 그룹), 여성미술연구회(여미연), 여성과 현실, 입김,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 윤석남, 박영숙, 목판화, 걸개그림, 깃발그림, 벽화, 민중미술, 노동미술, 문화운동, 두렁, 일손나눔, 갯꽃, 인천미술인연합, 황해미술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미술인회의, 스쾃, 오아시스 프로젝트, 생태주의, 탈핵, 핵몽 작성일2023.12.21 김용익 컬렉션 연구조사 가이드 글 | 장승연(미술사, 독립연구자)작성일 | 2022.12.201. 사전 정보 미술가, 그리고 활동가이자 미술교육자로서 김용익(金容翼, Kim Yongik, b.1947- )은 사회 속 예술의 역할과 그 가능성에 대하여 질문을 지속하고 있다. 미술 작업과 개념, 제도는 물론 미술 밖의 사회 정치 문화 상황 속에서 비판성을 상실한 채 고정되고 권력화되어버린 것들에 훼방을 놓고 전복을 꿈꾸며 그로부터 탈주하려는 작가의 개념적 태도와 실천의 결과다. 따라서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김용익의 다층적인 예술 세계를 한 작가 개인의 예술적 성취와 업적의 발자취로만 단선적으로 접근한다면, 그의 예술과 삶을 오롯이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김용익의 50여 년 예술 여정은 한 미술가의 소서사를 넘어서 한국 현대미술사는 물론 사회, 정치, 문화의 중요한 쟁점 및 이슈와 종종 직면하며, 그 거대서사 속을 예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한 개인의 실천을 보여준다.김용익의 다양한 활동과 이를 관통하는 일관된 개념주의적 태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가 작성한 글들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김용익은 젊은 시절부터 쉼 없이 글쓰기를 지속하며 신문을 비롯한 출판 매체부터 온라인 플랫폼에 이르는 다양한 공간에서 꾸준히 자신의 소신과 생각을 발언하고 있다. 작가의 말이 개입될 때 작업이 온전히 성립되고 전달될 수 있다는 개념주의적 입장에서, 김용익의 작업과 다양한 활동, 글들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그의 예술 세계를 견고히 구축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사유를 좇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그리고 여러 갈래로 펼쳐져 온 그의 예술 활동의 궤적들을 하나의 결로 교차시키는 중요한 통로로서 작가의 글과 관련된 주요 참고자료는 다음과 같다. 김용익,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 정치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의 연결을 보여주기』, 현실문화연구: 포럼A, 20112011년 현실문화연구와 포럼A가 공동 발행한 김용익의 글 모음집이다. 1974년부터 2011년까지 30여 년간 김용익이 작성한 77편의 컬럼, 에세이, 작품 설명문, 메모 등과 100장의 작업 및 설치 이미지를 선별하여 수록했다.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 출간기념전 《무통문명無痛文明에 소심하게 저항하기》(2011)을 개최했다. 김용익 블로그 https://blog.naver.com/profyongik김용익이 2005년부터 현재까지 운영 중인 블로그이다. 낙서와 일기부터 수업자료, 비평, 공공미술 등에 대한 카테고리에 따라, 미술, 개념, 제도, 사회, 정치, 현장에 이르는 작가의 사유를 전달한다. 『김용익: 가까이... 더 가까이...』, 일민미술관, 20162016년 일민미술관에서 개최한 김용익의 개인전 도록이다. 이 전시는 작가의 40여 년 작업 세계를 조망한 회고전으로,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및 해외 미술계에서 김용익의 작업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전시 도록은 출품작과 설치 전경 외에도 작가의 작업 세계 전반의 주요 작업 이미지 및 인쇄물 자료 등 아카이브가 정리되어 있다. 2. 이해를 위한 배경정보 김용익은 194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6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거쳐 1968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 후 대학 4학년이던 1974년 《에스쁘리 4회전(四回展)》에 참여하며 미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0년대 작업 초기, 그는 모더니즘 미술의 논리적, 개념적 사고로부터 영향을 받은 〈평면 오브제〉 시리즈를 선보이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모더니즘 미술의 폐쇄성과 획일화에 점차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1981년 제1회 《청년작가전》에서 대표작인 〈평면 오브제〉를 상자와 포장지에 밀봉해 전시함으로써 이 시리즈의 종결을 선언한다.이후 김용익의 작업은 1980년대 ‘판지’, ‘빗금’, ‘조각’ 시리즈, 1990년대 ‘땡땡이’ 시리즈와 〈가까이...더 가까이...〉 시리즈, 2000년대 〈절망의 완수〉 시리즈, 2010년대 새로운 ‘땡땡이’ 시리즈로 이어진다. 각기 다른 제목만큼이나 개별적인 시리즈로 보이지만, 이 시리즈들은 미술의 권력화와 폐쇄화, 제도화된 인습 등 예술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이에 저항해온 작가의 일관된 태도와 개념 아래 연결되어 있다. 작가의 표현대로, 체제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전복시키려는 남근주의적 태도가 아닌, 체제 안에서 이를 패러디하며 훼손시키는 페미니즘적 전략으로서의 아방가르드적 행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2000년 경기도 양평으로 이주한 후, 작가의 작업 세계는 새로운 갈래로 확장된다. 바로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2000년 양평으로 이주하면서 첫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양평 프로젝트/프로젝트〉를 기획한 후 작가는 지자체 사업부터 비엔날레, 다양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사회 속 예술가의 역할을 고민하고 실천한다. 나아가 그의 관심사는 공공성을 넘어, 자연미술, 생태미술의 대안성으로 확장된다.김용익은 1990년대 말 이후 변화하고 연대하는 한국미술계의 현장에 활동가로서 활발히 참여했다. 1998년 광주비엔날레 정상화 및 관료적 문화행정 타파를 위한 범미술인 위원회 조직위원장을 맡은 이후 1999년 문화개혁시민연대, 대안공간 풀, 2001년 미술인회의 창립에 관여하며 한국미술 제도 개혁과 미술인 연대의 순간에 함께 했다. 또한 2001년 ‘공공미술제도 도입을 위한 예술인협의회’ 공동대표, 2006년 ‘공공미술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공공미술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행정가로도 참여했다. 1991년부터 2012년까지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모더니즘 미술모더니즘 미술은 19세기 중반 이후 기존 미술의 가치에 대하여 도전하며 새로운 양식을 실험하고 미술의 자율성을 획득한 미술 경향을 일컬으며, 1950년대 미국 추상표현주의에서 이론적 정점을 이룬다. 한국의 경우, 1970년대 한국미술계의 중심으로 이룬 단색조 추상회화 경향을 구체적으로 지칭하며 ‘모노크롬 회화’, ‘단색화’로도 불린다. 김용익의 작업 세계에 있어 모더니즘은 작업적 기반이자 비판의 대상으로서 양가적 의미가 있다. 그는 1970년대 평면화의 문제로 귀결되는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깊은 영향을 받으며 작업을 시작했고 자기검증적 모더니즘 미술의 아방가르드적, 비판적 태도와 개념적, 논리적 사고를 받아들이면서도, 모더니즘 미술의 자기폐쇄적, 순수화, 권력화에 대하여 비판해왔다. 따라서 김용익은 아방가르드 정신을 유지하는 모더니즘과 권력화되면서 비판성을 상실하게 된 모더니즘을 명확히 구분하며, 자신의 작업을 전자의 모더니즘의 맥락에 위치시킨다. 즉 김용익의 작업은 모더니즘에 정면으로 반격하여 뒤엎는 것이 아니라 모더니즘의 내부에 균열과 파열구를 만들며, “모더니즘 도상과 그것의 흠집을 통한 탈모던적 해체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방식으로 저항과 전복을 추구한다.개념주의 미술에 있어 개념주의란 미술 개념에 대한 논리적, 인식론적 접근에 바탕을 두고 작업을 진행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개념예술에서 우리가 취할 것은 표현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회의에 회의를 거듭해온 명철한 ‘의식’”이며 “개념예술의 그 명철한 의식을 방법론으로 삼아 다시금 표현, 조형을 시도해야 한다.”는 김용익의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작업에 있어 개념주의는 예술작업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과 기존 가치체계에 대한 비판을 놓치지 않는 아방가르드 정신이다. 또한 김용익에게 예술가의 개념주의란 작업 제작 방식과 의도를 의미하는 것에서 나아가, 사회 속 한 명의 개인이자 예술가로서 취해야 할 삶의 태도이자 실천 방식이라는 의미를 함의한다. 〈평면 오브제〉김용익이 1970년대에 제작한 작업 시리즈이다. 캔버스 틀에 고정되지 않고 물성을 그대로 드러낸 광목천의 실제 주름과 에어브러시로 그린 주름 이미지를 함께 제시함으로써 “물질과 이미지의 대립 관계”라는 회화의 명제를 시각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 작업으로 김용익은 1970년대 모더니즘 회화작가로 불리게 되었으나, 물질성과 재현된 이미지를 동시에 문제시하며 회화의 지각과 인식의 한계를 직시한 점에서 이 시리즈는 회화의 평면성과 정신성에 중점을 둔 모더니즘 회화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위치에 자리한다. 김용익은 반복적인 작업에서 느끼는 자기 획일화에 대한 고민과 이러한 형식주의적 개념 작업이 담아내지 못하는 체험과 현실에 대한 고민이 커지자, 이 시리즈가 전위성을 상실했다고 판단하고 1981년 제1회 《청년작가전》을 마지막으로 시리즈를 종결한다. ‘땡땡이’‘땡땡이’는 1989년작 〈두 조각〉에서 철판에 뚫린 형태로 처음 등장한 뒤, 1990년대 이후 김용익 회화의 주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이방연속무늬로 화면 위에 배열된 동그라미들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추상의 형태이지만, 사실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탈 권력의 텅 빈 기표로서 화면 위에서 동시에 작동하며 모더니즘의 소통 부재를 비꼰다.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로 귀결되는 회화의 신비주의를 교란시키는 ‘땡땡이’는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비판과 저항의 방식을 드러낸다. 〈가까이...더 가까이...〉 시리즈로도 불린다. 〈가까이...더 가까이...〉김용익이 1990년대 이후 제작한 대표 작업 시리즈이다. 이 작업은 ‘땡땡이’라 불리는 동그라미 혹은 사각형의 추상 형태가 화면 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려진 미니멀한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봐야만 보이는 드로잉, 메모와 낙서, 심지어 보관 중에 생긴 곰팡이나 의도치 않은 훼손 자국을 그대로 남겨두어 “모더니즘의 인증된 이미지 권력에 흠집내기”를 시도한다. 이처럼 가까이에서만 보이는 것들은 견고한 모더니즘 화면으로 그의 작품을 마주하던 관람자의 처음 시각을 미끄러뜨린다. 즉 관람자와 작품과의 거리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의도적 연출을 통하여 서구의 고정된 시점과 단일화된 작품의 의미를 유희적으로 해체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현수막1999년 《코리안팝》, 《98 도시와 영상 - 의식주》, 《동북아와 제3세계미술》 등 단체전에 참여하면서 김용익은 현수막 형식의 ‘땡땡이’ 작업을 선보였다. 전시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주로 전시장 외부의 야외 공간에 설치되는 현수막으로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작품과 비작품, 예술과 일상, 전시 공간과 일상 공간 사이의 이분법적 경계를 해체하고자 한 것이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 김용익은 〈가족은 있어도 좋지만 없어도 좋다〉(2004), 〈나의 유산은〉(2004)과 같이 주로 이미지와 텍스트가 병기된 방식으로 현수막 작업을 제작한다. 또한 행정도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종촌-가슴에 품다》(2007)에 출품한 〈Eco-anarchism Project-Deserted Park〉를 비롯한 다수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도 현수막 작업을 선보였다.공공미술 공공미술의 개념은 한가지 의미로 정의하기 어렵다. 시대적 관점에 따라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공공’의 의미는 공간과 장소의 맥락에서 지역사회, 시민사회의 문제로까지 확장되었다. 한국 공공미술 제도의 전개과정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1982년 문화예술진흥법에 ‘건축물에 대한 미술장식’ 조항이 신설되어 환경조형물이 활발히 제작되고, 1990년대에 이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개념과 제도 정립을 촉구하는 논의가 활발해졌다. 2000년대에는 공공미술에 대한 제도적 토대가 정부와 지자체 주도로 본격 마련되기 시작하며 한국사회의 주요 문화정책으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2007년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아트인시티’, 안양시의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등 공공미술 관련 프로젝트들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며 공공미술 프로젝트 붐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았다.김용익은 삶과 예술의 접점을 넓혀가는 장르로서 공공미술의 대안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한국미술의 공공미술 제도 전개 과정에서 작가로서, 행정가로서 두루 활동했다. 그가 주목한 대안성이란 모더니즘의 개발주의와 성과주의, 일상생활과 결별한 미술의 자율성의 폐쇄회로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한다. 2000년 〈양평 프로젝트/프로젝트〉 기획을 시작으로 공공미술에 뜻을 둔 그는 2001년 공공미술 개념의 인식 변화 및 법적·제도적 개선에 뜻을 함께한 미술인들의 주도로 결성된 ‘공공미술제도 도입을 위한 예술인협의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5년 지자체 주도의 첫 공공미술 사업인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 작가로 참여했으며, 2006년 문화관광부 주최의 ‘아트인시티’ 진행을 위해 출범한 ‘공공미술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자연미술, 생태미술김용익은 공공미술에 대한 관심과 활동에 이어서, 자본과 권력, 완성을 지향하는 개발주의에 대하여 저(低) 엔트로피적 방식으로 대응하는 자연미술, 생태미술의 정치성과 대안성에 주목해왔다. 따라서 2000년대 이후부터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비롯하여 국내외의 여러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자연 그대로의 생태 환경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권력 패러다임에 저항하는 에코 아나키즘적 미술을 실천해왔다. 보다 확장된 관점에서, 김용익은 재료를 아껴 쓰고 불필요한 노동력이나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하며 기존 작업을 지속적으로 편집하는 방식으로 저 엔트로피 미술을 추구하는 자신의 미술 태도, 즉 예술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련의 방식과 태도를 생태주의로 설명한다. 제1회 《청년작가전》1981년 3월 2일부터 3월 16일까지 덕수궁미술관(당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이다. 정부 미술행사를 개최하는 장소 정도로 인식되던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이 동시대 젊은 작가들을 조사, 연구, 발굴하여 전시를 기획함으로써 현대미술관 본연의 활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전시다. 김용익은 사진과 에세이가 결합된 종이 작업 〈‘신촌의 겨울’에〉(1981)와 그의 1970년대 대표 시리즈로 꼽히는 〈평면 오브제〉 시리즈 작업을 전시했다. 그런데 〈평면 오브제〉 작업을 상자에 넣어 밀봉하거나 포장지로 싼 상태로 출품함으로써 모더니즘 회화에 대한 회의감을 전시라는 공적인 방식으로 발언한 후, 그의 작업은 미술의 권력화와 예술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해체, 탈주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금호미술관 개인전(1997)1997년 3월 25일부터 4월 12일까지 서울 금호미술관에서 진행된 김용익의 개인전이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작가가 20년간 제작한 작업을 한데 아우른 회고전 형식의 전시다. 김용익은 강성원, 박찬경, 류병학, 정광호 이상 4인의 평론가 및 작가의 글을 수록하여 이 전시가 작가 개인의 평가에 그치지 않고 197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쟁점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교차하는 논의의 장이 되도록 기획했다. 따라서 이 전시는 모더니즘 미술과 민중미술이라는 한국미술계의 첨예한 두 대립 진영의 한쪽에 속하지 않고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작가의 독자적인 위치를 가시화한 자리가 되었다. 일민미술관 개인전(2016)2016년 9월 1일부터 11월 6일까지 일민미술관에서 개최한 김용익의 회고전이다. 약 100여 점의 회화, 설치 및 아카이브 자료가 전시되어 다양한 스펙트럼의 미술인으로 활동해 온 작가의 40여 년 작업 세계를 총망라했다. 이 전시는 기존 미술은 물론 자신의 작업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반성적 자세를 유지하는 개념적 아방가르드 작가로서의 김용익의 태도와 실천을 총정리한 자리이자, 국내외에서 그의 작업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광주비엔날레 정상화를 위한 범미술인위원회1998년 광주비엔날레 재단 측이 제3회 전시의 총감독을 해촉하자, 일방적인 해임을 비판하는 미술인들이 모여 창립한 단체이다. 당시 전시기획위원회 위원을 맡았던 김용익을 비롯한 위원들은 총감독 해촉에 대응하며 사퇴했고, 뒤이어 김용익은 범미술인위원회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범미술인위원회는 1999년까지 짧게 활동했지만, 이 단체에서 이루어진 미술인들의 연대는 1999년 대안공간 풀의 공간 설립과 시민단체인 문화개혁시민연대 결성으로 이어졌다. 3. 관련 키워드 모더니즘 미술, 개념주의, 아방가르드, 전위성, 〈평면 오브제〉, ‘땡땡이’, 〈가까이...더 가까이...〉, 〈절망의 완수〉, 평면 인스톨레이션, 현수막, 공공미술, 자연미술/생태미술, 페미니즘, 에코 아나키즘, 비기념비성, 대안성, 제1회 《청년작가전》, 금호미술관 개인전(1997), 일민미술관 개인전(2016),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정상화를 위한 범미술인위원회, 대안공간 풀, 문화개혁 시민연대, 미술인회의, 공공미술제도 도입을 위한 예술인협의회, 공공미술추진위원회, 경원대학교 작성일2023.12.21 처음페이지 이전페이지 1 다음페이지 마지막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