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순은 여성미술을 개척하고 사회 변화를 지향하는 행동주의 미술의 초석을 다진 작가다. 1980년대 초반 실천문학과
리얼리즘 미학에 영향받아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한 김인순은 ‘여성 해방’과 정치, 사회 변혁 운동을 실현해 나가는 실천적인 여성미술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사회적 생산의 주체이자 생명을 생산하는 주체로서 여성의 힘에 주목해온 김인순은 1990년대 중반부터 여성의 모성 능력과 거대한 자궁으로서 ‘어머니 대지’의 원형적인 생명 창조력 사이의 유사성에 이끌렸다. 그로부터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더욱 강화한 본질주의적 여성미학을 발전시켰다. 이 무렵 시작된 <뿌리>와 <생명> 시리즈는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여성의 잠재적 능력을 ‘나무’ ‘뿌리’와 ‘대지’에 비유해 보여주었다. 김인순은 “뿌리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이고 여성의 역사이다”라며 여성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뿌리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가 부각되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뿌리와 여성을 동일시하였다. 서울 화실에서 대지와 나무를 관념적으로 그리고 있음을 답답하게 느낀 김인순은 1997년 양평으로 이주해 자연 변화 속에서 살아 있는 나무와 뿌리를 직접 관찰하면서 작품에 담았다. 김인순의 <뿌리> 연작은 굵은 뿌리에 연결된 무수한 실뿌리에서 역경을 딛고 생명의 리듬과 순환을 이뤄내는 긍정적 힘을 보여준다. 대지, 나무, 뿌리, 자궁의 모티브가 점진적으로 합일 단계에 이르며 김인순은 수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여성의 역동적인 힘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초기 <뿌리> 시리즈가 뿌리와 여성 생명력의 강한 일체감에 집중했다면, 2000년대에 들어서는 메마른 환경에서도 영양분을 찾아내는 실뿌리의 존재를 강조하면서 강인하고 끈질긴 인간의 생명력을 덧붙이고 있다. 이후 2005년 개인전 《느린 걸음으로》(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를 기점으로 2008년까지 제작된 <뿌리> 시리즈에서는 자연이 순환하는 풀숲과 유기체적인 자연 모습이 돋보인다. 화면 전반에 붉은빛 대신 황톳빛과 초록빛이 채워지며 물기 가득한 숲 풍경이 제시된다. 우주 만물의 어머니인 땅이 숲과 잎, 식물과 호흡하는 풍경은 숨 쉬는 생명의 질서와 자연의 리듬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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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야기>(2005)는 폭우로 흙이 쓸려 내려간 듯 나무 밑동과 뿌리가 땅 밖으로 노출된 장면을 담았다. 비탈 흙덩이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고 나무는 비탈 귀퉁이에서 간신히 대지를 움켜쥔 듯한 위태로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넓고 길게 뻗어나간 뿌리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생명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 위로 푸른 들풀들이 자라난 대지는 뿌리와 함께 숨 쉬며 잠재적인 생명력을 보여준다. 김인순은 땅을 식물 뿌리와 줄기, 잎, 꽃이 숨 쉴 수 있게 하는 어머니 자연으로 인식했으며, 여성 또한 이러한 자연의 리듬과 생명의 질서를 몸에 담아 생명을 길러낸다고 보았다. 초기 <뿌리> 시리즈에서 상처의 흔적을 통해 여성의 삶을 비유적으로 그려냈다면, 이 작품에서는 무너진 흙 위에서 다시 풀이 자라고 새롭게 뿌리내리는 유기체적인 자연을 닮은 여성의 생명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김인순은 1941년 서울에서 출생해 1962년 이화여자대학교 생활미술과를 졸업했다. 1982년 작업을 재개해 1984년 첫 개인전을 열며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1985년 시월모임을 결성했다. 이후 여성미술연구회 대표, 그림패 둥지 대표, 노동미술위원회 위원장,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민족미술인협회 공동회장을 역임하면서 민중미술 계열의 미술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문화위원,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이사, 여성문화예술기획 이사를 역임하며 여성단체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84년 첫 개인전 《김인순전》(관훈미술관, 서울)을 시작으로 1995년 《여성·인간·예술정신》(복합문화공간 21세기, 서울), 2005년 《느린 걸음으로》(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17년 《김인순 초대전》(지앤갤러리, 울산) 등 7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1986년 《40대 22인전》(그림마당 민, 서울), 제2회 시월모임 《반에서 하나로》(그림마당 민, 서울), 1987-1994년 《여성과 현실》 연례전(그림마당 민, 서울), 1989년 《89통일염원미술전》(그림마당 민, 서울), 1991년 《한국의 여성미술: 그 변속의 양상전》(한원갤러리, 서울), 1992년 《이동미술관: 우리들의 만남》(그림마당 민, 서울, 현대자동차 사업장, 울산 등 순회), 1993년 《코리아 통일미술전 コリア統一美術展》(도쿄 센트럴미술관, 오사카 현대미술센터, 일본), 1994년 《민중미술 15년: 1980-1994》(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97년 《97광주통일미술제》(국립5·18민주묘지, 광주), 1999년 제1회 《99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예술의전당, 서울),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광주비엔날레전시관, 광주), 2008년 《언니가 돌아왔다》(경기도미술관, 안산), 2019년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등 12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3년 예술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1997년부터 경기도 양평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