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동>(2004)은 서울
봉천동의 주거 지대를 그린 작품이다. 크기나 색의 농도를 이용한 원근감의 표현없이 화면 아래에서부터 높은 지대까지 같은 모양의 집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삼각형의 지붕과 사각형의 벽면과 창문 등 생략된 형태의 집들은 먹을 많이 묻혀 짙게 그은 윤곽선만으로 그려졌다. 서민층이 살고 있을 높은 언덕의 집들은 빽빽하게 붙어서 큰 원형을 이룬다. 그렇게 먹의 번짐으로 표현된 집의 무리들이 가로폭이 긴 화선지의 면을 거의 채우고 상단에 약간의 여백을 남긴다. 사회문제에 대한 작가적 의식을 기조에 깔고 있지만 ‘막걸리 냄새’가 나는 인간미 풍기는 소박한 풍경을 수묵 작업으로 보여주었다.
김상섭(1963- )은 1990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였다. 1992년 자하문미술관(서울), 1993년 그림마당 민(서울), 1995년 이십일세기화랑(서울), 2008년 갤러리 눈(서울)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1990년 《광주여! 오월이여!》(그림마당 민, 서울), 《여성과 현실》(그림마당 민, 서울), 1991년 《서울에, 그 삶속에》(자하문미술관, 서울), 1994년 《민중미술 15년: 1980-1994》(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02년 《21세기와 아시아의 민중》(세종문화회관, 서울) 등이 있다.
김상섭은 민중미술가로 이력을 시작하였다. 광주 그림패에서 활동했던 작가는, 심야에 근로 중인 봉제 공장 재단사를 그리거나 탄광촌의 광부들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990년대 대표적인 민중미술 전시공간이었던 그림마당 민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이나 여성 노동 등을 다룬 여러 전시에 참여하고, 초기부터 민족미술협의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여 왔다. 김상섭의 작품들은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해 발언하는 리얼리즘 계보의 수묵화이다. 그는 먹을 진하게 써서 인물을 표현하고 약간의 채색을 더하여 노동 현장과 그 안의 군상들을 주로 그려왔다. 2000년대 이후의 개인전에서는 노동문제, 계급의식, 기층민중의 삶에 대한 직접적 발언보다는, 대관령과 남한강 등 우리 산천의 실제 풍경을 절제된 먹색으로 표현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