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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기억 그리고 존재〉(2003)에는 황량한 바다를 배경으로 고물차 한 대가 서있다. 낡은 고물차는 셀 수 없이 많은 의자를 싣고 있다. 그 수가 많다보니 의자는 차 밖으로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한계용량을 넘은 짐을 싣고 있는 초라한 고물차는 아무도 없는 이 적막한 공간 속에서 더욱 고단하고 힘겹게 느껴진다. 작품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고물차와 의자 더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의 삶의 고독과 고단함을 느끼게 한다.
지석철(1953― )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8년 〈한국 현대구상회화의 흐름〉(서울시립미술관)전을 비롯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다. 1983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상, 석남미술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홍익대학교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석철은 일상에서 마주친 소소한 대상들이 어느 순간 새롭게 인식되는 상황을 그리는데, 특히 이 상황에서 ‘의자’라는 모티프를 꾸준히 사용해오고 있다. ‘사실과 현실’그룹 동인으로 활동하던 1970년대 말에는 의자의 쿠션을 클로즈업해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반작용〉 시리즈 작업을 하였다. 사실성을 강조한 작업이지만 수십 배로 확대된 쿠션 표면의 주름은 오히려 대상을 낯설게 만들면서 그곳에 앉았다가 간 누군가의 흔적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어떠한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이와 같은 낯선 심리적 자극은 1980년대 초부터 제작된 ‘미니의자’ 작업들로 이어진다. 의자란 사람이 앉는 것이기 때문에 지석철의 작품 속 빈 의자들은 인간의 존재와 더불어 그 의자에 앉았다가 간 수많은 사람들의 부재를 은유하는 매개체가 된다. 더구나 이러한 의자는 작품 속에서 의자 본래의 기능을 저버리는 앙상한 골격만 남은 작은 의자로 제시됨으로써 부재의 쓸쓸함을 더욱 강조한다. 초반에는 이러한 의자를 동어반복적으로 배열하여 집단성에서 오는 특유의 부재의 은유성을 드러내었다면, 점차 바다, 고층빌딩 등에 의자가 놓임으로써 상황으로서의 인식을 강화하고 있다. 배경이나 의자 자체는 일상적인 현실의 대상이지만 이 둘이 합리적 맥락을 벗어나 조우함으로써 화면에서는 현실을 초월한 다양한 이야기가 탄생한다. 그것은 부재의 은유인 의자를 통해 지나간 시간, 추억,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관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