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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왕제색도〉(2002)는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1751)를 디지털 이미지화해서 그것을 크리스털로 재현한 작품으로, 전통 산수화를 재해석하는
황인기 특유의 현대적 방법론이 돋보인다. 그는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를 회화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각 픽셀에 크리스털을 붙이거나 붙이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작과정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이 작품은 결국 디지털의 이면에 공존하고 있는 인간, 즉 디지털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아날로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반짝이는 크리스털이 주는 강렬한 인상은 표면적인 물질로부터 오는 미감과 그 물질이 표현해내고 있는 명화의 아름다움 사이에 존재하는 미적 가치의 차이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이와 같이 전통과 현대,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 성찰은 작품을 통해 관람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황인기(1951― )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를 중퇴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2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199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 2011년 아르코미술관 대표작가로 선정되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황인기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전통적 수묵산수화나 서양의 명화들을 컴퓨터로 디지털 이미지화한 뒤 그 픽셀을 크리스털, 플라스틱 블록, 실리콘, 리벳, 못 등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작업을 해왔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작품 안에서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면서 현대 한국화의 뿌리 깊은 고민을 해소할 실마리를 제공한 셈이다. 또한 그는 디지털 매체를 활용하고 현대적인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노동집약적 작업으로 완성되는 결과물을 보여주면서 물질문명 중심의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다. 결국 작가는 가장 현대적인 방법으로 전통과 역사, 자연과 인간의 가치를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디지털 산수’로 유명했던 황인기는 최근 〈플라 차일드(Pla Child)〉 시리즈를 통해 전쟁고아, 기아 아동, 어린이 범죄 현장 등의 기록사진을 플라스틱 블록으로 재현하거나, 〈내일이면 어제가 될 오늘〉 시리즈를 통해 부패 또는 부식된 오브제를 직접 제시하면서 보다 강한 메시지로 물질문명의 폐해로 인한 동시대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추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