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eloping’은 홍명섭의 첫 번째 개인전인 〈면벽전〉(1978)에서 등장하여 현재까지 지속되는 개념으로서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관통한다. 이는 ‘감싸다, 뒤덮다’의 뜻을 가진 ‘envelop’과 어원적으로 반의어인 ‘develop’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작가는 작품 속에서 ‘en―veloping’과 ‘de―veloping’이라는 단어를 서로의 반대항으로 사용하면서 ‘―less’의 미학을 추구하는 자신의 작품관을 끊임없이 드러내왔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de―veloping’은 다양한 부제가 달린 연작으로서 198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는데, 그 중 하나인 〈de―veloping; 실루엣 캐스팅〉(1984―2010)은 철판을 가위의 실루엣대로 커팅한 작품이다. 가위라는 독립된 형상(존재)인 동시에 철판을 오려낸 흔적(부재)으로서 이미지와 일루전의 경계에 있는 이 작품은 사물을 고정된 인식으로부터 해방시키며 ‘de―veloping’이 지니는 해체의 미학을 구현한다.
홍명섭(1948―)은 1976년 서울대학교 조소과, 1986년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98년 〈de―titled〉(즈볼러 시립미술관, 네덜란드), 2004년 〈Horizontality〉(아르코미술관), 2012년 〈Running Railroad〉(세르비아 노비―사드 문화예술회관) 등 개인전을 가졌으며, 1990년 제44회 베니스비엔날레, 1997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삶의 경계〉, 2012년 〈SeMA Gold 2012: 히든트랙〉(서울시립미술관) 등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한성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홍명섭의 작업에는 학창시절부터 심취해 있던 불교적 세계관이 녹아 있다. 작가와 작품과의 만남, 관람자와 작품과의 만남을 ‘인연’, ‘촉발’ 등의 단어로 설명하는 그는 예술에 있어 모든 고정된 가치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예술의 속성인 ‘영구불변한 재료와 형태’ 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변태(metamorphosis)’라는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이는 그가 주로 사용하는 접두어인 ‘meta―’, ‘para―’, ‘ana―’ 등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 어휘들에서 잘 나타난다. 실제로 종이, 테이프, 끈 등 연약한 재료들이 주가 되어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형상을 이루어 온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고 닳아지는 과정을 거쳐 점차 소멸되어 간다는 점에서 생명의 주기를 따르고 있다. 전시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폐기되는 이 작품들은 기념비적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종의 남근적, 수직주의적 성향에 반대되는 수평적, 자연친화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