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소개
2014 서울사진축제는 ‘서울視·공간의탄생: 한성, 경성, 서울’을 주제로 1876년 개항 이후 한성에서 경성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도시경관 변화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외국인의 조선 여행기, 사진첩, 정부와 서울시의 기록사진 아카이브, 관변 간행물, 매체사진, 사진가들의 작품사진 등 다양한 맥락에서 생산된 사진들이 보여주는 서울의 경관을 통해 각 시대의 도시이미지와 그 변화 과정을 읽어본다.
특히 서울 도시경관 변화의 주요 원인인 도시계획, 근대 여가문화, 전쟁, 근대화?산업화 정책 등의 요소들을 돌아보며 서울 공간을 다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도시경관 형성과 변화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주요 요인들을 연대기적으로보여줌과 동시에 역사기록물로서의 사진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대한 가치를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제1부 한성에서 경성으로
한성의 원형경관을 가늠할 수 있는 1880년대의 사진을 시작으로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생산된 사진자료를 통해 당시의 도시경관은 물론, 생활상과 역사적 상황 등 경성의 시대상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전시내용
- 1945년 해방이전까지 근대기에 생산된 도시경관 사진 아카이브
- 개항기 원형경관 사진과 근대 건축 사진
- 일제 강점기 도시계획 관련 사과 근대 관광 관련 자료
전시 아카이브
- 국립 도서관, 국회도서관, 독립기념관, 민족문제연구소,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자료
1394년 천도한 조선의 수도 한성은 유교적 합리주의와 풍수지리적 원리에 기초하여 형성된 성곽도시였다. 당시 만들어진 한성의도시경관은 조선 왕조 500여 년간 큰 변화 없이 원형경관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도시의 모습은 전통적인 재현방식인 회화와 지도 속에 고스란히 담겨졌으며, 그 도상들을 통해 한성이라는 공간에 대한 당대인들의 이해와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구미각국과 외교관계가 맺어지고 한성 내 고지대를 중심으로 첨탑형의 각국 공사관과 선교학교 그리고 종교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서구의 도시경관적 요소들이 한성의 스카이라인에 중첩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1897년 ㅡ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본격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황권을 강화하고 독립국가임을 천명하기 위해 세운 원구단과 황궁우 그리고 독립문 등 정치적 기념물들과 한성부 도시개조사업에 의해 새롭게 구축된 경운궁 중심의 환상방사선 가로망에 의해 원형경관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도시경관의 근대화가 촉진되는 시점인 1882~1883년은 이 땅에 사진술이 도입된 시기이기도 한데, 따라서 변모하기 시작한 한성의 모습은 근대적 시각매체인 사진에 담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다수의 도시경관 사진이 서양인과 일본인에 의해 촬영되었으며, 도시개조를 위한 주체적인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인의 시선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풍경으로 존재했다.
본 섹션에서는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기 전까지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과 일본인이 남긴 여행기와 사진첩을 통해 서울의 원형 경관을 살펴본다. 또한 대한제국기의 주요 건축물과 정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외교관 거리의 모습들을 통해 점차 변모해 가는 도시경관의 변화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조선 정부는 1882년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과 독일(1883년), 러시아와 이탈리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1892년) 등 구미열강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각국의 공사관들이 정동을 중심으로 건축되었으며, 점차 외국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새롭고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한성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한 은 스스로의 건축적 지위와 시각적 영향력을 견주기 시작했다.
서구의 근대도시계획 이론과 건축기술 등을 바탕으로 세워진 근대 건축물들은 전통적인 건축 양식과 기존의 가로경관들을 대체하면서 새로운 도시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단층 위주의 낮은 스카이라인, 좁고 구불구불한 길, 기와와 초가(草家) 지붕, 성곽과 성문 등 전통적인 가로경관 요소들이 고층 위주의 스카이라인, 직선과 광폭의 도로, 벽돌과 유리와 시멘트를 재료로 한 서구의 건축양식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가로경관으로 변화되었으며, 그 안에서 살아간 조선인들의 경관 의식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모해갔다.
본 섹션에서는 1900년대부터 1940년대 사이에 세워진 근대 건축 사진을 아카이빙하여 10개의 카테고리(행정기관, 관공서, 교육기관, 주택, 기반시설, 문화공간, 사무소 빌딩/상점/회사, 언론, 은행, 종교시설 등)로 나누어서 구성하였다. 본 건축사진 아카이브를 통해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과 그 건축물들이 만들어낸 경성의 도시경관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당시 경성의 시민들이 어떤 시각적 생활환경과 도시경관 조건에 놓여있었는지 가늠해보고자 한다. 나아가 새롭게 재편된 시각환경 속에서 당시 경성 시민들의 도시에 대한 미적 감수성과 그에 대한 반응 역시 문학 작품을 통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 열강들이 앞다투어 개최했던 만국박람회는 ‘산업의 디스플레이’이자 ‘제국의 디스플레이’였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크고 작은 박람회가 열렸는데, 조선총독부가 주최하거나 후원한 주용 박람회를 살펴보면 1915년 《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 1929년 《조선박람회》, 1932년 《신흥만몽박람회》, 1940년 《조선대박람회》 등이 개최되어 식민지 경영의 성과와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장으로 활용되었다.
박람회장 내에는 직영관과 각 도(道) 특설관 뿐만 아니라 일본의 각 부현(府縣) 특설관과 식민지 지방관 그리고 기업 특설관 등이 설치되었으며, 각 전시관들은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로 지어져서 박람회장은 마치 근대 건축양식의 실험장이 되었다. 일제는 박람회장 안에 조선의 건축양식을 차용한 이국 취향의 건축물과 제국의 권위와 선진성을 선전하기 위해 르네상스 및 시세션 양식, 모더니즘 양식을 차용한 건축물을 지어 상호 비교케 함으로서 조선 건축의 낙후성과 향토성을 강조했다.
박람회에 투영된 이러한 제국주의의 시선과는 무관하게 박람회장을 찾은 수많은 관람객들은 실험적인 근대 건축물들을 보며 근대적 감수성을 획득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는 도시경관에 대한 인식 변화를 이끌었다. 이 섹션에서는 1929년 개최된 조선박람회의 주요 전시관의 외관 사진을 중심으로 식민지 건축 양식의 이중적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경성은 조선이 강제병합된 직후인 1912년 경성시구개정사업을 통해 경성을 식민지 수도로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근대적인 도시계획이라 할 수 있는 1937년의 <경성시가지계획령>이 실시되면서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춰갔다. 경성시구개정사업은 1912년 10월 7일 시구개정에 관한 훈령(총독부훈령 제9호)이 발포되고, 그해 11월 6일 총독부고시 제78호로 경성시구개수예정노선 29개가 고시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예정노선은 이후 5차례의 개정을 거치면서 모두 47개의 노선으로 확정되었으며, 1929년 총독부 경성토목출장소에서 경성부로 이관되어 1937년 경성시가지계획이 개시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도시위생 상태와 가로경관의 개선을 목적으로 시행된 시구개정사업으로 인해 가로망 체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결국 이 과정에서 서울은 근대적인 도시 공간인 경성으로 탈바꿈되었다.
경성토목출장소에서는 1929년 제2기 사업이 마무리되자 그 동안의 과정과 성과를 사진으로 담은 『경성시구개정사업 : 회고20년』(1930)이란 책자를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시구개수사업 이전과 이후의 모습을 비교 촬영한 주요 노선 30곳의 가로(街路) 사진이 실려 있다. 한 쌍으로 구성된 딥틱(diptych)의 편집 방식은 시구개정사업의 성과를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시정(施政)의 효과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데 활용되었다. 이러한 비교방식의 사진적 배치는 제국주의 시대 고안된 시각적 설득 방안의 하나로, 시구개정사업으로 인해 식민지 조선이 근대화/문명화되었다는 착시효과를 일으키게 했다.
결국 도시공간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도시계획 차원에서 실시된 시구개정사업은 노폭의 확장과 노선의 확대 그리고 도로의 직선화 등을 통해 경성을 근대 도시로 변모시켰지만, 전통적인 도시공간의 파괴와 해체 속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사업에는 식민지적 폭력성이 수반되어 있다. 비교방식을 통해 강조된 경성의 근대화된 모습 이면에는 많은 것이 은폐되고 배제되었는데, 서울의 역사성과 그 공간을 매개로 정체성을 형성해왔던 조선인들의 집단기억들이 송두리째 뿌리 뽑힌 것이다.
식민지 수도 경성은 본격적인 도시계획의 실시와 근대건축물의 등장으로 물리적인 공간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경성의 도시경관 이미지는 실질적으로 관광산업 차원에서 개발되어 표상되고 유통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주무관서인 철도국을 위시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반관반민 형태의 조선관광협회, 일본여행협회 조선지사 등을 내세워 한반도를 대상으로 한 관광정책과 관광사업을 전개시켰다. 당시 식민지 문화정책의 하나로 시행된 관광사업은 관광산업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주요 관광객인 일본인들에게는 제국 신민으로서의 우월감을 느끼게 하고, 조선인 관광객들에게는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내면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 관광지로서의 조선은 원시적이고 전근대적인 소재와 이미지로 표상되었고, 이렇게 표상된 이미지는 대량생산된 관광 관련 인쇄물을 통해 국내외로 유통시켰다.
경성도 예외가 아니어서 각종 사진첩과 사진엽서 그리고 관광안내책자 등을 통해 새롭게 발견된 풍경으로서 경성이 표상되었다. 본 섹션에서는 1930년을 전후해서 운영되기 시작한 경성유람버스의 주요 코스를 중심으로 경성의 이미지가 어떻게 생산되었으며 그 코스(장소)가 갖는 식민주의적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그리고 <경성 경승>, <경성대관> 등의 제목이 달린 경성 관련 사진엽서 세트를 실물 전시하여 경성의 이미지가 어떻게 관광지 상품의 하나로 소비되고 유통되었는지 살펴본다.
제2부 경성에서 서울로 식민지 수도라는 한계를 안고 근대 도시로 변모한 경성이, 945년 해방 이후 한국전쟁과 전후 재건,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경제적 근대화와 재개발 등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날의 메가시티 서울로 변화해온 과정을 다룬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근대화 계획에 따른 서울의 경관 변화가 담긴 기록을 살펴보는 과정은 두 방향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는 정부및 관변 간행물, 언론 매체 등 공식적인 기록물이 서울의 경관 변화를 어떻게 기록하고 이를 통해 어떠한 ‘근대성’을 표상, 전달하고 있는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동안 사진가들은 변화해가는 서울의 경관에 대응해 어떤 방식으로 이를 재현해 왔는가이다.
전시내용
-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생산된 서울 사진 아카이브
-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과 이후 전개된 서울 공간의 근대화 과정
- 1980-1990년대 도시 재개발에 대한 사진가들의 반응
- 2000년대 예술사진의 한 흐름으로 급부상한 도시경관사진을 촬영하는 사진가들의 작품
2014 서울사진축제는 ‘서울視 · 공간의탄생: 한성, 경성, 서울’을 주제로 1876년 개항 이후 한성에서 경성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도시경관 변화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외국인의 조선 여행기, 사진첩, 정부와 서울시의 기록사진 아카이브, 관변 간행물, 매체사진, 사진가들의 작품사진 등 다양한 맥락에서 생산된 사진들이 보여주는 서울의 경관을 통해 각 시대의 도시이미지와 그 변화 과정을 읽어본다.
특히 서울 도시경관 변화의 주요 원인인 도시계획, 근대 여가문화, 전쟁, 근대화 · 산업화 정책 등의 요소들을 돌아보며 서울 공간을 다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도시경관 형성과 변화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주요 요인들을 연대기적으로보여줌과 동시에 역사기록물로서의 사진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대한 가치를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식민지 수도라는 한계를 안고 근대 도시로 변모한 경성이,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후 복구와 재건,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경제적 근대화와 재개발 등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 메가시티 서울로 변화해온 과정을 사진자료, 사진가들의 기록사진과 작품사진을 통해 살펴본다.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의 전재 복구 및 재건 운동으로부터 196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경제적 근대화는 국정목표의 제1과제였다. 이 과정에서 진행된 도시화와 사회기반시설의건설, 산업화를 통해 서울은 거대한 ‘매머드 빌딩’들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근대화된 도시로 급속히 재조직되고 있었다.
이러한 근대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 근대화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 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크고 작은 박람회, 전시회가 끊임없이 열렸고, 화보 형태의 다양한 관변 출판물들이 간행되었다. 그 속에서 사진은, 아무도 실체를 모르며 어디로 향해야 할 지 모르는 채 당위 차원에서 반복하여 외치던 ‘근대화’, ‘개발’ 같은 말들을 손에 잡히는 현실의 것으로, 선망의 대상으로 구체화하여 눈앞에 제시하는 수단으로써의 역할을 떠맡고 있었다.
이 섹션에서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발행된 정부 공보물, 공식 기록물, 관변 간행물 등에 수록된 사진, 구호, 도표 등을 통해, ‘근대화된 도시 서울’의 이미지가 개발 주체에 따라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특히 ‘조국 근대화’ 라는 구호가 지향하는 이상을 현실 공간 속에 제시한 전형화된 이미지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들이 의미하는 “근대”가 무엇이었으며, 한국인에게 경제 발전과 번영, ‘근대’라는 관념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교육하고 설득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전후 복구가 이루어진 1950~1960년대의 서울 시내 중심가를 사진으로 기록한 성두경의 사진을 살펴본다.
그리고 토목학자로서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며 그 과정을 기록한 전몽각의 사진을 통해, 근대화의 상징,
“삼천리가 이웃 된다”는 고속도로 건설이 지방의 전통적 향촌 부락 공간과 자연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해체해나가는 광경을 지켜보는 사진가의 시선을 함께 살펴본다
‘재건’과 ‘조국 근대화’로 돌진해가던 시기, 그 추진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지향과 성과들은 서울의 경관에 어떻게 녹아 들어가고 있을까. 경제 개발의 과정에서 서울이 도시 공간 구조와 형태를 바꾸어가는 동안 그 공간을 채웠던 정치적, 사회적 풍경들을 살펴본다.
이승만 정권 시기의 정치권력이 주로 반공주의와 카리스마적 개인에 의존했다면, 이러한 정치적 비합리성에 대한 저항이었던 4.19를 거친 후 5.16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 시기은 다른 양상을 보였다. 박정희 시대는 경제 차원의 ‘근대화’ 뿐 아니라 근대적 국민 만들기를 통한 국민국가 형성에 주력했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재건과 산업화를 국가적 목표로 추진하고 그 성과를 보임으로써 개발독재체제에 대한 일정한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 성장과 함께 체제가 한계에 이르자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한국적인 것, 민족의 역사를 구성하여 민족주의를 통해 집단적 동질성을 강화함으로써 산업화 추진을 위한 동원체제, 개발 독재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권위주의적 체제를 강화해나갔다.
이 섹션에서는 먼저 정부의 시정 공보용으로 제작해 극장에서 상영한 보도물 <대한뉴스> 속에 등장한 표어들을 살펴본다. 이 시기는 계몽 혹은 선전의 목적으로 ‘조국 근대화’ ‘반공’ 같은 국가적 기조부터, ‘불조심’, ‘저축’, ‘에너지 절약’ 등의 일상에 대한 규율까지 구호와 표어로 쏟아져 나온, ‘구호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국가적인 중요 행사와 사건을 기념, 경축하거나 국빈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시내 곳곳에 세워졌던 아치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1968년부터 1971년까지 4년간 건립한 역사적 인물 15인의 동상들의 사진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는 구호, 동상, 아치와 함께 서울의 시가지를 채웠던 관제 시위와 군사 퍼레이드, 대중 동원의 풍경을 함께 살펴본다. 이 정치적 풍경들은 한국의 ‘근대화’ 추진이 국민에게 주입하려 했던 담론들, 혹은 인정할 수밖에 없던 담론들, 그리고 그 담론들이 국민에게 배정하고 있는 자리를 확인하게 한다.
건설업이라는 용어가 법적 언어로 등장한 것은 1958년, 도시계획법이 제정된 것은 1962년이다. 그로부터 16년 후 도심재개발기본계획이 수립된다 (1976년 12월 도시재개발법 제정, 1978년 도심재개발기본계획 수립). 이후 서울은 본격적인‘ 개발’과‘ 발전’을 목표로 달려간다. 도심 중앙부터 외곽까지 철골이 세워지고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국이 경제적 부를달성할수록 삶의 외향적 조건은 가파르게 변화되었다. 당시의 서울경관은 가난과 구태를 제거하고, 수치와 불편함을 개선하겠다는 목표 아래 들쑥날쑥 바뀌어갔다.
1960년대 이래 서울은 개발과 재개발, 철거와 신축, 강제이주와 정착이 신경질적으로 공존하며 힘겨루기를하고 있는 셈이다. 한 때 개발의 상징이던 곳은 어느새 사라져야 할 도시의 흉물이 되기도하고,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과 같은 국제 행사에 맞춰 국격을 올릴 도시 이미지를 위해 삶의 터전이 파헤쳐지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과 새로 살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들 간의 이주가 교차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자연경관 찾기’와 발맞춰 변화 이전의 경관을 되찾기 위해‘ 철거’와‘ 폭파’를 행하고‘, 생태주의’라는 용어와 함께 환경을 고려한 개발이라는 테제로‘ 복원’과‘ 복개’가 진행된다. 물론 그 움직임 이면에는 “살기 좋은 서울”이라는 서울시의 캐치프레이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재개발의 운동성은 그 이면에“ 도시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라는 타자의 시선을 담보로 하고 이는 자본논리에 의한 끝없는 욕망의 흐름을 따라 순환한다. 개항 이후 외세에 의해 시작된 도시경관의 변화 이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선진에 대한 갈망’, 즉‘ post-서구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본 섹션에서는 공공기록으로서 촬영된 자료사진을 통해 재개발의 경향을 살펴보고, 현장을 누비며 재개발 이전부터 이후까지 촬영해온 작가들의 사진을 통해 서울경관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가들의 프레임으로 바라본 재건과 파괴, 신축의 서사시를 통해 당시 매체 속에서 드러나는 재개발에 대한 입장도 함께 조망한다.
건설업이라는 용어가 법적 언어로 등장한 것은 1958년, 도시계획법이 제정된 것은 1962년이다. 그로부터 16년 후 도심재개발기본계획이 수립된다 (1976년 12월 도시재개발법 제정, 1978년 도심재개발기본계획 수립). 이후 서울은 본격적인‘ 개발’과‘ 발전’을 목표로 달려간다. 도심 중앙부터 외곽까지 철골이 세워지고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국이 경제적 부를달성할수록 삶의 외향적 조건은 가파르게 변화되었다. 당시의 서울경관은 가난과 구태를 제거하고, 수치와 불편함을 개선하겠다는 목표 아래 들쑥날쑥 바뀌어갔다.
1960년대 이래 서울은 개발과 재개발, 철거와 신축, 강제이주와 정착이 신경질적으로 공존하며 힘겨루기를하고 있는 셈이다. 한 때 개발의 상징이던 곳은 어느새 사라져야 할 도시의 흉물이 되기도하고,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과 같은 국제 행사에 맞춰 국격을 올릴 도시 이미지를 위해 삶의 터전이 파헤쳐지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과 새로 살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들 간의 이주가 교차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자연경관 찾기’와 발맞춰 변화 이전의 경관을 되찾기 위해‘ 철거’와‘ 폭파’를 행하고‘, 생태주의’라는 용어와 함께 환경을 고려한 개발이라는 테제로‘ 복원’과‘ 복개’가 진행된다. 물론 그 움직임 이면에는 “살기 좋은 서울”이라는 서울시의 캐치프레이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재개발의 운동성은 그 이면에“ 도시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라는 타자의 시선을 담보로 하고 이는 자본논리에 의한 끝없는 욕망의 흐름을 따라 순환한다. 개항 이후 외세에 의해 시작된 도시경관의 변화 이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선진에 대한 갈망’, 즉‘ post-서구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본 섹션에서는 공공기록으로서 촬영된 자료사진을 통해 재개발의 경향을 살펴보고, 현장을 누비며 재개발 이전부터 이후까지 촬영해온 작가들의 사진을 통해 서울경관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가들의 프레임으로 바라본 재건과 파괴, 신축의 서사시를 통해 당시 매체 속에서 드러나는 재개발에 대한 입장도 함께 조망한다.
근대 이전 우리나라의 여가 생활은 공동체 중심의 생활 속에서 여가를 즐기는 일상적인 형태가 특징이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해방과 산업화를 거쳐 한국의 여가문화는 1960년대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바탕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며 본격적으로 변화했다. 여가의 전 사회적 대중화, 야외활동의 상시화, 도시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중심으로 여가문화가 성행했으며, 이 시기에는 카메라의 보급화에 따라 가족 나들이 사진도 양적으로 증가했다. 특별전 《여가의 탄생》에서는 서울의 대표적인 나들이 공간이었던 창경원의 모습을 통해 여가문화의 한 면을 살펴보는 ‘창경원의 추억’과 시민들의 나들이 사진을 공모하여 구성한 ‘추억의 나들이를 떠나요’로 꾸며진다. 이를 통해 나들이 장소에 대한 추억과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근대 여가문화의 시대별 변화와 공간의 변모를 살펴본다.
창경궁은 일제가 순종의 개인 오락장이었던 명전전 궁터를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명목하에 위락의 장소로 개발되어 1907년부터 궁궐의 전각, 궁문들을 헐고 궁전의 초석까지 파내 훼손시키며 2년후인 1909년 11월 1일 창경원이라고 이름을 고쳐 개원하게 되었다.‘국민들에게 실물 교육을 시키고 그들의 위한 장소로 창경궁을 일반에게 공개한다’는 순종의 뜻을 전국에 알리며 1천여그루 벚나무를 일본에서 들여와 심고 열대식물을 비롯한 갖가지 희귀식물, 곰, 사자, 코끼리등 1백여종 5백여마리의 동물이 전시된 17만평 규모의 당시 동양 최대의 동식물원도 함께 공개되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훼손되었던 창경원은 1954년부터 재건되어 1983년 다시 창경궁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매년 4월 초부터 벚꽃개화시기에 맞추어 서울시민의 축제 장소로 인기를 끌어왔던 ‘밤 벚꽃놀이’도 1984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지며 막을 내렸다.
본 전시에서는 1909년 개원 이후 1980년대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나들이 공간이었던 창경원의 모습을 서울시 아카이브 소장 사진자료들과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제작된 <대한뉴스> 창경원 관련 영상으로 살펴보고 이를통해 한국 근대 여가문화의 변천사를 살펴본다.